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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설무(雪舞)속의 구곡빙폭(九曲氷瀑)

 설무(雪舞)속의 구곡빙폭(九曲氷瀑)

▲구곡폭포는 얼다 녹다를 반복한 탓인지 빙벽 사이로 낙수가 흐르고 있었다▼

요즘의 기상청 일기예보는 지역별 시간대까지 95%이상 적중한다. 아침나절, 우리아파트 창에 넘실대는 밝은 햇살은 오늘 경기중부지방이 대체로 흐리고 강원서부지역은 정오 이후 눈이 내린다는 예보를 무색케 했다. 근디 9시경부턴 회색구름이 누리를 덮치면서 잿빛 차일을 치고 있었다. 춘천지역엔 정오쯤부터 눈이 내린단다. 간식거리와 스틱을 챙겨 집은 나섰다. 열차가 청평 산골을 통과할 때 차창은 뿌옇게 침침해 진다.

강촌유원지, 강아지 그림자도 숨었나 싶었다
밭고랑의 정자, 봉화산을 덮치는 눈쓰나미에 갸우뚱 해졌다

굴봉산터널을 빠져나오자 시야는 어지럽다. 춤추는 부나비 떼 같은 눈발에 산천은 희뿌연 묵화가 됐다. 강촌역 플랫폼에 섰다. 눈발은 신바람 난듯 난무한다. 순식간에 지상을 하얗게 분탕 칠할 기세다. 강설 탓인지 플랫폼도 썰렁하다. 내 젊은 시절의 강촌역은, 더구나 방학 땐 청춘들이 해방구에 온 듯 비벼댔었다. 지금은 겨울스포츠를 즐길 장소가 많은데다 자가용시대가 아닌가. 12시 반이어서 플랫폼쉼터 부스로 들어가 간단히 점심을 때우기로 했다.

강설에 숨죽린 강촌유원지 카페, 고엽단풍이 잿빛누리를 생경케 한다
▲구곡폭포 터미널의 제1빙폭포▼

그새 눈도 더 수북이 쌓일 것 아닌가! 부스 안 장의자의 중년 여인이 나를 힐끔 보나 싶었다. 배낭에서 바나나를 꺼내 껍질을 벗기다가 여인과 눈이 마주쳐 한 개를 인심 쓰려 했더니 사양한다. ‘난 구곡폭포 갈 참인데 어디 가시느냐?’ 고 물었다. ‘자긴 시내에 간다면서 이 눈 속에 구곡폭폴 가느냐?’ 고 의아해 하면서 혼자냐고 물었다. ‘아무도 없는 눈밭을 혼자 걷는 정취도 좋지 않아요?’-라면서 여인을 응시했다.

구곡폭포 진입로를 공단직원이 에어펌프로 눈을 치우고 있다

그러면서 ‘구곡폭포 빙벽타기 스릴구경도 할 만하고요’ 말문을 트고 있는데 춘천행 열차가 들어온다. 여인이 일어서면서 ‘즐겁게 보내세요.’ 목례를 하곤 자동유리문을 열었다. 열차는 여인과 함께 긴 여운만 남긴 채 사라졌다. 떡과 귤과 육포를 차례대로 꺼내 씹으며 여인이 떠난 자릴 응시해 본다. 바깥의 부나비 떼는 함박눈이 됐다. 1시를 넘겨 배낭을 챙겼다. 하얗게 변한 역사 광장은 속절없이 함박눈을 안아 잠재우고 있다.

우산을 펴들고 눈밭에 발을 내디뎠다. 내 동정을 주시하는 듯한 택시 두 대를 외면하고 구곡폭포방향 눈길에 찍힌 한 사람의 발자국 위에 내 발을 얹는다. 이윽고 냇가를 따라 난 자전거전용도로에 들어섰다. 언제쯤 갔을까? 눈 위에 두 발자국시늉만 남았다. 세상이 갑자기 숨을 죽였나? 움직이는 건 나뿐이다. 오직 함박눈이 축복을 하는 듯 내 위에 쏟아지고 있다. 나와 함박눈의 동정이 없다면 여기는 죽음의 땅이다 싶게 침묵하는 정적의 요람이다.

▲구곡폭포입구▼

소곤대는 눈 소리가 고막을 간질댄다. 개울물이 얼음장과 스킨십 하는 신음소리도 간헐적으로 찾아온다. 봉화산이 희뿌연 망토를 걸치고 에워싼다. 밭두렁의 초막도 흰 장막을 걸치니 멋진 묵화가 됐다. 여행은 보고 맘에 담은 풍정들을 한 장씩 추억이라는 앨범에 꽂는 여정이다. 그 추억 쌓기 발길은 일상에 묻혔던 나를 찾아가는 치유의 시간이다. 자연은 위대한 우리들의 스승이고 여행은 스승에 다가서는 구도의 길이기도 하다.

