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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경복`건청궁,향원정,국립민속박물관

경복`건청궁,향원정,국립민속박물관

▲ 수문장교대식. 조선시대 수문장은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사대문인 흥인지문, 숭례문 등 도성과 궁궐의 문을 지키는 책임자였다▼

빛바랜 단풍잎들이 나뭇가지에서 떠나기 싫어 발버둥 친다. 가을이 여장을 갖추고 나무주변을 머뭇대다 단풍 몇 잎을 등에 업고 떠난다. 글고 보니 엊그제가 소설(小雪)이었다. 광화문안에서 취타대음악소리가 파란하늘로 번진다. 수많은 관광객들에 둘러싸인 수문장교대식이 소설맹추위를 녹이고 있다. 우아한 한복차림의 외국인들이 이 진풍경을 담느라 추위를 잊고.

광화문 수문장 교대의식이 취타소리에 맞춰 진행되고 있다
▲근정전, 뒤에 북악산이 보인다▼

조선시대 수문장(守門將)은 국왕이 생활하는 궁궐의 문을 지키는 책임자로 광화문을 여닫고 근무교대를 하면서 국왕과 왕실을 호위하여 나라의 안녕을 수호하는 자리다. 허나 임진왜란 때 수문장 직함이 남발되어 전국에서 수문장이 430여명에 달했던바 영조대왕 때 재정비 된다. 고종 때 경복궁수문장은 허수아비였을까? 1895년10월8일 새벽에 명성황후가 시해됐다. 음력날짜였지 싶어 양력으론 11월하순경일 지금쯤일 테다.

경회루에 불을 잡아먹는 짐승 - 불가사리 두 마리를 만들어 연못 속에 넣어 화기(火氣)를 막으려고 했다. 이 상징물 하나가 최근 경회루 연못을 청소하면서 나왔다. 방형 연못 서북쪽으로 돌기둥 두 개가 물 속에 담겨 있는 육각형 평면의 하향정 (荷香亭)은 이승만 대통령이 낚시를 즐기기 위해 지은 정자이다.
향원지와 경회루 연못의 수원은 북쪽 집옥재 옆의 열상진원지(삽입사진)다

일제낭인폭도들이 경복궁을 통과 건청궁의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참극을 예방하지 못했던 수문장과 왕궁경비대의 혼비백산을 상상해 봤다. 광화문 수문장교대식은 매일(화요일 휴무)11시, 13시에 경복궁 광화문 앞에서 진행되는 10분정도 걸리는 의식이다. 교대시 취타대 4명과 당직 파수군과 교대 파수군 12명이 나와 진행하는 교대식은 관광객들의 인기 있는 고궁행사가 됐다.

▲태원전의 정문인 건숙문▼

동행 중인 아내는 예의바르고 바지런하며 근검절약이 생활에 벤 전형적인 현모양처 스타일이다. 근검절약은 결혼초의 극빈생활에서 기인했지 싶다. 아내가 타인에게 쏟는 마음쓰임은 결코 옹색하지 않아 인심 후한 여자로 정평이 나서다. 하물며 자식들에게 베푸는 정성이야 내가 샘이 나서 경원할 때가 많다. 아내는 나 보단 애들을 더 생각하는 성싶어 섭섭할 땐 옹졸한 내가 쪼잔하단 생각이 들때도 있다.

▲태원전(泰元殿). 태원의 뜻은 하늘을 이름이다. 태원전은 왕과 왕비, 대비가 죽은 후 발인할 때까지 관을 모시던 곳으로 5.16군사정권이 1997년까지 수도사령부30사단으로 사용하며 훼손 됐던 것을 복원했다▼

울`부부는 특별한 먹거리는 아껴먹지만 그렇게 아껴놓은 좋고 맛있는 음식은 애들에게 흔쾌히 먹이는 아내다. 애들이 출가하여 중류생활은 하고 있어 어쩜 꼼생이 울`내외보다 잘 먹고 잘 쓰고 살 테지만 말이다. 사랑은 내리사랑이라지만 아내의 유난스러움이 역겨울 때가 종종 있다. 내리사랑은 어떤 보상도 바라질 않는다. 자식사랑은 무조건이다. 그래 사랑 중에 짝사랑이 순수사랑이지 싶은 것이다.

