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묘(宗廟)의 만추(晩秋)
종묘(宗廟)산책이 언제였던가.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집에서 걸어서도 반시간이면 될 종묘산책이 겨울문턱에서 불현듯이 생각났다. 외대문(外大門)앞이 이르자 돌담 안의 초록수목들이 황토빛 옷갈이 하고 있다. 성역이라 한파도 비켜가는 걸까? 낙엽을 띄운 연못은 계절의 변화를 응축하여 보여준다. 저만치 향대청 입구에서 외국인관람객들에게 문화해설사가 영어로 열변을 토하고 있다. 떡갈나무가 누런 이파리를 파란하늘에 날려보낸다.
종묘는 조선 왕조의 역대 국왕들과 왕후들의 신주를 모시고 제례를 봉행하는 유교 사당이다. 1395년10월 태조가 한양으로 수도를 옮긴 그 해 12월에 지었는데 임진왜란 때에 소실되어 1608년 광해군이 다시 지었다. 정전(正殿)엔 왕위에 오른 선왕과 그 왕비의 신주를 순위에 따라 모시고, 영녕전(永寧殿)은 추존(追尊)된 선왕의 부모나 복위된 왕들을 모신 곳이다. 궁묘(宮廟)는 정실의 출생이 아닌 왕이 그 사친(私親)을 봉안하는 사당이다.
종묘의 제삿날은 4계절의 첫 달 상순, 정초·단오·한식·추석, 동지의 납일과 매월 삭망(朔望)일이다. 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친제하여 왕세자는 아헌관, 영의정은 종헌관이 되어 작헌(酌獻)·분향(焚香)·재배의 복잡한 절차를 밟으며 향사한다. 종묘는 1995년12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고 2001년엔 유네스코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걸작으로 등록되었다.
종묘는 제례를 위한 건축물로 기교와 단청이 없는 지극히 단순 절제된 우아함이 돋보인다. 신로, 월대, 기단, 담 등 필요한 공간만 담은 구성과 구조, 장식과 색채의 간결함은 종묘 건축의 상징성을 보여준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축가 프랑크 게리가 종묘를 보기 위해 가족들과 한국에 여행 와서 "이 같이 장엄한 공간은 세계 어디서도 찾기 힘들다"고 호평했다.
凸자형 가운데의 약간 높은 길은 신향로(神香路)이고, 동측의 낮은 길은 어로(御路, 임금의 길) 서측은 세자로(世子路, 세자의 길)인데, 신향로는 제향 때 향로를 받들고 다니는 길이다. 소나무와 활엽수가 어우러진 늦가을의 색체의 공간속에 낙엽이 수북이 쌓인 박석의 신향로를 걷는 기분은 만추의 서정에 흠뻑 젖어들게 한다. 서울의 한 복판에서 울긋불긋 번지는 색깔의 향연에 취한다는 낭만은 상상밖의 기쁨이다.
향대청과 재궁을 휘돌아 전사청을 일별한다. 신향로를 밟으면서 짙어지는 만추의 정취에 빠져드는 기분은 흥분이다. 깊어지는 가을의 멋에 허허로워지는 서정은 정녕 나 혼자만일까? 정전은 보수공사 중이라 출입금지다. 정전 남신문루에서 감상하는 자연의 가을빛은 수려하다. 악공청을 지나 영녕전에 들어서서 종묘의 수려함에 매료된다. 아까 공사 중이라 못 본 정전의 우아함까지 상상의 멋에 취하면서 말이다.
원형 목재 열주들이 떠받든 영녕전 기와지붕은 크레파스 붓칠한 자연을 휘둘렀다. 이렇게 고즈넉하고 단아한 종묘에 반한 일본 현대건축의 거장 시라이 세이이치는 “서양에 파르테논신전이 있다면, 동양에는 종묘가 있다.”고 극찬했다. 파르테논신전은 인위적인 대리석건물로 장엄하고, 종묘는 목조건물로 자연과의 아우라가 동양적인 경외감을 자아내고 있다할 것이다.
프랭크 게리는 종묘를 보고 감동한 나머지 "세계 최고의 건물 중 하나이며, 한국 사람들은 이런 건물이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고 일갈했다. 그는 15년 후 가족들을 동반하고 다시 종묘를 참배하면서, "이같이 장엄한 공간은 세계 어디서도 찾기 힘들다. 비슷한 느낌을 받았던 곳을 굳이 말하라면 파르테논신전 정도?"라고 말했다. 하여 나는 오늘 세계의 유명인사들이 극찬한 신성한 종묘의 아우라를 공감하면서 단풍으로 단청하는 고즈넉한 풍경에 한참을 뭉그적댔다.
