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경궁의 봄
창경궁(昌慶宮)을 해방전후까지도 창경원이라 했고, 봄엔 벚꽃축제가 유명했다. 그래 오늘 창경궁을 찾았더니 아직 만개하진 않았고 화사하게 차려입은 상춘 인파의 홍수가 더 볼만했다. 창경궁은 성종대왕(1483년)이 세 분의 대비를 모시기 위하여 창덕궁 옆에 창건한 궁궐이었다. 인조반정 후 이 괄이 반란을 일으켜 창경궁을 침입하여 일일천하를 누리다 퇴각하면서 불질러버리는 등 화재가 빈번했다. 또한 숙종이 애첩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저주했다고 취선당에 거처하던 그녀에게 사약을 내린 곳이기도 하다. 정조가 창경궁에서 승하했고, 영조는 사도세자를 뒤주에 갇혀 죽게 한 희대의 사건이 일어난 곳이다.
산자고의 자고(慈姑)는 자비로운 시어머니를 말한다. 옛날 가난하게 사는 홀어머니가 삼남매를 키워 두 딸은 시집보내고 막내아들은 결혼을 못해 마음고생이 컸는데 어느 해 봄날 한 처녀가 보따리를 들고 나타났다. 사연인 즉 모시고 살던 홀아버지가 죽으면서 이집 총각을 찾아가라고 유언해서 왔다는 거였다. 하여 어머니는 그 처녀를 며느리로 삼았다는 일화가 있다. 그들은 아주 행복했지만 며느리가 등창이 나서 고름이 심해졌으나 가난하여 의원을 찾아갈 수가 없었는데 시어머니가 우연히 산에서 이 꽃을 발견해 며느리의 등창에 발랐더니 병이 나았단다. 그 뒤로 이 작은 꽃을 산자고라 부르게 되었다.
회화나무 괴(槐)를 파지하면 나무 목(木)과 귀신 귀(鬼)가 되므로, 회화나무를 '귀신 쫓는 나무'라고 하여 궁궐 등에서 잡귀를 쫓기 위해 많이 심었다고 한다. 또한 회화나무는 은행나무 등과 함께 대표적인 학자수(學者樹)라 통한다. 중국 주나라 때 삼괴구극(三槐九棘)이라고 하여 회화나무 3그루와 가시나무 9그루를 심어놓아 여기에 정승 3명, 고급관료 9명이 나왔다는 고사에서 유래했다. 길상목으로 여겨 궁궐, 정승 집, 문묘 등지에 심었는데 가문이 번창하고 학자나 큰 인물이 난다는 상서로운 나무다. 임금이 친히 상으로 하사하기도 했다.
백목련과 자목련의 설화 ; 옥황상제가 딸을 시집보내려고 사윗감을 물색했으나 공주는 부왕이 골라준 사윗감들은 거들떠보지 않았다. 그녀는 사납고 거친 북해의 신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공주는 몰래 궁을 빠져나와 북해의 신이 사는 궁궐에 갔으나 북해의 신은 유부남이었다. 충격을 받은 공주는 바다에 몸을 던져 자결한다.
이 소식을 접한 북해의 신은 그녀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자신의 아내에게 독약을 먹여 죽자 두 여자의 장례를 정성을 다해 치루고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그후 두 여인의 무덤에서 목련이 자라나 꽃을 피웠는데 공주의 무덤에서는 백목련이, 북해신 아내의 무덤에서는 자목련이 피어났단다. * 꽃말 ; '숭고한 정신', '고귀함', '우애', '자연애'.
산수유(山茱萸)열매 씨를 제거하고 말려 정력제 등의 약재로 쓴다. 씨를 제거하려고 마을 부녀자들은 열매를 입에 넣고 앞니로 씨를 뱉어내고 열매를 입안에 모았다가 뱉어 말리곤 했다. 산수유로 유명한 구례 부녀자들 입술에 산수유 진액이 배어들기 때문에 밤마다 아내의 입술을 물고 빤 남편들의 정력이 강해졌다는 우스개 이야기도 전해진다. 또한 그곳의 할머니들은 앞니가 기형인 것을 흔하게 볼 수 있단다.
1847년, 조선24대 임금 헌종이 아내 경빈 김씨를 위해 지었다. 헌종 곁에서 머물며 후계자를 낳기를 바란 의도였으나 애석하게도 2년 여 뒤인 1849년 헌종은 승하했다. 경빈 김씨는 궁을 나와 안국동 일대에 머물면서 낙선재는 비었었는데 갑신정변 직후에 고종이 잠시 머물면서 신하들과 외국 외교관들을 접견했다.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궁을 지어 받힌 헌종과 경빈 김씨의 짧은 로맨스는 낙선재를 찾는 내가 연민의 정을 품는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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