자식을 위해선 어머니는 자신의 쓸개와 간까지도 꺼내 줄 헌신의 사랑꾼이다. 사랑을 더 할수록 힘겨운 어머니는 되려 힘이 솟는 듯 더 활기차 보인다.  어느 문인은 낙엽을 밟으면서 신달자 시인의 시 <낙엽송>을 차환시켜 어머니의 가없는 사랑을 읊었다. 애를 키우느라 얼마나 애를 태웠던지 끓고 끓은 마음은 빨갛게 터져 단풍이 되었다고.

영사재(永思齋)의 '영사'는 오래도록 생각한다는 뜻으로 고종이 국상 중일 때 여기서 신하들의 알현을 받았다. 민가의 '영모당'이다

살갗 찢어 움틔운 싹을 일 년 내내 키워낸 어미나무, 지난했던 수고로움이 멍울져 빨갛게 물든 잎새를 가지 끝에서 떨쳐 보내는 어미나무의 사랑을~! 딸들은 어머니가 돼봐야 비로써 어머니의 사랑을 알게 된다고 말이다. 아들은 죽었다 다시 깨어나도 어머니의 사랑 근처에도 못 간단다. 길거리에 쌓인 낙엽을 문인은 어머니의 피눈물이 생각나 함부로 밟지 못하겠다고 했다. 어머니의 그림자도 밟지 말아야 함이라.

숙문당, 사자의 위패를 뫼신 혼전(魂殿)

" 가지 끝에서 떨어졌지만 / 저것들은 / 나무의 내장들이다

어머니의 손끝을 거쳐 / 어머니의 가슴을 훑어 간 / 딸들의 저 인생 좀 봐

어머니가 푹푹 끊이던 / 속 터진 / 내장들이다. "

- 신달자 시인의 <낙엽송> 전문 -

을미사변(乙未事變)은 1895년 10월 8일 조선 주재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의 지휘 아래 일본군 한성수비대 미야모토 다케타로(宮本竹太郞) 등이 경복궁(景福宮)에 난입하여 건청궁(乾淸宮) 곤녕합 일대에서 명성황후 민씨(明成皇后閔氏)를 칼로 찔러 시해하고 시신에 석유를 뿌려 불태운 사건이다.

1895년 9월1일 일본육군중장 출신 미우라 고로가 새 공사로 부임한다. 명성황후 민씨(明成皇后閔氏)암실음모 - 일명 ‘여우사냥’을 위해서였다. 그는 일본군 한성수비대 미야모토 다케타로(宮本竹太郞) 등에게 ‘여우사냥’을 지시 10월8일6시경에 건청궁의 민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乙未事變)를 일으킨다. 건청궁 곤녕합에 난입한 일본낭인들은 변복한 황후를 찾아내 살해하지만 황후를 잘 몰라 얼굴이 비슷한 궁녀 세 명을 더 살해했다.

건청궁 녹산의 산수유는 유난히 빨갛다. 왜일까?

황후와 궁녀들을 칼로 난도질한 데라자키 다이키치(寺崎泰吉)는 궁녀들과 태자를 불러 시신확인하고, 왕후의 시신을 이불로 덮어 문짝에 얹어 건청궁 동쪽 녹원(鹿園) 숲 속에서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고 석유를 뿌려 불태웠다. 천인공노할 일본제국의 범죄였다. 그런 범죄를 기대했을 흥선 대원군과 궁궐을 수호해야할 1,500여명의 조선훈련대 경비병들 일부는 역모에 가담하여 일본군 앞잡이가 됐다.