소박하고 담대해지는 마음의 평정은 지혜의 엔돌핀으로 삶을 윤택케 한다. 여행마니아들이 즐기며 늘어나는 소이다. 덤벙댄 발자국 몇 개만 보이는 강촌유원지를 통과 구곡폭포주차장에 들어서자 설국의 움직이는 설인들이 보였다. 제1빙폭에 눈길을 빼앗기다 매표소에 들어섰는데 봉화산행은 통제란다. 구곡폭포까지 만이라는 언약으로 입산을 허락받았다. 공원직원이 에어펌프로 눈을 치우고 있다. 번들번들 거리는 빙판길이 나타난다.

▲구곡폭포 입구의 제2빙폭▼

계속된 강추위에 해빙을 거듭한 산책로는 빙판이고 그 위에 눈이 또 쌓이고 있어 차라리 눈 위를 걷는 게 안전하지 싶었다. 물깨말구구리길에 들어서자 싸래기눈이 내린다. 다행인 건 바람이 없어 설국의 정숙미를 고스란히 체감할 수 있다는 거였다. 몇 분의 설국소요객들과 마주쳤다. 제2빙폭을 감상하고 구곡폭포진입 계단에 올라선다. 여기서도 공원직원의 눈 치우는 에어펌프소리만이 고요를 깰 뿐이다. 구곡폭포의 빙벽위용은 작년만 못했다.

빙벽 타는 알파인이 없다. 이상했다. 구곡폭포 앞 전망대에 올라서서 그 까닭을 알 수 있었다. 빙벽이 며칠 전 계속 된 영상의 날씨에 무너지고 빙벽 안엔 폭포수가 떨어지고 있었다. 구곡폭포 밑은 무너진 빙벽이 쌓여 빙산을 이루고 있다. 빙벽 타는 알파인들의 스릴을 지켜보는 조바심도 오늘 나를 여기에 서게 한 바람잡이였는데 아쉬웠다. 요즘 빙벽타기엔 여성알파인들이 대세를 이룬다. 그들의 용기와 응원소리를 공유하고 팠는데---.

아홉 구비 휘돌며 떨어지는 폭포골짝의 잿빛하늘에서 쏟아지는 눈발을 입 벌려 받아먹는 퍼포먼스를 즐기다 아래서 눈 치우고 있는 직원한테 들켰다. 멍 때린다는 듯 쳐다보던 그는 헤프게 웃었다. 그 웃음의 뉘앙스를 잘 모른 채 나도 웃었다. 하산하면서 그 순간을 앨범에 담을 수 있었으면 나중에 껌 씹듯 추억을 꺼내어 씹을 텐데 하는 생각을 했다. 세 시간여의 설국 빙폭 찾아 즐긴 소요의 희열은 행복이란 추억의 앨범에 수록 될 터다. 구곡폭포야! 올 겨울에 다시 보자. 안녕.                2024. 01. 14

구곡정
구곡폭포 골짝에서 본 묵화풍경, 검봉산이 수줍은 듯 얼굴을 내민다
구곡폭포계단, 눈을 치웠어도 결빙계단은 여간 신경 날서게 했다
폭포계단의 눈을 치우는 공단직원, 입 벌려 눈발 받아먹는 나를 멍 때린 듯 훔처보다 들켜 동시에 미소를 지었다
▲구곡폭포▼
구곡폭포는 일기불순으로 얼다 녹다를 반복한 탓에 빙벽이 무너지고 폭포수가 흐르고 있어 빙벽타기 동호인들이 자취를 감췄다. 그들의 빙벽타는 스릴과 담대함을 지켜보는 대리낭만도 겨울구곡폭포를 찾는 특별코스인데 아쉬웠다
빙벽이 무너져 빙산을 이룬 구곡폭포 아래 너덜지대
▲구곡폭포의 위용을 안으려 오르내린 계단은 내가 하산하는 순간까지 나 홀로였다. 역동적인 건 골짝을 누비는 눈발과 청소직원~!▼
울창한 전나무 숲 언덕을 넘으면 하늘 아래 첫동네 문배마을이 나타난다
구곡폭포 매표소
강촌유원지 뒷 산이 검봉산 줄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