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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단풍 치장한 덕수궁(德壽宮)

단풍 치장한 덕수궁(德壽宮)

덕수궁돌담길 사거리

덕수궁(德壽宮)은 1592년에 임진왜란이 발발 선조가 의주로 피난 후 환궁하자 궁궐이 모두 불타버려 왕족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완전했던 월산대군(月山大君) 이정(李婷, 1454~1489)의 개인 저택을 행궁으로 삼아 거처하게 된 것이 덕수궁의 시초이다. 임진왜란 직후 선조, 광해군 때 임시 행궁(行宮)으 로 쓰였고, 아관파천(俄館播遷) 이후에는 대한제국의 황궁으로 사용되었다. 원래의 명칭은 경운궁(慶運宮)이었는데, 1907년 고종이 순종에게 양위(讓位)한 뒤, 고종의 장수를 빈다는 뜻에서 덕수궁(德壽宮)으로 개칭하였다.

정동길의 정동극장

 1907년 고종은 일제의 강압에 의해 체결된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알리고자 이준(李儁)·이상설(李相卨)·이위종(李瑋鍾)을 밀사로 파견하나 실패한다. 고종은 일제에 의해 강제로 퇴위 되고, 순종이 돈덕전(惇德殿)에서 황제로 즉위하였다. 순종이 창덕궁으로 이어하고 고종이 덕수궁에 거처하여 고종의 장수를 빈다는 뜻에서 경운궁의 명칭을 덕수궁(德壽宮)으로 바꾸었다.

덕수궁돌담길

6.25전쟁 때 덕수궁에 수백 명의 북한군이 주둔해 있자 미군이 덕수궁을 포격하기 직전에 미 포병중위 제임스 해밀턴 딜이 적극적으로 반대하여 포격하지 않았다. 알마 후 북한군이 덕수궁에서 나와 을지로와 태평로에 도달했을 때 공격을 개시하였던 거다. 하여 덕수궁이 옛모습 그대로 보존될 수 있었고 이에 1996년 대한민국 정부는 제임스 해밀턴 딜에게 감사패를 전달하였다. 인류문화유산을 지켜낸 일화는 전쟁불사를 외친 위정자들이 아니라 일반 시민들의 혜안과 의지 땜이었음을 역사는 증명한다.

덕수궁돌담길은 우리나라 최초의 보행자를 위한 보도와 차도가 공존하는 푸르름이 가득한 900m 도로다. 자연친화적인 점토블록 및 보행자의 안전한 보행권 확보를 위해 차도에 석고석 포장(페이빙스톤) 실시하였고, 시민들의 휴식 공간을 위해 느티나무 외 2종 130주 식재, 평의자 20개 설치하였다
▲대한문(大漢門) 1906년 4월 대안문을 수리하면서 대한문(大漢門)으로 고쳤다. 겹처마에 단청을 하였고, 지붕마루에 양성(兩城)을 하여 취두(鷲頭) 용두(龍頭) 잡상(雜像)을 얹었다. 현판은 당시의 궁전대신 남정철(南廷哲)이 썼다. 수문장 교대식이 한참이다▼
▲연지, 대한문 우측의 숲속에 연지가 있고 카페가 들어서 쉼터로 애용된다▼
▲연지주변의 숲은 협소한 덕수궁궐에서의 정원역활을 톡톡히 한다▼
담장 넘어 보이는 영국대사관
영국대사관으로 통하는 쪽문에 회화나무가 수문장처럼 서있다
독특한 양식의 정관헌 가는 길을 까치가 안내한다
정관헌(靜觀軒)은 서양식건물로 고종이 다과와 커피를 즐겼다. 외교사절단을 맞아 연회를 개최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1911년 건립한 덕흥전은 전통양식의 건물이지만 천장에 샹들리에를 설치한 서양식을 가미 고위관료와 외교사절을 접견한 장소다
회화나무는 상서로운 나무라 하여 궁궐주변에 많이 심었고, 선비들이 좋아해 학자나무라고도 했는데 정동에 선비들이 많이 살아 덕수궁근방에 많다. 400여년 된 이 회화나무는 덕수궁화재에도 살아남았다.
함녕전 후원엔 전돌로 만든 유현문과 장식적인 굴뚝들이 있어 운치를 북돋운다.
석조전과 현대미술관을 잇는 회랑
석조전 후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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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명당 후원, 준명당처마는 겹처마이고 팔작기와지붕의 용마루와 추녀마루는 양성을 하지 않고, 용두(龍頭)를 놓아 장식했다. 대청 앞과 뒤의 툇간(退間)에는 띠살창호를 달고 위쪽에 빗살로 된 교창(交窓)을 달았다. 온돌방과 툇간에는 井자살로 된 창호들을 달았고, 온돌방굴뚝은 뒤편에 따로 검은 벽돌로 쌓고 위에 연가(煙家)를 놓아 장식하고 있다.▼