나머지 경비병들은 무기와 군복을 벗어던지고 뿔뿔이 도망쳐버렸다. 궁녀들만도 못한 조선궁궐 경비병들과 정치모리배들은 죄의식 없이 일제에 부화뇌동하였다. 반면에 조선궁녀들은 일본폭도의 만행에 맞서 모진 고통과 희생을 당했다. 그날 아침, 불에 타다 남은 황후의 시신을 수습하여 서봉(西峰) 밑에 매장한 윤석우(尹錫禹)와 이주회, 일본어 통역관 박선(朴銑)은 친일내각이 반역죄를 씌워 사형에 처했다. 지금도 일본 앞잡이 모리배를 변명하는 위정자들이 역사발전을 외치며 활보한다.

▲집옥재▼
좌측의 팔우정(八隅亭)과 집옥재(集玉齋) 본채, 우측의 협길당(協吉堂)전각이 복도로 붙어있다

고종과 민비를 견제하려 일제에 도움을 요청한 흥선 대원군과 친일위정자들의 권력욕을 일제가 정변으로 이용한 게 을미사변이다. 나라가 전쟁이나 변혁에 휘말리면 권력자는 도피처로 숨고, 애먼 백성과 군인들만 희생되는 게 역사가 증명한다. 특히 우리 정치인들은 편 가르기로 자중지란에 빠진 경우가 많다. 진정한 적은 외부에 있기보단 내부에 있음을 간과해선 안 된다. 오늘날 우리끼리도~?

고종이 어진을 모시고, 책을 보관한 서재로써 외국사신을 접견하는 장소였다.고종은 청나라에서 서양문물 관련서적을 많이 구입 집옥재에 비치하고 독서하면서 개화정책을 추진했다. 玉과 같이 귀한 보배를 모은다(集)는 뜻의 현판은 중국 북송의 유명한 서예가였던 미불의 글씨를 조합했다
집옥재 팔우정의 내부
건청궁은 1873년(고종 10년) 경복궁 중건이 끝난 뒤 고종이 흥선대원군 몰래 궁궐의 내밀한 북쪽에 국고가 아닌 사비로 지은 '궁 안의 궁'이다.
건청궁은 고종과 명성황후의 거처였는데 을미사변으로 1896년 고종이 아관파천을 단행하자 일제는 1909년 건청궁을 철거하고 조선총독부 미술관을 지었다. 해방 후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사용허다가 1998년에 철거하고 2007년10월18일 건청궁을 복원했다
장안당 (長安堂)은 고종황제의 침전이다. '오랫동안 평안하다'는 뜻의 장안당의 북행각은 1887년 미국의 에디슨전기회사가 발전기를 설치해 한국 최초로 전깃불을 밝힌 곳이다. 을미사변 당시에 고종은 이곳에 감금된 상태였다
장안당은 고종이 머물던 처소로 민가의 사랑채 역할을 하던 장소였다.
곤녕(坤寧)은 '땅이 편안하다'는 뜻으로 자금성의 곤녕궁에서 차환한 이름이다. 곤녕합의 남쪽 누각 옥호루(玉壺樓)는 명성황후가 시해되었던 장소다. 일본낭인들이 곤녕합 옥호루에서 민황후를 찾아내자 궁내부 대신 이경직이 두 팔로 가로막고 나서다가 권총을 맞고 쓰러졌다. 다시 일어나 버둥대며 길을 막는 이경직을 낭인들은 칼로 그의 허리를 베어버렸다
관문각은 1888년(고종 25) 경복궁 건청궁 영역에 러시아 제국의 건축가인 사바틴의 설계하에 유럽식 2층 건물로 준공되었다. 사바틴과 미국인 다이 대령이 관문각 2층에서 을미사변을 목격했던 곳이기도 하다
▲녹산(鹿山)은 고종과 민비가 휴식하던 건청궁 옆의 나지막한 동산인데 사슴이 뛰놀았다 해서 붙은 이름으로 '경복궁 녹원에서 기르던 사슴 일곱 마리 중에 한 마리가 굶어죽었다'는 대한매일신보 기사가 이를 확인시켜준다. 옛 부터 '녹산(鹿山)'이란 명칭은 신령, 장수, 영생, 왕권을 상징하는 사슴에서 유래됨인데 명성황후가 참혹한 죽음을 당할 줄이야~?▼
녹산 숲의 빨간 단풍이 명성황후의 원혼일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건청궁과 향원지 사이의 단풍이 가을의 피날레를 장식하나 싶었다▼
고종은 부친인 흥선대원군의 섭정에서의 정치적 자립을 꾀한 일환으로 건청궁 앞에 연못을 파고, 가운데 섬을 만들어 향원정 (香遠亭) 을 짓고 건청궁과 연결하는 취향교를 놓았다(1885년). 향원정은 육각형 평면의 2층 목조정자 건물로 1층은 온돌바닥, 2층은 우물 마루의 형태로 되어있다.
향원정은 왕과 그 가족들이 휴식을 취하는 공간으로 경복궁 후원의 아름다운 풍광을 병풍삼은 궁궐후원의 상징적 대표 건물이다. 육각형 초석, 육각형 평면, 육모지붕 등 육각형의 공간을 구성하여 섬세하고 미려하게 다듬은 모든 구성요소들이 절묘한 조화를 이룬 비례감이 뛰어난 정자로 역사적, 예술적, 건축적으로 가치가 높다고 인정받아 보물로 지정되었다.
▲향원지의 단풍, 황후의 꽃을 채 피워보지도 못하고 화장재로 뿌려진 명성황후의 넋일까?▼
명성황후는 1895년1월17일, 21일에 한양의 서양인 거주자들을 향원정에 불러 스케이팅 파티를 벌였다. 9개월 후에 일본낭인들한테 피살되고 불 태워 진 시신이 향원지에 수장되리라 꿈이나 꿨겠는가? .

