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산(高臺山)에서 품은 앵초(櫻草)
오전11시경, 경원선에서 끊긴 신탄리역사 앞에서 고대산을 향한다. 작년 이맘때 고대산을 처녀등산 했으니 두 번째다. 오늘 고대산행을 일 년간 벼르고 벼렸던 건 웅덩이도 말라버렸던 표범폭포와 그 위 토치카 앞에 초병처럼 서 있던 앵초의 모습이 스산해서였다. 근디 오늘 조짐이 좋다. 맑은 날씨에 초록잎새를 더듬다 온 바람결이 그리 청량할 수가 없는데, 2코스전망대 정자에서 조우한 산님 커플이 알려준 낭보가 한껏 기대치를 높여줬다.
산님 커플은 아래 방갈로에서 1박 했는데 ‘어제 밤 제법 많은 비가 내렸다’고 했다. 아닌 게 아니라 수풀이 빗방울에 젖어있고 산길도 축축했다. 작년 2코스벼랑길 계단공사로 3코스로 방향을 틀어야 했었는데, 그새 나무계단으로 단장한 전망대는 철원평야를 품은 검푸른 산 능선파도를 안느라 버거울 정도였다. 전망대 뒤 토치카 갈림길에서 2코스로 향했다.
작년산행의 역순인 2코스로 올라 3코스로 하산하기로 했다. 숲길은 말등바위를 내준다. 울창한 참나무숲길엔 무성한 이파리의 춤사위에 잘린 햇볕이 뒹굴고, 그때마다 바람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리는 소요하기 딱 그만인 힐링 숲길이 된다. 바람등을 타고 춤추는 떡갈나무 잎들의 춤사위에 덩달아 숲을 기웃거리는 햇살의 방황은, 나의 발등에서 숲길을 안내하는 시그널이 된다.
이렇게 호젓하고 청량한 나만의 시간은 산이 주는 당의정이다. 의식과 감각을 일깨우는 이 순간의 열락을 포기할 수 없어 나는 기꺼이 홀로산행을 이어간다. 동반자는 바람과 햇살과 간혹 휘파람 불어주는 새소리들이다. 또 있다. 골짝을 흐르는 물살의 역동성은 신나는 응원가가 된다. 그 물살에 손발을 담그면 천국의 오케스트라전당에 듦이라!
말등바위에 손 내밀곤 칼바위잔등에 올랐다. 빡센 경사에 가픈 숨 내쉬면서 바위요철(凹凸)을 밟는 일념은 행선(行禪)이다. 일상탈출의 오롯한 경지는 산행의 고됨이 주는 무상의 보시(報施)요, 무한대로 펼쳐지는 풍광에의 감탄은 덤으로 얻는 보너스다. 한두 송이 다가서는 철쭉꽃이 어째 풀죽었다. 아니 엊밤 소나기에 낙화한 처연한 놈들이 바닥에 수북하다. 하루만 일찍 왔어도 놈들의 환한 미소에 환호했을 텐데 아쉽다.
이소(離巢)직전의 생기 잃은 철쭉꽃무리 속에서 한 컷 폰`카에 담느라 숲을 기웃대는 여인의 동정이 여간 조심스럽다. 파시의 철쭉꽃밭에서 싱싱한 꽃송이 찾느라 비행하는 나비처럼 느껴지는 여인의 모습이 어쩜 나와 동병상련(同病相憐) 같단 생각이 스쳤다. 나비부인(?)이나 나나 대광봉 아래 철쭉 밭에선 아쉬움을 삭히지 못한 채 고대봉을 향했다. 아니 나비부인은 앞서 사라졌다.
난 대광봉에서 조망되는 사위의 산능파도를 폰`카에 담았다. 덤으로 아직 때깔 좋은 붉은 병꽃 한 무더기도 찍고, 능선에서 두꺼비바위도 잡아 담았다. 고대산정상에 닿았을 때 탐스런 철쭉꽃나무 앞에서 서성대는 나비부인을 다시 만났다. 나도 숲속을 몇 발자국 들어서 나비부인이 남긴 연분홍철쭉을 마져 담았다. 글곤 나비부인을 좇아 고대산정상에서 인증샷까지 해내 홀로산행의 아쉬움을 덜었다.
쓰나미처럼 밀려드는 검푸른 산 능선파도에 휩싸인다. 골 깊은 한탄강은 철원평야를 낳고, 금학산의 천국을 향하는 갈지자 승천길이 흡사 하얀 구렁이처럼 꿈틀댄다. 군부대진영을 발아래 깐 바위에 걸터앉아 점심자릴 폈다. 산님들이 정상에서 만끽하는 최대치의 열락을 포식하는 순간이라! 하산한다. 낡은 철조망 휘두른 토치카 앞에서 앵초는 잊지 않고 나를 기다려주고 있었다. 오우! 간밤 소나기도 비켜갔나? 엄청 반가웠다.
