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 설경속의 아관파천(俄館播遷)
1896년 2월11일, 그날도 오늘처럼 눈 쌓인 차가운 날씨였다. 궁녀용 앞 가마에 엄상궁이 타고 뒷좌석에 여장(女裝)의 고종이, 뒤따르는 가마엔 궁녀 박씨와 세자가 탄 채 경복궁후문을 통과한다. 출입자들은 경비병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데 수개월 전부터 엄상궁은 돈(엽전)과 음식 등을 뇌물로 줘 가마2대가 통과할 수 있도록 사전에 조취를 해놨었다. 경복궁을 나선 가마는 거침없이 덕수궁돌담 밖 영국대사관 출입로에 들어서 ‘고종의 길’을 통과 정동공원의 러시아공사관에 들어섰다. 임금이 변장한 채 아무도 모르게 궁궐을 떠나 외국인 거처로 피신한다는 게 참 남세스럽고 창피한 비극이다.
미 대사관저 돌담과 경계를 이룬 '고종의 길'은 쌓인 눈을 가장자리로 치웠고, 경사로 끝에 하얀 러시아공사관탑이 우뚝 서있다. 햇빛에 부신 눈길은 더 썰렁한데 장승처럼 서있는 초병이 스산해 보인다. 조그만 솟을 문을 통하니 한적한 숲길 내리막이다. 장송우듬지 솔잎에 얹힌 눈두덩이 바람에 흩뿌려진다. 텅 빈 공원 소나무사이로 계단언덕에 러시아공사관탑이 을씨년스럽게 솟았다. 고종을 맞는 그날의 공사관은 삼엄한 경계와 무거운 침묵으로 한파는 한결 더 매서웠을 테다.
아관파천의 일등공신은 엄상궁이었다. 사실 엄상궁은 고종과 통정한 게 명성황후에 들켜 궁밖으로 쫓겨났다가 을미사변 직후 고종에 의해 다시 환궁한 여자였다. 43세의 엄상궁은 러시아공사관에서 고종의 애를 임신하여 황태자(영친왕)를 낳고 순헌황귀비 엄씨가 된다. 지밀궁궐 아닌 외국인 공관에서 고종의 절대적인 신뢰를 받는 영민한 엄씨는 여걸이었다. 엄씨는 숙명, 진명, 양정학교를 설립하는 등 근대교육의 선구자이기도 했다.
덕수궁(德壽宮)은 1592년 임진왜란 때 의주로 피난갔다가 환궁한 선조가 불탄 경복궁에 입궁할 수가 없자 월산대군 저택과 주변의 민가 여러 채를 합하여 ‘시어소(時御所)’로 정하여 행궁으로 삼았던데서 기인한다. 1895년 명성황후시해 사건으로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이 1896년 2월11일 러시아공사관으로 비밀리에 거처를 옮긴 게 아관파천이다. 석 달 후 고종은 러시아황제 대관식에 축하사절단을 보내 러시아 군사교관 파견, 차관제공, 전신가설을 요청하여 비밀협약을 체결하고, 안전보장을 받으며 덕수궁환궁을 도모한다.
동시에 러시아는 우리나라에서 산림채벌 내지 광산채굴권 등 이권침탈이 절정을 이루고, 미국은 전등과 전선부설권, 일본은 철도부설권을 빼앗는 등 열강들의 등쌀에 우리의 국권은 풍전등화 격이었다. 러시아공사관에서 1년여 머물던 고종은 1897년 2월에 덕수궁으로 환궁하여 10월12일 새벽2시에 대한제국이라는 황제국을 선포했다.
1907년 고종이 강제퇴위 당해 덕수황궁은 그 규모가 대폭 축소된다. 순종이 돈덕전에서 황제즉위식 거행하고 고종의 호를 태황제라 칭하며 궁호를 덕수(德壽)라 정하여 경운궁을 덕수궁이라 명명했다. 경복궁에서 도망나와 외세를 업고 자강을 꿈꾼 고종은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국운을 나락에 떨어뜨렸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어느 골빈 나라가 무상으로 고종을 돕겠는가? 열강의 패권다툼에 살아남는 길을 고종의 실정에서 찾아야 함이 오늘의 우리정부일 것이다. 오래도록 만수무강하라는 뜻의 덕수궁은 서울 한 복판에서 서울시민들에게 휴식과 깨우침을 고양하는 성전이 됐다. 2024. 01.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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