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황의 날’ 낙성대 소요
그리 앙칼진 혹한(酷寒)도 흐르는 시간 앞에선 몸을 낮춘다. 나흘 전(4일)이 입춘(立春)이어선지 영상의 날씨가 이어진다. 오늘 봉황들이 봉천동 ‘더블미트’에 모였다. 코로나팬데믹 탈출이라 더욱 밝은 얼굴들이라. 게다가 고향이란 디엔에이를 공유한 스무 명이 붙어 앉으니 웃음꽃 만개한 잔치마당이 됐다. 더블미트여사장은 먹거리를 왕창 퍼내주고~! 좀 늦게 온 덕금이와 양금이와 경숙이가 허리를 굽힌 채여서 안타까웠다.
누군가는 귤 보따리를 들고 오고, 명남인 금 일봉을 밥값에 보태고, 재원인 커필 대령하고, 류종중이는 4월 벚꽃놀이에 초대장을 보낸다. 103살의 모친을 모신 성광인 복 받아선지 팔팔한 꼰대고, 부덕인 총무가 천직인 듯 신바람이 났다. 봉황 스무 명 모습에서 반세기도 훨씬 지난 동구(洞口)의 정자와 팽나무거목이 아른댄다. 엊그제가 보름이였는데 옛날엔 동 트자마자 옆집 친구를 불러 ‘왜~?’하고 대답하면 “네 더우~!‘하며 더윌 팔고 뺑소니쳤던 광경이 눈에 선하다.
보름날밤 잠자면 눈썹에 써가리 슨다는 어른들 경고에 뜬 눈으로 날 새고, 쥐불놀이하다 멜급시 개울 건너 사장매 청년들과 돌팔매싸움이 붙어 어느 해엔 부덕이 큰 오빠 이마에서 피가 흐르던 정경이 지금도 겁난다. 오늘 같은 봉황모임이 아니면 옛 추억들을 생생하게 소환하여 마음 찡해 질랑가? 곱디고운 얼굴에 생긴 깊은 주름살은 다 추억저장 탓이지 싶다. 성환이는 4월8일에 다시 여기서 만나잔다. 어디 큰 대청이라도 빌려 한 방에서 모두가 희희낙락대며 밤 새웠으면 좋겠다.
나는 차원이, 명구, 영선, 성광이와 낙성대(落星垈)를 찾아 오후 한나절을 뭉갰다. 촌수도 까마득한 할아버지 강감찬을 기리려기 보단 공원을 소요하며 이빨을 돌려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아서였다. 강감찬(姜邯贊)은 서기 948년 금주(衿州;서울 관악산일대)태생으로, 고려 개국공신(開國功臣) 삼한벽상(三韓壁上) 강궁진(姜弓珍)의 아들이다. 설화에 의하면 강궁진이 밤늦게 귀가하던 중에 여인으로 둔갑한 여우와 눈이 맞아 살을 섞는 불꽃속에 생긴 아들인데, 그때 하늘에서 문곡성(文曲星)이 내려왔단다.
문곡성은 북두칠성의 4번째 별로 문(文)과 재물을 관장하는 별이라 그 생가를 낙성대(落星垈)라 부르게 된다. 하여 강감찬의 어머니가 여우라는 얘기가 전래됨이다. 어느 날 송나라 사신이 그를 보고는 “문곡성(文曲星)이 오랫동안 보이지 않더니 여기 와 있었네!”라고 경탄했다는 전설도 있다. 중국에서 문곡성은 판관 포청천의 화신을 말한다. 그 문곡성이 고려에서 태어났으니 바로 강감찬 장군이라!
강감찬은 체구가 왜소했으나 비범하였고, 983년(성종2) 36세에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 예부시랑이 됐다. 이때 거란은 똥구녕이 근질근질 하면 고려를 침공했다가 별 실익도 없이 물러가곤 했다. 1010년 거란의 성종이 40만 대군으로 다시 침입하자 강감찬은 하공진(河拱辰)으로 하여금 적을 설득하여 물리친 지장(智將)이기도 했다. 또 1018년 12월엔 성종이 소배압(蕭排押)에게 1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하라고 명한다.
