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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경희궁의 설경

경희궁 (慶熙宮) 의 설경

서암 - 본래 왕암이라 불러 광해가 이곳에 경희궁을 지은 기원지 이기도 하다

겨울밤은 우수(雨水)가 슬그머니 지나가자 심술이 났나 밤새워 빛나는 겨울왕국을 창조했다. 밤하늘의 눈에 띄는 건 깡그리 하얗게 만들었다. 요 근래에 없었던 두터운 적설이다. 많은 적설량이 창조했을 눈부신 설국에 맘은 콩밭으로 뛰는데 선뜻 외출하기가, 산행할 엄두는 더더욱 나질 않는다. 세월을 관통하며 켜켜이 쌓아온 몸뚱이는 좋은 것 앞에서도 멈칫댄다. 사랑도, 음식도, 취미생활도 선뜻 나서길 저어한다. 혹자는 삶의 연륜이 준 지혜라고 하며, 기세 꺾인 용기 탓일 거라고도 한다.

흥화문은 경희궁의 정문이었던바 이토 히로부미가 사당인 박문사정문으로 사용하러 떼어간 걸 1988년 옮겨와 복원했다
누가 이 순백의 세상에 최초의 발자국을 남길 배짱을 부릴텐가?

 젊었을 때 맛있던 음식도 별로고, 먹는 량도 훨씬 줄었다. 잘 먹고 잘 싸야 기운도 나서 지혜롭게 나설 수가 있을 텐데 진취적인 용기도 자못 머뭇대곤 한다. 나이 듦은 어쨌거나 슬픈 일이다. 그 애달픔을 삭혀내려는 의지에 비례하여 행복을 맛볼 수가 있단 사실이 나이 듦의 지혜일 것이다. 집에서 지근거리인 경희궁을 향했다. 영상을 웃도는 날씨에 설국은 시간을 태우며 자신도 태워 사라질 것이다. 그 눈부신 황홀경을 향해 마음이 조바심을 떤다.

▲흥화문과 숭정전 사이의 쉼터는 겨울철이 제일 멋진 풍경을 연출할 테다▼
눈꽃정원 사이로 하얀 면사포를 두른 경희궁이 나타난다

임진왜란 후 한양에 들어선 광해군에겐 경복`창경궁이 소실되어 입궐할 곳이 없었다. 광해는 불탄 경복궁 옆 인왕산아래에 인경궁을 짓다가 서쪽에 왕기가 서린 길지가 있다는 풍수설을 듣는다. 정원군(인조의 아버지)의 사저가 있던 곳으로 광해는 그 왕기를 누르려고 그 사저를 빼앗아 1617년에 시작한 경덕궁(慶德宮)공사를 1623년 완공한다. 부지 7만 2천 8백 평에 100여 동이 넘는 전각들을 세웠던 조선왕조의 3대궁으로, 이궁(離宮)으로 불리며 경운궁(덕수궁)과는 홍교로 연결되어 있었다.

나는 당돌하게 이 순무한 설국에 첫 발자국을 찍었다. 까닭은 사진을 찍겠다고~

경덕궁의 막대한 궁궐공사비는 임진왜란의 후유증과 더불어 인조반정의 빌미가 된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고, 이괄의 난으로 경복`창경궁이 소실되자 인조는 인경궁으로 이어하여 창덕`창경궁을 복원하기 위해 경덕궁을 헐어 썼다. 그나마 남아 있던 경덕궁은 인조의 아버지의 사저 터여서 였다. 미상불 인조는 아버지의 사저를 빼앗아 지은 광해의 궁궐공사에 원한이 서려있었을 터였다. 영조는 경덕궁을 경희궁으로 개칭하고 19년동안 머물렀는데 사도세자의 죽음 이후 죽을 때 까지 거의 여기서 지냈다.

숭정문 앞 소나무섬 일대의 설국에 찍힌 발자국, 누군가가 말 하길 다음 사람을 위해 함부로 발자국을 남기지 말라 했다. 근디 나 역시 사진에 담는다는 욕심에 깨끗한 눈밭을 어지럽히곤 한다

1868년(고종 5년)에는 경복궁 공사를 위해 경희궁 일부 전각들을 허물어 쓰고, 일제강점기에 대부분 훼철 축소되어 궁궐빈터에 조폐소와 양잠소가 설치되었다. 양잠소는 1884년 9월 독일인인 마에르텐스(A. H. Maertens)를 고용해 운영했으며, 1886년에 청나라에서 뽕나무를 수입하여 양잠소를 설치했다. 3년 후 독일의 하인리히 폰 프로이센 왕자가 방문해 관명식을 진행하고, 1901년에 외국인이 제작한 지도에서는 뽕나무 공원(mulberry park)라고 기록했다. 경희궁이 뜯겨난 휑한 빈터가 한 때 잠실이었던 셈이다.

숭정문 앞 인공화분 일대의 설국엔 내가 첫발자국을 남긴 범인이다
숭정문은 숭정전의 입구로 상왕의 승하시 정전이 아닌 정전의 문에서 즉위하는데 경종, 정조, 헌종이 그랬다.
500여 살된 귀목, 놈은 화사한 소복을 몇 번이나 걸쳤을까?

