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산(高臺山)자락의 봄소식
고향친구 J가 아침에 전화호출을 한다. 고대산바람 쐬러 가자고-. J의 산바람이란 건 등산이 아니라 산자락에서 산나물을 뜯으며 어슬렁대는 일상탈출의 한량놀이다. J는 연천과 철원접경지역에서 군복무(포병)할 때 고대산에서 훈련을 한데다, 전역 후에도 의정부일원에 살고 있는 터라 연천`철원의 지리에 밝다. 재작년에 한탄강고석정 트레킹할 때 고대산훈련얘기를 해줘 나중에 나 홀로 고대산등정을 하기도 했었다.
오늘은 고대산산자락의 두릅을 채취하자니 나로썬 쌍수 들고 따라나선 나들이다. 그는 연예계엑스트라 조합총무에다 온갖 장사를 한 다방면의 스팩으로 입담 좋은 한량이다. 내가 그를 한량이라 하는 건 서둘지 않는 느긋한 생활패턴의 낙천적인 세계관을 갖고 있어서다. 그는 소주 한 병에 시간을 담아 즐기는 낭만이스트이다. 굼뜬 행동에 힘든 건 안하는 탓에 등산은 엄두도 안낸다. 산행친구로 좋을 텐데 나는 늘 그게 아쉽다.
2시간 반을 달려 신탄진역 앞에 내린 우린 곧장 산자락을 파고들었다. 키 작은 소나무들이 듬성듬성 서있는 엉성한 초지는 예전엔 산밭이었지 싶었다. 뒤따르던 J가 ‘달래’가 있다고 땅을 헤집어 판다. 달래는 모듬살이 하는 식물이라고 나더러 주위를 살펴보란다. 아닌 게 아니라 여기저기 띄엄띄엄 잔챙이 달래무더기가 보이고 그 속에 굵은 놈도 있다. 나도 신이 나서 정전가위를 꺼내 달래뿌리까지 파낸다. 산달래를 캐다니! 튼실한 놈을 코끝에 대봤다. 알싸하고 독특한 향이 코끝은 후볐다.
얼추 한주먹은 캤지 싶다. 골짝깊이 들어서자 두릅나무가 하나둘씩 나타난다. 허나 이놈들은 새싹봉오리를 바짝 오므린 채다. 넘 빨리 왔단 생각이 들었다. 잔챙이 두릅나무가 여기저기서 인사를 하는데 정작 꺾을만한 새순은 없다. 아니 싹둑 모가지 끊긴 놈이 눈물(?)머금은 채 하나 둘씩 나타난다. 벌써 누군가가 채취한 흔적이었다. 우린 낭패감에 주춤대다가 이삭줍기라도 하자고 골짝을 파고들었다.
어쩌다가 한 놈씩 새싹 피어올린 놈이 나타나면 인정사정없이 가위로 싹둑 잘라낸다. 그게 놈과 나의 인연이라면 악연이다. 놈은 나의 식욕을 위해 엄동설한을 이겨낸 재수 옴 오른 신세였다. 그렇기에 나는 놈의 모가지를 자르는 걸 즐기는 게 아닌가! 그때 어떤 아저씨와 마주쳤다. 인적 없는 적막산골에서~? “에이, 이 양반이 다 땄구먼, 많이 땄어요?” 라고 J가 아쉬움과 비아냥끼 다분하게 물는다.
그러자 아저씨 왈, “나보다 먼저 훑어간 사람이 있어요. 다 따버려 헛걸음 했네요” 라고 하면서 배고파 보이는 비닐봉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J가 응수한다. “짊어진 가방엔 뭔데요?” “두릅이면 얼마나 좋게요. 점심가방이요. 점심이나 먹었소?” 아저씨는 우리의 행선지인 능선 반대편에서 훑어오는 모양세였다. J가 오늘 헛걸음 하게 생겼다면서 궁시렁댄다. 한 끼니 먹을 거야 딸거라고 자위하면서 예정대로 능선을 넘자며 선도한다.
우린 이삭줍기하며 능선에 올라 점심자릴 폈다. 한번 훑어버린 곳은 1주일 이상 지나야 지금 싹트는 놈을 꺾을 수 있단다. 그는 하나도 못 꺾어도 언짢은 내색을 하거나 신경질 낼 위인이 아니다. '이런들 어찌하리 저런들 어찌하리'라고 낙관적인 J특유의 ‘하여가타령’에 나도 맞장구를 친다. 어영부영 능선을 올랐다. 봄바람소릴 반주삼아 우린 끼니를 때웠다.