향원지의 수원은 북쪽 언덕 밑에서 솟는 '열상진원(洌上眞源)'이라는 샘물이다. 향원지 남측에 대한민국 최초의 전기발전소를 설치할 때 향원지물을 끌어올려 전기를 생산하여 ‘물불’이라 부르기도 했다. 1887년 3월 6일, 처음으로 전등을 켜서 경복궁궐을 밝힐 때 약 450개의 전구를 사용했다. 경복궁내 향원정을 밝히는 전등불에 깜짝 놀라 혼비백산 했을 백성들을 상상해 봤다.

그야말로 경천동지할까 기겁하여 숨을 곳 찾느라 난리였을 테다. 쬐그만한 유리공알이 대낮처럼 환하게 밝히니 놀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으랴? 더구나 발전기 냉각수로 사용된 향원정의 물이 뜨거워져 연못의 물고기들이 물위로 떠올라 익어 죽는 사태가 발생했다. 하여 백성들이 ‘도깨비의 저주’라고 호들갑을 떨며 발전기를 없애야 한다는 중구난방 소동에 한동안 전등운영을 중지하기도 했었다. 오늘날 달나라 가는 뉴스는 '도깨비 저주'에 비하면 뉴스깜도 안됐을 테다.

육모기둥엔 여섯 개의 주련이 걸려있었다. 향원지를 신선세계에 비유하는 주련의 내용을 옮겨본다. (두 번째 주련은 분실됐단다)

  1. 玉池龍躍舞(옥지용약무): 신선이 사는 연못에 용이 뛰쳐 오르며 춤추네.
  2. (분실)
  3. 千山華月逈(천산화월형): 천 개의 산에는 빛나는 달이 멀리까지 비추고
  4. 萬里衆星明(만리중성명): 만리에는 별무리가 밝게 빛나네.
  5. 崑閬雲霞積(곤랑운하적): 곤륜산 봉우리에는 구름과 노을이 쌓였고
  6. 蓬壺日月長(봉호일월장): 신선 사는 봉래산에는 세월도 길도다.

