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 구순 (九旬) 누님의 사랑 앞에서
설날 신내동 누님께 새배 문안 드렸다. 92세 누님이 지팡이에 몸을 가누신 채 일어서서 나를 보듬고 눈시울을 붉히신다. 어머니 같은 누님을 일 년에 고작 두 세번 문안드리는 나는 오늘따라 죄스러움이 가슴을 옥죈다. 애들(출가한 딸 셋)은 어제 와서 차례를 지내고 떠났단다. 거동이 불편하여 실내에선 지팡이, 문밖출입 땐 환자용워커에 의지하시는 누님은 혼자 사신지 5여년도 넘었다. 월~금요일까진 간병인의 도움으로 병원에서 검진을 하고, 주중엔 청소도우미가 두 번 방문해 돌본단다.
누님의 일상은 좁은 실내에서 지팡이 짚고 걷기운동과 텔레비전시청이 전부다. 그런 일상은 무미건조하여 스트레스 받을 역효과 걱정이 들지만 달리 방법이 없단다. 하여 돋보기 쓰고 이것저것 인쇄물을 허투루 읽고, 텔레비전을 시청하시다 가요방송 땐 따라 불면서 시간을 때우곤 한다고 하셨다. 밤엔 잠도 안와 새벽3시에서 6시 사이에 깜박 잠을 자다 깨어나신다. 소일거리였던 베란다 화초 가꾸기도 허리가 아파 포기하셨다고 했다. 해도 본시 성품이 깔끔하시고 단정하여 구순(九旬)노인 집 같지 않게 깨끗하고 잘 정돈됐다.
총명하셨던 누님은 기억력도 여전하고 소리도 맑아 수준급인 노래솜씨는 여전하다. 어쩌다가 노인회관엘 가시면 가수‘강 여사’로 호칭하며 열렬한 환영의 박수를 받는다고 자랑하신다. 옛 가요 몇 곡을 연창하면 박수소리에 노인회관은 신바람이 난단다. 어느 날, 누님이 회관에 들어서니까 노인회장이 나와 영접하면서 노래 한 곡을 청했단다. 그래 백난아의 <찔레꽃>을 1절부터 3절까지 부르자 ‘앵콜’세례에 거푸 두 곡을 더 불렀는데, 노인회장이 단상에 냉큼 올라와 감삿말을 하면서 5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주더란다.
당황하여 극구 사양하자 ‘괜찮아, 괜찮아’라고 외치는 회원들의 응원등살에 엉겁결에 받았다고 하셨다. 그러자 누군가가 만원짜리 지폐를 들고 나오면서 ‘나도’라고 하자, 여기저기서 ‘나도’, ‘나도’를 소리치며 일어서는 회원들의 손에 천 원짜리도 적잖아 장내는 ‘공연난장’이 됐다고 호들갑을 떠신다. 그 후 누님이 노래를 할라치면 회원들은 노랫값(?)을 자연스레 모아 간식파티가 이뤄지곤 하여 ‘노가수 강 여사’가 탄생(?)함이라. 그런 누님 - 가수 강 여사가 동생이 옹께 기분 좋다면서 노래 한자리 부르겠다고 <찔레꽃>을 열창하신다.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 나라 내 고향 / 언덕 위에 초가삼간 그립습니다
자주 고름 입에 물고 눈물 젖어 / 이별가를 불러주던 못 잊을 사람아
달뜨는 저녁이면 노래하던 세 동무 / 천리 객창 북두성이 서럽습니다
작년 봄에 모여 앉아 찍은 사진 / 하염없이 바라보니 즐거운 시절아
연분홍 봄바람이 돌아서는 북간도 / 아름다운 찔레꽃이 피었습니다
꾀꼬리는 중천에 떠 슬피 울고 / 호랑나비 춤을 추던 그리운 고향아”
신명 나신 누님을 멍 때린 듯 응시하는 나는 눈물 글썽대며 아깝고 애석한 누님의 일생을 연상해 봤다. 총명하고 예쁜 당신께서 가난을 멍에 삼듯한 삶을 한 번도 신세한탄 하시거나 누굴 원망하는 소릴 나는 들은 적이 없다. 호강 한번 했을까? 싶게 팍팍했을 결혼생활에 매형님을 사별했는데, 어쩜 그리 애정이 돈독했을까 싶은 사랑의 함수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진정한 부부의 애정의 깊이는 상상을 초월하지 싶다. 대학 캠퍼스 커플로 만나 70년을 해로한 드리스 판 아흐트 전 네덜란드 총리부부가 얼마 전에 동반안락사로 생을 마감했었다.
누님보단 한 살 더 많은 판 아흐트 전 총리 부부는 93세 동갑내기로 손을 맞잡고 안락사를 택했다. 그 부부가 세운 학술연구재단은 부음을 이렇게 전했다. “부부가 둘 다 많이 아팠고, 서로 혼자서는 떠날 수 없었다.” 우리는 연명치료를 중단하는 안락사를 허용하지만, 해외 선진국 등 네덜란드는 의사의 도움을 받아 약물투여 등으로 죽음에 임하는 조력자살 - 안락사를 용인한단다. 네덜란드의 2022년도 안락사는 8700여 명이었다. 안락사에 대한 찬반이 팽팽하지만 존엄하게 죽을 권리 또한 인간의 기본권으로 인정함이 대세인가 싶다.
평생을 같이 한 부부의 동반안락사의 사랑의 깊이 못잖게 참된 부부의 애정은 세상 사람들 앞에 부끄럼 없는 삶일 테다. 부부가 서로의 잘못된 치부나 욕심을 감싸고 변명하는 일은 진정한 사랑의 행위가 아니다. ‘세상에 태어나 가장 행복한 일은 아내와의 결혼 이었다’라고 윤석열 대통령은 어느 외신기자에게 실토했다. 그 ‘아내를 사랑하는 길이 아내의 부정과 비리까지 감싸고 변명해야 한다.’는 것일까? 아니다. 설날 방송한 윤대통령의 KBS대담은 사랑을 왜곡(歪曲) 강변하나 싶어 씁쓸했다.
범법자를 숨기는 일이 사랑의 길인가? 김건희 여사의 명품 백 사건을 ‘박절하게 대하기는 참 어려워’, ‘매정하게 끊지 못한 선물’이라고 윤대통령은 구차한 변명으로 일관했다. 지금부터 정부고위관료들과 권력자들은 살판났다. 공직자가 ‘박절하게 대할 수 없어 받은 선물은 괜찮다’고, 대통령도 그랬다고 할 테니 말이다. ‘김영란 법’은 파기의 기로에 섰다. 나의 누님은 노래 한 곡 부르고 5만 원짜리 지폐 한 장 받는 걸 큰 죄라도 짓는 것처럼 송구스러워 했단다. 공정과 상식은 입`서비스로 뇌까리라는 말이 아닐 것이다. 국민들은 멍청이가 아니다. 4월총선엔 진짜 일꾼을 뽑자. 2024. 0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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