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보름날 열여덟 봉황이 오곡 - 복쌈을
정월보름날 새벽, 늙다보면 잠도 달아난다. 잠자리에서 뭉그적대다 커튼을 열었다. 어스름한 여명이 아직 녹지 않은 후미진 곳의 설경을 밝힌다. 내 어렸을 땐 눈도 많이 내리고, 그런 늦은 밤까지 어머니는 부엌에서 바지런 떠셨다. 그렇게 빚은 시루떡 솥이 방 윗목에 깔아놓은 지푸라기 위에 놓였다. 시루떡 솥 안엔 종지기에 촛불을 켜고 어머니는 재배를 올린 후 주술을 외듯 합장하여 기도를 드렸다. 그런 보름날 전야에 잠들면 눈썹이 센다고 했다. 초등5년쯤 이었을 때다. YJ(양원이 형)가 밤에 놀러왔다. 그의 손에 화투와 얼마쯤의 성냥개비가 들려있었다.
화투치면서 밤을 세자는 거였다. 내가 아버지를 쳐다보자 모른 채 외면하셨다. 평소 같아선 혼쭐이 날 참이었는데-. 우린 성냥개비 따 먹기 화투를 쳤었는데 날밤 셌는지는 기억이 없다. YJ는 부산 공동어판장에서 생선도소매업으로 성공했는데 잇따른 불행으로 몇 년 전에 불귀의 객이 됐다. 수더분하고 아량도 넓었던 그를 부산에서 몇번 만나 이기대길 트레킹도 했었는데 갑자기 떠났다. 30여년 전 귤이 귀한 시절 그는 귤 한 상자를 보내줘 우리 애들이 환호성을 치던 정황이 지금도 아삼삼하다. 그가 그립다. 밤에 눈이 오면 새벽녘의 고샅길은 사람들이 두런거리며 눈 치우는 소리가 여명을 깨웠다.
우린 제사가 없어 오곡밥과 나물을 차려놓곤 아침식사를 했다. 그 오곡밥으로 아침 먹을 때쯤엔 대문 밖이나 담 너머 고샅길에서 ‘대화야~’라고 나를 부른다. 내가 방문을 열고 마루로 나가면서 ‘누구냐?’라고 외치면 ‘내더우’라고 대답하며 달아나는 발자국소리만 들렸다. 금년 여름철 올 더위를 내게 팔고 민망해 뺑소니치는 풍습인데 어제 밤에 어머니께서 ‘낼 아침에 누가 부르면 절대 대답하지 말고 나가지도 말라’고 했던 주의말씀을 까먹은 탓이었다. 아차, 뒤 늦게 후회한들 소용 있나? 내게 더윌 젤 많이 팔아먹은 SH(성집이 형)는 지금 없다. 아무리 불러도 대답을 않는다. 더위 안 팔 테니 나와 보라고 애걸해도 그림자도 없다.
근디 아까 그의 동생이 오찬장에 나타나 60여 년 만에 해후했다. 손자뻘(학렬로) 되는 그를 나는 기억 끄트머리서 차환시켜 봤지만 아리송했다. 초등 동창이었던 SH도 20여 년 전쯤 추석 때 고향에서 만나본 게 마지막이다. 건강하고, 바지런하고, 인심 좋은 그와 차 마실 시간을 한 번도 공유하지 못한 게 애석하다. 그가 신림동에서 ‘관악산 다람쥐’소릴 듣는 산꾼 이었단 소문을 친구들로부터 듣고 꼭 만나보고 싶었는데, 뭣이 그리 바빴던지 그는 나를 기다려주질 안했다. 오호 통제라! 나도 더윌 팔려고 뒷집 MO를 부르러 나가면 어머님이 한사코 말리곤 했던 기억이 새롭다.
그에게 더윌 못 팔았던 여름철이 와도 멀쩡했던 나는 '더위 파는 일'이 말짱 거짓만이란 걸 알았지만 망각한 채 보름날을 맞았다. MO와는 지금도 가끔 만나 흉금을 털고 시시껄렁한 잡답도 나누며 끼니를 때운다. 그는 어떤 일에나 철저한 준비를 하여 실수를 않는, 누가 뭐래도 진짜배기 신사며 지성인이다. 나이 들수록 마음에 두고 아끼며 보듬어야 할 것은 지기지우(知己之友)다. 초등생 때, 보름 전날엔 들판에서 쥐불놀이를 하다가 개울 건너 마을 사장매 청소년들과 돌팔매 싸움이 벌어지곤 했는데, 어느 날 CS(총무 큰오빠)가 날아온 돌멩이에 이마를 맞아 피가 흘러 헝겊으로 씻어내며 압박하면서 큰소리치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CS는 나의 2~3년 선배면서 조카이기도 하다. 큰 키에 호탕한 기질이었지 싶고, 공공의 일에 솔선수범하는 우리들의 향도였다. 방학 땐 아침에 동네 학생들이 모정에 모여 마을청소를 할 때나, 마을대항 운동시합을 하면 그는 늘 대장(?)이었다. 그가 어른이 되어 애주가란 소문도 돌았는데 어느 해에 뜬금없이 나를 찾아왔었다. 삼촌뻘 되는 내가 결혼하여 애들 셋을 낳아 진해에서 살고 있을 때였다. CS는 우리 애들을 알뜰살뜰 챙기면서 오빠 노릇을 잘도 했다. 부산서 산다는 그는 두 번인가 찾아와서 하룻밤을 묵고 갔는데 애들한테 얼마나 후하게 대해 줬던지 지금도 우리식구들은 그 살가운 시간들을 기억하고 있다.
CS도 오래 전에 영면(永眠)했는데 나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세월이 빠른 건지, 무상한 건지 오늘같이 봉황들이 모여 점심 들면서 수다 떠는 자리에 같이 있어야 할 그들 - YJ, SH, CS는 소식도 없다. 아니 영원히 안 나타날 테다. 하지만 그들의 동생을 조우하여 기억의 파편들을 끊긴 필름 잇듯 회억하게 되어 다행이다. 그렇게라도 할 수 있단 사실에 감사한다. 그들이 있기에 오늘 모임이 있고, 기쁨을 공유하는 시간은 혈연이란 유대를 돈독히 하며 삶의 의지와 용기를 북돋우지 싶다. 오늘은 18명이 모여 오곡밥으로 오찬을 들면서 정월대보름날의 추억 한 페이지를 엮었다.
어릴 적 보름날엔 조리나 소쿠리를 들고 집집마다 찾아가 오곡밥을 얻어먹었다. 야밤엔 오곡밥을 도둑고양이처럼 훔쳐다 먹어도 괜찮았다. 동냥을 하던, 훔치던 간에 많은 사람들이 와서 오곡밥을 나눠 먹어야 인심 좋다는 소문이 나고, 그래서 일꾼들이 모여드는 마을이 되는 거였다. 일꾼들이 외면하는 마을은 얼마나 팍팍하고 불행하겠나! 9가지 마른 나물에 오곡밥을 먹으면 여름에 더위 먹지 않고, 김이나 나물로 쌈 싸먹으면 부자 된다고 복쌈이라 했다. 금년 보름에 더블미트 정 사장님이 오곡밥에 복쌈 푸성귀를 아낌없이 내놨다. 잘 먹었시유, 금년에도 먹쇠들 많이 올 것이구만요. 봉황들도 담 담달에 또 온 다네요. 벌써부터 나도 그 날이 기다려진다. 2024. 02. 24
# 위 사진은 보름 때 안산 초록숲길에서 용수암터만 남아있는 용수골의 풍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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