이기대 해안길의 낭만
모처럼 햇빛이 엷은 회색구름사이를 투영한다. 정오를 지나 해운대역사에 들어섰다. 전철로 경성`부경대역까지, 버스로 오륙도 스카이워크에서 내려 이기대해안도로 트레킹을 할 참이다. 스카이워크에서든 선착장에서든 코앞의 오륙도는 실체를 봬주지 않는다. 방패섬,솔섬,수리섬,송곳섬,굴섬,등대섬이 줄줄이 있어 오륙도란데 두세 개, 다소 먼 데서 세어 봐도 섬 여섯 개는 황당(?)하다. 암튼 오늘의 목적지는 이기대해안길이다. 흉물처럼 선 고층아파트 옆구리의 인공연못을 낀 가파른 언덕은 숨차다. 푸른 초지 위에서 파란바다를 얼레고 온 해풍과의 스킨십은 상쾌하기 그지없다.
게다가 노란바다를 이룬 유채꽃과 지천으로 핀 야생화의 영접을 받는 행차는 4월의 낭만을 구가하기 딱 좋다. 상록수림 산책길로 들어선다. 진초록 숲 터널에서 마주치는 연둣빛 새순은 꽃보다 더 매혹적인데, 숲을 흔들며 얼굴을 간질거리는 해풍은 남녘 이국의 파라다이스 원정에 든 기분이다. 총총히 들어선 이름 모를 상록수림 발밑에서 넓은 이파리로 고개 숙인 얼굴을 감추는 천남성(天南星)이 잊을 만하면 인사를 한다. 고렇게 얌전한 자태에서 독약을 갈무리한다니! 아름다움엔 치명적인 가시가 있다고 했던가?
고요한 듯싶은 바다가 해안에 이르면 주름살이 생긴다. 수억 년을 절애(絶崖)와 싸워온 짜증일까? 주름살은 성난 파도가 되어 바윌 뛰워 넘어 단애에 부딪쳐 하얗게 부서진다. 포말의 아우성이 숲을 울리고 나의 폐부를 환장시켜 일상탈출의 평정심에 들게 해 수평선의 무한대로 이끈다. 심오한 바다의 은전이다. 하여 사람들은 울적할 때 바다를 찾고 숲에 머물기 위해 외출을 시도하나 싶다. 숲과 바다는 치유의 보고다. 나이와 신분을 가리지 않고 보듬어 시름을 덜어주고 용기를 일깨워준다. 바다와 숲은 어머니의 가슴이다.
6년 전이었지 싶다. 지기(知己)Y가 부산에 살고 있었는데 그가 나를 이기대해안길을 안내해 비로써 알게 됐다. 바다를 낀 울창한 산길은 마치 외국에 온 듯 풍광이 뛰어났고 굽이치는 숲길은 빡세지 않아 트레킹코스로 최상이었다. 그때 Y는 이미 갑상선수술 예후가 좋지 않아 재수술을 앞둔 환자였지만 나는 심각성을 모르고 있었다. 오후 한나절을 이기대해안길에서 얘기꽃 피웠던 나는 Y가 재수술 후유증으로 급사했단 부음을 듣고 망연자실했다. 아까 벼랑 위 산책길가 소나무 밑에 빨간 꽃이 있어 올라가 봤더니 누군가의 수목장(樹木葬)이었다.
Y생각이 더 새록새록 해졌다. 덩치만큼 인심도 후했던 그는 재수술 전 내가 부산에 다시 와서 연락하자 수술 후에 보자고 화답했던 그때의 목소리가 역력하다. 뭐가 그리 급해 일찍 떠났던가? 죽음이 가장 몹쓸 것은 다시는 볼 수가 없다는 비애다. 해안가로 돌출된 단애(斷崖)에 붙어있는 농(籠)바위가 멀리서 인사를 한다. 해녀들이 남천동 해안가에 자리를 틀고 해산물을 잡으면서 연락수단으로 기점삼은 바위다. 싸릿대나 버들채로 엮은 상자에 종이를 발라 만든 가구가 궤다. 그 궤 세 개를 포개 올려 세워놓은 바위 같아서 농바위라 불렀단다.
농바위는 오륙도와 동백섬 앞바다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어 물질하는 해녀들이 푯대 삼을만하다. 이기대 해안은 절애와 치마바위가 많다. 이기대(二妓臺)란 명칭도 두 기생의 순절(殉節)을 기린 이름이다. 임진왜란 때 수영성을 함락한 왜군이 치마바위에서 연회를 벌렸다. 그때 기생 두 명이 왜장을 술에 취하게 한 후 유혹하여 껴안고 절애 아래 바다로 뛰어내려 죽었다. 거짓말 같던 일화는 2013년에 두 기생으로 추정되는 무덤을 발견했다는 기사로 흥분시켰다. 해안산책로절벽을 오르내리는 계단과 구름다리와 가드레일은 산책길의 상징일 터다.
농바위, 이기대, 치마바위, 어울마당, 동생말, 해식굴, 몽돌 등등 4.7km의 코스는 초록 숲과 푸른 수평선과 하얀 구름을 벗 삼아 뭉그적대며 나를 찾아가는 치유의 산책길이다. 뿐이랴, 광안대교, 부산요트계류장, 동백섬, 마린시티, 동백섬, 누리마루 APEC하우스, 해운대해수욕장 등의 현대판 판도라상자들이 꼬리를 물고 늘어져 기하학적인 건축미를 절감케 하는 뷰의 해안가이기도 하다. 시오리길 이기대해안길은 내가 다녀본 어느 트레킹코스 보다 매혹적인 산책길이다. 원시와 현대, 바다와 숲, 절애와 포말, 파도소리와 새소리가 생동하는 오케스트라의 전당이라! 2024. 04.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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