영녕전을 나와 악공청쉼터에 앉았다. 일단의 젊은 외국관광객들이 몰려와 해설사의 얘기를 경청한다. 그들의 진지한 표정으로 봐서 우리나라역사에 대해 흥미를 지닌 사람들이란 생각이 들었다. K-팝에 이어 K-히스토리가 회자될지 모른다. 무식한 자는 무도한 횡포를 부리고도 자신의 잘못을 모른다. 불한당의 폭거는 결단코 용서받을 수가 없다. 일본의 죄악은 종묘와 왕궁에서 절정을 이뤘다.
임진왜란 때 우키다 히데이에의 부대는 한성을 침범하여 종묘에 집결`주둔했다. 근데 밤엔 곡소리나 괴성이 들리고 병졸들이 비명횡사하는 괴변이 속출하여 진영이 술렁대며 불안해하자, 종묘신령 땜이라고 우키다가 종묘에 불을 질러 전소시키고 남별궁으로 진영을 옮겼다. 한 나라의 성역인 종묘와 궁궐을 장난질 하듯 불 지르는 포악무도한 폭거에 대해 지금까지 사과한 적이 없는 일본이다. 지들은 태평양전쟁 전범들의 신사에 참배하면서 말이다.
종묘를 한 바퀴 소요하는 숲길은 더할 나위 없게 멋지다. 북악산 경복궁 동쪽 구릉분지의 수목들은 한파도 범접하지 못할 명당이어선지 아직껏 단풍도 한창이다. 창경궁과 연계된 길목은 언제쯤 개방할는지? 종묘와 창경궁와 창덕궁을 연계한 산책길이 열리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멋진 역사탐방과 치유트레킹 코스가 될 것이다. 뉴욕이 자랑하는 센트럴파크는 비교할 수 없는 인류문화가 숨 쉬는 궁원(宮苑)인 것이다.
눈 내리는 날, 하얀 설화를 피워낼 종묘의 숲과 사당들이 자아낼 아우라를 상상해 본다. 그땐 창경궁길도 열릴 테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띈 다. 서울에 산다는 것, 7할이 금수강산인 한국의 시민이란 자긍심이 기분을 업그레이드 시킨다. 외대문(外大門)을 나선다. 세 개의 대문인 맞배지붕 건물을 창엽문(蒼葉門)이라고도 한다. 푸른 잎의 문 - 늘푸른, 청정한 신령들의 문이란 뜻일까? 행복한 한나절을 창엽 속에서 놀았다. 2023. 11. 19
# 신문왕이 687년 4월 제사 때 태조, 진지왕, 문흥왕, 태종무열왕, 문무왕 5위께 대신을 보내 올린 제문
“왕 아무개는 머리를 조아리고 재배(再拜)하며 삼가 태조대왕(太祖大王)ㆍ진지대왕(眞智大王)ㆍ문흥대왕(文興大王)ㆍ태종대왕(太宗大王)ㆍ문무대왕(文武大王) 영전에 아룁니다. 저는 재주와 덕이 없이 숭고한 유업을 이었기에, 자나깨나 걱정하고 애쓰느라 편안하게 지낼 겨를이 없었습니다.
종묘의 보살핌과 하늘과 땅이 내리는 복에 힘입어 사방이 안정되고 백성들이 화목하며, 외국에서 오는 손님들이 보물을 실어다 바치고, 형벌이 밝고 송사가 없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요즈음 임금의 할 도리를 잃어서 정의가 하늘의 뜻에 어긋났는지, 별의 형상이 괴이하고 해는 빛을 잃어가니, 두려워 몸이 벌벌 떨려옴이 마치 깊은 못과 골짜기에 떨어지는 듯하옵니다. 모모 관직에 있는 아무개를 보내 변변치 못한 제물을 차려 놓고 살아 계신 듯한 신령 앞에 정성을 드리며 엎드려 바라옵나이다.
자그마한 정성을 밝게 살피시고 하찮은 몸을 가련히 여기시어, 사철의 기후를 순조롭게 하시고 오사(五事)의 징후에 허물이 없게 하시며 곡식이 잘되고 질병이 없어지며 입고 먹는 것이 넉넉하고 예의가 갖추어지며 안팎이 편안하고 도적이 사라지며 자손들에게 넉넉히 남겨 오래도록 많은 복을 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삼가 아뢰옵니다.” -<삼국사기 중 신라본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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