강감찬은 상원수(上元帥)가 되어 20만 군대를 이끌고 흥화진(興化鎭)으로 나아가 기병 1만2천을 매복배치 하여 타격한다. 그리고 흥화진 앞의 냇물을 소가죽을 꿰어 막아 거란군이 안심하고 건널 때 열어 수공(水攻)작전을 폈다. 혼비백산한 소배압의 거란군을 요소요소에 매복시킨 기마병의 기습으로 작살을 내어 패퇴시켰다. 도망가는 패잔병을 맹렬히 추격하여 거의 몰살시킨 전투가 ‘귀주대첩’인데 을지문덕의 ‘살수대첩’과 이순신의 ‘한산대첩’과 함께 울`나라 역대전쟁 중 3대첩으로 회자된다.
귀주전투에서 패배한 소배압은 갑옷과 무기까지 버리고 죽기 살기로 압록강을 헤엄쳐 구사일생하여 성종 앞에 무릎 꿇자 왕은 “네 낯가죽을 벗겨 죽여 버리겠다.”며 노발대발했다. 고려현종은 친히 영파역(迎波驛)으로 나가서 강감찬을 영접하며 금화8가지를 꽂아 주었다. 그 이듬해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났다가 1030년 왕에게 청하여 성을 쌓고 문하시중이 된다. 이 승전기념의 영파역이 후에 흥의역으로 개칭되고 역리는 지방관리 관대(冠帶)를 받았다.
후에 늙은 강감찬은 수차례 은퇴를 청원했으나 현종이 지팡이까지 하사하며 만류하였고, 1030년에 문하시중에 올라 2년 후 84세에(덕종 원년) 죽었다. 생전에 받은 작위는 남작에서 진작된 후작(侯爵)이다. 분봉된 봉지는 천수현(天水縣). 아마 한국사에서 가장 유명한 후작일 듯싶고, 진주 강씨 인헌공파의 파조가 된다. 강감찬의 일생은 청빈생활로 점철돼 후세에 추앙되어 많은 일화가 구전되고 있다.
강감찬이 판관 때 한양에 호랑이가 많아 백성들이 호환(虎患)에 떨었다. 글자 강감찬은 편지 한 장을 써 아전에게 주며 말하기를, “북문 밖 북동에 가면 늙은 중이 바위 위에 앉아 있을 것이니, 네가 불러서 데리고 오너라.”고 명했다. 아전이 북동에 가보니 과연 바위에 중이 있어 데리고 왔다. 그 중한테 강감찬이 엄중하게 타이르기를 “너는 빨리 무리를 데리고 멀리 가거라.”했다. 중이 머뭇대자 강감찬이 노하여 일어서는 순간 중은 호랑이로 변하여 사라지고 한양에도 호랑이가 더는 나타나지 않았다. 는 일화도 있다.
“대단하도다. 하늘이 이 백성을 사랑함이여. 국가에 장차 화란이나 패망이 올 때에는 반드시 세상에 이름난 현인을 낳아 국가의 화란이나 패망을 위하여 대비하는 것이다. 기유(1009)년, 경술(1010)년에 역신이 난을 꾸미고 강한 적국이 와서 침략하여 내부의 분쟁과 외적의 화란으로 국운이 위급하게 되었으니 이때에 강공(姜公)이 없었더라면 어떻게 나라를 다스렸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공이 조정에 들어와서는 국가의 모의에 참여하고 밖에 나가서는 정벌을 맡아, 화란을 평정하며 삼한을 회복하여 종사와 생민이 길이 힘입게 되었으니, 하늘이 낳아서 이 백성의 화란과 패망을 대비한 이가 아니라면 그 누가 능히 이에 참여하리오. 아아, 성대하도다.” - <고려사절요> 현종 22년, 강감찬 졸기의 사관 논평 -
# 오늘 봉황의 날에 기꺼이 날아와서 즐거운 시간 보내게 해준 스무 분의 봉황들이 고맙고 자랑스럽다. 이 글을 쓰면서 실명을 사용함을 여간 주저했으나 한 대 주어터질 각오를 했다. 글고 존칭도 생략했다. 넓은 아량을 베푸시고 용인해 주시길 바란다. '더블미트'사장의 푸짐한 인심은 오늘도 감동먹게 했다. 더블미트에서의 스냅사진을 무단으로 퍼서 사용함도 포용해 주시기 바란다. 다음 벚꽃잔치 땐 더더욱 화사하게 꾸미고 나오셔 봄바람 일으켜 주시길 바라마지 않는다. 2023. 0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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