딱 1년만이다. 싱싱한 때깔에 바람결인사를 하는 놈은 내가 오늘 고대산을 찾게 한 주인공이다. 넓고 높고 깊은 고대산준령에 함초롬히 서있는 앵초! 그는 언제부터 이 자릴 지키고 있을까? 궁예가 후삼국[태봉]을 철원에 열기 훨씬 전이었을 것이다. 참나무 숯을 팔아 생계를 연명하는 산촌에 가난한 부녀가 살고 있었는데, 소녀는 어머니의 병환을 지극정성 간호하고 있었다. 그런 어느 날 어머니는 앵초꽃을 보고 싶다고 했다.
효심 깊은 소녀는 앵초를 찾아 산야를 쏘다녔으나 겨울에 앵초꽃이 있을 턱이 없었다. 그만 지쳐 귀가하던 황혼녘, 앵초꽃 한 송이를 발견하여 얼른 꺾는다. 동시에 하늘요정이 나타나 그 앵초꽃은 보물성에 들어갈 수 있는 열쇠라고 일러줬다. 보물성 대문 열쇠구멍에 앵초꽃을 꽂으면 대문이 열리고 성안의 보물은 맘껏 가져올 수 있는데, 단 30초안에 안 나오면 대문을 닫혀 되돌아 올수가 없다고 신신당부 하면서였다.
소녀는 서둘러 보물성을 향해 내달려 대문열쇠구멍에 꽃을 꽂았다. 스르르 대문이 열렸는데 웬걸 성안엔 조약돌만 있잖은가? 30초란 생각에 그만 조약돌 3개를 들고 후딱 성문 밖으로 나오자마자 요정이 다시 나타나 격려한다.
“너는 참 고운 심성에 지혜롭기까지 하구나. 여태껏 성안에 들어 온 사람들은 보물 찾느라 시간이 지체돼 성안에 갇혀 불귀의 객이 됐단다. 네가 쥔 조약돌이 곧 보물이다”라고.
요정은 사라지고 그 순간 소녀의 손에 3개의 보물이 쥐어졌다. 소녀는 앵초꽃과 보석을 들고 어머니께 달려가 병환을 완치시키고 행복한 가정을 되찾았다. 전설 같은 얘기를 떠올리면서 흡사 토치카성벽이 보물성이 아니었을까? 하는 상상의 나래를 펴게 했다. 고대산 토치카의 앵초와 착한 소녀! 앵초꽃이 고대산자락에 더 피어 예쁜 설화의 감동을 많은 산님들께 전했으면 싶다. 나비부인이 앵초꽃을 폰`카에 담아 저만치 앞선다. 앵초꽃 든 소녀의 잔상이 숲속으로 사라졌다.
표범골짝에 성큼 발을 내디뎠다. 표범의 울음소리가 아닌 은은한 합창곡이 옥타브를 높이고 있었다. 표범바위는 신록의 이파리 속으로 숨어들고, 이끼로 성장한 천길 단애는 폭포수 길을 터서 계곡의 아리아를 연주하고 있었다. 웅혼하진 않아도 폭포수는 표범의 수염처럼 아니 날선 갈기마냥 물안개 흝뿌린다. 표범이 뱉아낸 폭포수 웅덩이에 발목을 담근다.
어휴! 냉기에 단 몇 분도 버티질 못했다. 감히 어디다 방정을 떠느냐?고 시퍼런 웅덩이가 얼음송곳 침을 놓나 싶었다. 후회했다. 폭포지킴이 단풍나무가 한껏 짙푸르다. 파란하늘이 이파리들한테 뜯겨 먹혀 한 뼘 남짓 남았다. 폭포수 아리아의 울림에 숲 이파리들이 가늘게 떨고 하늘도 떤다. 자연은 참 신묘하고 가 없이 이쁘다. 감동이란 울림은 자연의 창작일 것이다. 작년엔 물 한 방울이 아쉬웠던 표범폭포라 얼마나 건조했던가!
명년 이맘때도 오늘처럼 표범폭포는 얼음장 같은 냉침으로 나의 오만을 일깨우고, 앵초는 하늘문을 여는 기도자세로 토치카에서 나를 맞을까? 앵초꽃을 든 앳된 소녀의 뒷모습과 나비부인의 꽃밭 소요를 재회할 수도 있을까? 오늘은 참으로 아름답고 뿌듯한 산행이었다. 나는 그런 꿈을 꾼다는 것만으로도, 산이 안겨주는 감동에 행복해진다. 그리고 그 낭만적인 욕망 땜에 다시 산을 찾는다.
2023. 05. 18
# 참나무 숯고장이란 신탄(薪炭)지명에서 연루된 '방고래'는 온돌방 구들장 밑으로 불길과 연기가 통과하는 고래 - 즉 '큰고래'에서 고대산의 지명이 유래한다. 불원간 신탄진역에 열차가 래왕하면 고대산을 찾는 산님들이 하 많을 텐데 청정지역이 어찌될랑가 궁금해진다. 그때도 고대산이 한 포기나마 피어내는 앵초가 번성은 커녕 어찌 연명해 갈지 아찔해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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