즉조당(卽阼堂)은 광해와 인조가 왕위에 등극한 곳으로 1904년 화재로 소실되자 3월에 중건한 것이다. 나중에 상왕 고종이 거처하던 궁궐로 중화전의 바로 뒤에 높은 돌기단을 쌓고 세웠다. 준명당(浚眀堂)과 복도 및 난간으로 연결되어 복합적인 구성을 보여주고 있다.
▲중명당(重眀殿) 고종의 집무실인 편전이자 외국사절 알현실로 사용되었다. 양식2층벽돌집으로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었던 비운(悲運)의 장소다.▼
고종이 업무를 보던 편전인 준명당은 즉조당과 복도로 연결됐다
석조전 동`서쪽의 2층 출입계단과 열주, 테라스의 아름다움이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건물인 석조전(石造殿)
석어당과 우측의 살구나무. 살구는 간식거리 과일로 애용하고 살구씨는 약재로 만병통치약이랄 만큼 많이 쓰인다. 살구나무숲을 한자로 행림이라 하는데 의원을 달리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하여 살구보자(살고보자)는 뜻에서 병원에 많이 심었단다.
함녕전은 고종의 침전으로 경운궁화재 때 소실되어 중건했다. 1919년 고종이 승하한 장소다
도심의 궁궐이 사랑받는 소이 중 하나는 숲정원의 쉼터 땜일 테다
▲중화전(中和殿)은 덕수궁의 정전으로 임금님이 하례(賀禮)를 받거나 국가 행사를 거행하던 곳이고 중화문은 중화전의 정문이다.▼
열주식(列柱式) 석조건물은 해방 후 미소공동위원회의 회담장소로, 53년부터 국립박물관, 73년부터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지금은 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석조전; 대한제국의 대표적인 서양신고전주 양식의 석조전은 영국인 존 레지날드 하딩(John Reginald Harding)이 설계를 맡아 1900~1910년에 준공됐다. 고종이 황제국을 선포해 제국의 황궁으로써 지층은 시종의 공간, 1층은 접견실과 대식당이 있어 외국사신을 접견의례를 수행하는 공간이다. 2층에는 황제와 황후의 침실, 서재, 거실이 있다. 현재는 대한제국역사관 전시실로 사용되고 있다
석조전 화랑과 테라스(상), 황제 서제와 황후 거실(하)
▲돈덕전(惇德殿) 황제와 황태자가 각국의 공사와 사절들을 만나 연회을 열었으며, 신하들을 접견하는 용도로 사용했다. 1906년에는 황태자 이척(순종)과 황태자비 윤씨(순정효황후)의 가례 연회장으로 사용했고, 외국의 국빈급 귀빈들이 묶는 영빈관으로도 활용되었다. 1905년 방한한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의 딸 앨리스와 일본 황족 후시미노미야 히로야스 왕 등이 여기서 머물렀다. 1907년 8월에는 순종이 이곳에서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로 즉위했다. 돈덕전 현판글씨는 당나라 명필 구양순(歐陽詢)의 글자를 집자한 걸로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보관 중이다.▼
고종황제의 아침 알현
고종황제가 민영목을 외국수호사절 특명대신으로 보내면서 통상조약 전권을 위임한다는 교지
1887년 초대주미공사관 수행원 강진희(1851~1919)가 주미 청나라 공사관원 팽광예(1844~?)와 교제한 서화작품을 화첩으로 엮은 <미사목록>에 실린 두 점의 작품이다. <일하향임도>(우)는 청국공사 장음환의 그림 - 청나라 공사관원들이 증기선을 타고 망망대해 태평양을 건너 미국으로 가는 모습에 팽광예가 글을 쓴 것이다. <화차분별도>(좌)는 미국에서 신문물을 경험한 서화가이자 초대 주미공사관원인 강진희가 연기를 뿜으며 달리는 두 대의 기차를 그린 것이다. 많은 사람과 화물을 싣고 빠르게 달리는 기차는 근대화의 상징으로 서양의 발달된 기술과 제도를 받아들이려는 조선정부의 의지와 외교관들의 고심을 압축한다. 1887년 주미조선 외교관들이 워싱턴공사관을 개설하자 청국은 이를 견재를 한다. 그런 양국의 갈등 속에서도 팽광예와 강진희는 외교관으로써 공감대를 쌓으려 노력했다.
▲돈덕전(惇德殿) 황제와 황태자가 각국의 공사와 사절들을 만나 연회을 열었으며, 신하들을 접견하는 용도로 사용했다. 1906년에는 황태자 이척(순종)과 황태자비 윤씨(순정효황후)의 가례 연회장으로 사용했고, 외국의 국빈급 귀빈들이 묵는 영빈관으로도 활용되었다. 1905년 방한한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의 딸 앨리스와 일본 황족 후시미노미야 히로야스 왕 등이 여기서 머물렀다. 1907년 8월에는 순종이 이곳에서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로 즉위했다. 돈덕전 현판 글씨는 당나라 명필 구양순(歐陽詢)의 글자를 집자한 걸로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보관 중이다.▼
돈덕전 앞의 회화나무는 1670년쯤 태어난 거목이다
돈덕전2층 테라스에서 조망한 석조전회랑과 뜰
석조전과 현대미술관을 잇는 회랑
고종이 경복궁에서 러시아공사관으로 아관파천 했던 고종의 길
보수 중인 러시아 공사관
단체 관광객들이 해설을 듣고 있는 정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수녀원 터였다. 우측 언덕에 러시아공사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