일제는 경성중학교를 만들었으며, 해방 후에 서울고등학교로, 1980년 서울고가 이전한 후 서울시립미술관으로 사용된다. 서울고등학교와 경희대학교의 명칭이 여기에서 유래하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1932년 흥화문을 뜯어다 자기의 사당인 박문사의 문으로 사용했다. 1945년 해방 후 신라호텔 정문으로 옮겨 쓰다가 1988년에 현 위치로 옮겨졌다. 본래의 위치는 신문로 건너 구세군회관 자리였다. 옛 왕조시대 절대군주는 백성의 고혈을 빨아 호화판 궁궐을 짓곤 했는데 우리의 선대왕조들도 다를 바 없었다.

이 눈길에 첫 발자국을 남겼을 누군가도 나처럼 미안함 보단 신바람이 앞섰을 테다

광해가 지은 경희궁은 반정으로 집권한 인조에 의해서 훼철되어 경복궁과 경희궁 복원공사에 쓰인다. 경복`경희궁의 소실은 인조반정에 선봉장 노릇을 한 이 괄이 논공행장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키자 인조는 도망가기 바빴다. 경복궁에 난입한 이 괄은 인조의 실정에 등돌린 백성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허나 진압군의 반격에 패퇴하면서 일일천하를 누린 이 괄 또한 도망가면서 궁궐을 모두 불살라 버린다. 광해가 십년에 걸처 복원한 경복`창경궁은 또 다시 잿더미로 변했던 것이다. 외부의 침략이 아닌 내란에 의해 궁궐이 불타버린 어처구니 없는 인조왕정 이였다.

인조는 애초에 왕의 자격이 못됐었다. 반군들 등에 업힌 허수아비 인조는 반정의 구실로 삼았던 광해의 궁궐복원을 다시 하였고, 그의 중구난방정책은 병자호란을 야기시켰다. 인조는 광해의 관형향배외교를 무시하여 삼전도의 치욕을 자초한다. 광해의 혜안과 담대한 구상의 실리적인 북방외교는 오늘날 우리정부도 금과옥조로 삼아야 할 정책이다. 특히 다변외교와 수출이 우리의 생존의 바로미터인 작금의 세계정세 속에서 등거리외교란 발상의 전환을 해야 함인데 미`일에 경도된 정책으로 재정적자는 눈덩이처럼 커지나 싶어 안타깝다.

경희궁 동편 담밖에서 조망한 궁궐

불쌍한 건 언제나 백성들이다. 지도자를 잘 뽑아야 한다. 설국 경희궁에서의 세 시간의 희열! 우리에겐 사계가 있다는 사실이 선택받은 행운아인 것이다. 차가운 겨울이 있다는 건 생명의 건강ㅅ을 담보하고, 설국의 아름다움은 우리들 일상의 찌든 마음을 치유해 준다는 쾌거에 감동 먹게 한다. 나이 듦이 아쉽다. 그 아쉬움은 미처 예상 못한 지혜의 신경을 북돋아 엷어지는 행복지수를 붙들어준다. 행복은 젊었을 때나 늙어서나, 누군가가 가져다주는 게 아니라 나의 마음속에, 먼 곳이 아닌 가장 가까이서 늘 대기하고 있다는 걸 경희궁의 설경이 확신시켜 준다.              2024. 02. 22

▲경희궁 뒤 소공원의 설경▼
▲태령전 담밖 골짝의 설경▼
남쪽 태령문 언제나 닫혀 있다
▲숭정전은 경희궁의 정전이다. 좌우는 행각으로 둘러졌으며, 뒤로는 자경전이 있다▼
숭정전 회랑
▲숭정전은 국왕이 신하들과 회의와 경연을 열고 공무를 수행한 정전이다. 상월대의 답도는 봉황, 하월대의 답도는 공작무늬이다▼
정전은 숙종이 승하하자 빈전으로 쓰이고, 선왕의 어진이나 위패를 임시로 보관하기도 했다
▲경희궁 후원의 설경▼
경희궁 서편의 야산 산책길
▲경희궁 뒷담장에서 조망한 인왕산과 치마바위▼
▲서편 동산 산책길▼
▲서쪽 야산에서 조망한 경희궁▼
▲이 계단을 올라서 담장 쪽문을 통과하면 인왕산의 한양도성길과 이어진다▼
▲숭정전 뒤 굴궐의 처마 선의 미학▼
▲자정전▼
자정전은 편전으로 왕이 신하들과 회의와 경연을 열고 각종 공무를 수행한 곳이다
▲자정전에선 숙종이 승하하자 빈전으로 사용하고, 선왕의 어진이나 위패를 임시 보관하기도 햇다▼
▲자정전 후원의 설경▼
▲자정전 후원▼
▲태령전 후원▼
▲서암을 왕암이라고도 불렀는데 왕기가 서린다는 풍수설에 광해가 이곳에 경희궁을 지었단다▼
태령전, 영조의 어진을 보관하다
태령문
광해군의 묘
서울역사박물관으로 통하는 계단 길
일제 때 파놓은 지하땅굴이 있다
▲서울역사박물관 뒷뜰▼
울`아파트 후문의 담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