1시간 남짓 빡센 산허리를 이 잡듯 후빈 참이라 빵과 과일, 두유로도 맛깔 난 소풍자리가 됐다. 그때였다. 저만치서 각시붓꽃 세 송이가 살랑살랑 인사를 하는 게 아닌가! 얼른 일어서 놈한테 갔다. 두세 송이가 짝을 이뤄 몇 군데서 활짝 웃고 있다. 청초한 각시붓꽃은, 특히 산에서 피는 놈은 우아하기 이를데 없다. 나는 붓꽃 중에 각시붓꽃을 젤 좋아한다. ‘기쁜 소식’ 또는 ‘부끄러움’이라는 꽃말의 각시붓꽃을 마주쳤으니 오늘 일진은 좋을 듯싶다고 흥얼댔다.
‘애기붓꽃’이라고도 부르는 놈은 햇빛 살짝살짝 드는 외진 양지에서 미소 짓는 ‘각시’같아서 각시붓꽃이라 한다. 봄의 전령사처럼 수줍고 다소곳한 각시붓꽃은 3~4㎝크기의 꽃잎 안에 암`수술을 품고 있는 모습이 신비한 그림같다. 꽃이 지면 타원형의 갈색열매가 맺고 그 속에 살짝 반짝거리는 검정 씨가 들어 있다. 놈은 하도 예쁘고 고상해보여 화분에 옮겨 완상하기도 한다. 뿌리와 잎은 흑호마(黑胡麻)란 한약제로 쓰인다나.
각시붓꽃과 헤어지고 능선을 타다 기이하게 생긴 참나무 몇 그루와 조우했다. 백여 살은 훨씬 넘겼을 놈들은 어째서 저리 기괴한 모습을 하게 됐을까? 라는 상상에 빠져들게 했다. 아마 소싯적의 상처가 아문 형극의 상징일 터다. 고대산정상에 서면 백마고지가 저만치인 철원이라 6.25때 치열한 전투의 상체기가 도처에 남아있을 테다. 그런 트라우마를 삭혀온 일생을 참나무는 생생하게 입증하고 있음 같았다.
더구나 어떤 놈은 겨우살이와 공생을 하고 있다. ‘겨우살이’는 어렵게 부대끼며 끈질기게 살아가는 겨울나기[과동, 過冬]삶을 은유함일 것이다. 겨울철 허공에서 깨벗은 참나무가지에 기생하는 겨우살이는 한 폭의 수묵세밀화다. 크리스마스에 겨우살이 풀 아래에서 키스를 하면 연인이 되든지 나아가 결혼을 하면 행복해진다는 서양의 속설은 지금도 미쁘며 기원한다. 더는 참나무겨우살이 크리스마스트리 아래 서있는 상대에게는 아무나 키스를 할 수 있단다.
참나무를 게르만족은 신목(神木)이라고 신성시했다. 또한 드루이드들은 참나무(oak)를 신성시 여겨서 종교제의를 올리는 장소나 성소로 삼았고 특히 드루이드들은 죽음과 부활의 상징으로 참나무겨우살이를 신성한 나무로 삼았다. 겨우살이의 끈끈한 점액질열매는 새들이 먹이로 선호하는데 그 점액질이 새부리에 묻거나 배설물에 섞여 나뭇가지에 달라붙어 기생 번식한다. 점액질엔 비스신(viscin)이란 강력 접착제가 있어 나뭇가지에 닿기만 하면 찰싹 달라붙는단다.
겨우살이는 '흡기'라는 빨대기생뿌리(기생근)를 숙주나뭇가지에 박아 물과 양분을 빨아 먹는다. 겨우살이의 기상천외한 생존전략이 신기할 뿐이다. 겨우살이가 희귀한 비스코톡신(viscotoxin)이라는 물질을 다량함유하고 있어 항암치료, 전이감소, 통증감소, 식욕촉진, 피로회복, 수면촉진 등 입맛을 돋우는 약재로 쓰인단다. 영험하기도 한 참나무겨우살이는 오래된 고목에서 기생하나 싶다.
자연의 신비는 알면 알수록 경외와 감탄에 이르고 그래 치유의 순간에 머물게 한다. 산달래 한주먹과 두릅도 꽤 땄으니 헛걸음 하진 안했다. 아니 너무 청초해서 안쓰러운 각시붓꽃과 행운(?)의 인연을 기대할 수 있는 참나무겨우살이를 조우했으니 오지게 일당을 챙긴 셈이다. 거기다 산행이 주는 건강과 치유의 시간은 자연의 덤터기 서비스 아닌가! 고대산이 철쭉으로 한창이다. 수일 내로 고대산철쭉을 탐닉하러 와야겠다. 2023. 04.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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