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희궁 (慶熙宮) 의 설경
겨울밤은 우수(雨水)가 슬그머니 지나가자 심술이 났나 밤새워 빛나는 겨울왕국을 창조했다. 밤하늘의 눈에 띄는 건 깡그리 하얗게 만들었다. 요 근래에 없었던 두터운 적설이다. 많은 적설량이 창조했을 눈부신 설국에 맘은 콩밭으로 뛰는데 선뜻 외출하기가, 산행할 엄두는 더더욱 나질 않는다. 세월을 관통하며 켜켜이 쌓아온 몸뚱이는 좋은 것 앞에서도 멈칫댄다. 사랑도, 음식도, 취미생활도 선뜻 나서길 저어한다. 혹자는 삶의 연륜이 준 지혜라고 하며, 기세 꺾인 용기 탓일 거라고도 한다.
젊었을 때 맛있던 음식도 별로고, 먹는 량도 훨씬 줄었다. 잘 먹고 잘 싸야 기운도 나서 지혜롭게 나설 수가 있을 텐데 진취적인 용기도 자못 머뭇대곤 한다. 나이 듦은 어쨌거나 슬픈 일이다. 그 애달픔을 삭혀내려는 의지에 비례하여 행복을 맛볼 수가 있단 사실이 나이 듦의 지혜일 것이다. 집에서 지근거리인 경희궁을 향했다. 영상을 웃도는 날씨에 설국은 시간을 태우며 자신도 태워 사라질 것이다. 그 눈부신 황홀경을 향해 마음이 조바심을 떤다.
임진왜란 후 한양에 들어선 광해군에겐 경복`창경궁이 소실되어 입궐할 곳이 없었다. 광해는 불탄 경복궁 옆 인왕산아래에 인경궁을 짓다가 서쪽에 왕기가 서린 길지가 있다는 풍수설을 듣는다. 정원군(인조의 아버지)의 사저가 있던 곳으로 광해는 그 왕기를 누르려고 그 사저를 빼앗아 1617년에 시작한 경덕궁(慶德宮)공사를 1623년 완공한다. 부지 7만 2천 8백 평에 100여 동이 넘는 전각들을 세웠던 조선왕조의 3대궁으로, 이궁(離宮)으로 불리며 경운궁(덕수궁)과는 홍교로 연결되어 있었다.
경덕궁의 막대한 궁궐공사비는 임진왜란의 후유증과 더불어 인조반정의 빌미가 된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고, 이괄의 난으로 경복`창경궁이 소실되자 인조는 인경궁으로 이어하여 창덕`창경궁을 복원하기 위해 경덕궁을 헐어 썼다. 그나마 남아 있던 경덕궁은 인조의 아버지의 사저 터여서 였다. 미상불 인조는 아버지의 사저를 빼앗아 지은 광해의 궁궐공사에 원한이 서려있었을 터였다. 영조는 경덕궁을 경희궁으로 개칭하고 19년동안 머물렀는데 사도세자의 죽음 이후 죽을 때 까지 거의 여기서 지냈다.
1868년(고종 5년)에는 경복궁 공사를 위해 경희궁 일부 전각들을 허물어 쓰고, 일제강점기에 대부분 훼철 축소되어 궁궐빈터에 조폐소와 양잠소가 설치되었다. 양잠소는 1884년 9월 독일인인 마에르텐스(A. H. Maertens)를 고용해 운영했으며, 1886년에 청나라에서 뽕나무를 수입하여 양잠소를 설치했다. 3년 후 독일의 하인리히 폰 프로이센 왕자가 방문해 관명식을 진행하고, 1901년에 외국인이 제작한 지도에서는 뽕나무 공원(mulberry park)라고 기록했다. 경희궁이 뜯겨난 휑한 빈터가 한 때 잠실이었던 셈이다.
일제는 경성중학교를 만들었으며, 해방 후에 서울고등학교로, 1980년 서울고가 이전한 후 서울시립미술관으로 사용된다. 서울고등학교와 경희대학교의 명칭이 여기에서 유래하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1932년 흥화문을 뜯어다 자기의 사당인 박문사의 문으로 사용했다. 1945년 해방 후 신라호텔 정문으로 옮겨 쓰다가 1988년에 현 위치로 옮겨졌다. 본래의 위치는 신문로 건너 구세군회관 자리였다. 옛 왕조시대 절대군주는 백성의 고혈을 빨아 호화판 궁궐을 짓곤 했는데 우리의 선대왕조들도 다를 바 없었다.
광해가 지은 경희궁은 반정으로 집권한 인조에 의해서 훼철되어 경복궁과 경희궁 복원공사에 쓰인다. 경복`경희궁의 소실은 인조반정에 선봉장 노릇을 한 이 괄이 논공행장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키자 인조는 도망가기 바빴다. 경복궁에 난입한 이 괄은 인조의 실정에 등돌린 백성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허나 진압군의 반격에 패퇴하면서 일일천하를 누린 이 괄 또한 도망가면서 궁궐을 모두 불살라 버린다. 광해가 십년에 걸처 복원한 경복`창경궁은 또 다시 잿더미로 변했던 것이다. 외부의 침략이 아닌 내란에 의해 궁궐이 불타버린 어처구니 없는 인조왕정 이였다.
인조는 애초에 왕의 자격이 못됐었다. 반군들 등에 업힌 허수아비 인조는 반정의 구실로 삼았던 광해의 궁궐복원을 다시 하였고, 그의 중구난방정책은 병자호란을 야기시켰다. 인조는 광해의 관형향배외교를 무시하여 삼전도의 치욕을 자초한다. 광해의 혜안과 담대한 구상의 실리적인 북방외교는 오늘날 우리정부도 금과옥조로 삼아야 할 정책이다. 특히 다변외교와 수출이 우리의 생존의 바로미터인 작금의 세계정세 속에서 등거리외교란 발상의 전환을 해야 함인데 미`일에 경도된 정책으로 재정적자는 눈덩이처럼 커지나 싶어 안타깝다.
불쌍한 건 언제나 백성들이다. 지도자를 잘 뽑아야 한다. 설국 경희궁에서의 세 시간의 희열! 우리에겐 사계가 있다는 사실이 선택받은 행운아인 것이다. 차가운 겨울이 있다는 건 생명의 건강ㅅ을 담보하고, 설국의 아름다움은 우리들 일상의 찌든 마음을 치유해 준다는 쾌거에 감동 먹게 한다. 나이 듦이 아쉽다. 그 아쉬움은 미처 예상 못한 지혜의 신경을 북돋아 엷어지는 행복지수를 붙들어준다. 행복은 젊었을 때나 늙어서나, 누군가가 가져다주는 게 아니라 나의 마음속에, 먼 곳이 아닌 가장 가까이서 늘 대기하고 있다는 걸 경희궁의 설경이 확신시켜 준다. 2024. 0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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