향원정은 1층은 온돌난방이고 2층은 그냥 마루였다. 향원정의 온돌방 고래(구들 밑에서 연기가 통하는 길)는 가장자리에 있다. 하여 난방이 바깥쪽을 중심으로 이뤄졌단다. 기똥 찬 것은 불 때는 아궁이가 있으나 연기가 빠지는 굴뚝이 없단 게 향원정의 특징이란다.
▲국립민속박물관 원경, 내 어릴적엔 고궁을 상징하는 그림엽서였다. 이 아름잡고 멋진 건물이 철거 됐다니? ▼

국립민속박물관은 1946년 남산 구 시정기념관(통감 관저) 에서 개관하여  1966년~1975년엔 수정전에서, 1975~1992년까 향원정 뒤 옛 현대미술관을 사용해 오다가 1993년 2월 구 국립중앙박물관 건물(선원전 터)에 자리잡았다.  2021년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헤이리로에 분관을 열고 지금에 이르렀으나 경복궁 2차 복원 정비 사업에 따라 2030년전까지 철거되고 추후 박물관은 세종시로 이전할 예정이란다. 박물관의 '박'자도 잘 모르는 내가 민속박물관의 수난사를 헤아려 봤자지만 내 딴엔  맘에 걸리는 게 하나 있다.

부산, 동래지방에서 유행했다는 동래야류들
탈춤의 각종 도구

 현 민속박물관은 불국사의 청운교와 백운교(국보 제23호), 상부의 5층 건물은 법주사 팔상전(국보 제55호), 난간 위의 평면과 부속 건물은 화엄사의 팔상전(국보 제67호), 난간 아랫 부분과 건물 측면은 금산사 미륵전(국보 제62호), 상륜부 난간은 경복궁 근정전(국보 제223호)에서 따온 모양으로 각각의 국보들을 짜깁기한 탓에 철거논란에 휩싸이다가 선원전 복원공사로 세종시에 새로 짓는단다. 내가 아깝게 여기는 건 짜깁기했을 망정 웅장하고 아름다운 현 건물이 헐어져 사라진다는 것이다

각종 탈
가면극의 도구들

웅장하고 덩치 큰 석조건물이 어째서 고작 10%정도의 내부전시 공간만 사용되고 있는지 무식한 나는 굳이 알고 싶지도 않다. 그외 건물은 출입금지 구역인 채다.  낭비도 이렇게 어처구니 없을까 싶다. 관리비로 세금만 탕진하는 게 아닌지? 우리나라 국보급 건축만을 짜깁기 해서 더 멋지다 싶은데 활용할 궁리보단 새로운 건축물로 대체해야 한다는 사실에 욕지껄이고 싶다.  어쨌거나 오늘 1층 전시관에서 사라져가는 우리의 옛 생활모습과 도구들을 볼 수가 있어 좋았다.  반세기를 훌쩍 뛰어넘는 타임머신 여행은 모처럼 공유하는 향수였다. 

탈춤도구
이렇게 반정맞은 수염탈도 있었던가?
무명, 삼, 누에고추, 등을 실 뽑아 배를 만드는 배틀, 어머니와 누나의 배짜던 모습이 한 폭의 서정으로 아롱댄다
떡살, 시루, 떡매 등
지개, 풍로, 홀태, 반자동 탈곡기(우) 등 반세기 전의 농촌의 최신 이기들이 고향의 풍미를 소환시켜줘 흐뭇했다
나룻배와 돛단배
▲국립민속박물관이 얼마나 웅장하고 멋진 석조건축물인데 불원간 헐어져 사라질 운명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