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봄 궁중문화축전' - 홍화문을 열다
어제까지 한라산엔 1000mm의 호우가 쏟아졌다나? 마른 땅을 적실만큼 내린 서울의 빗발은 오늘도 갈팡질팡할 참인가 싶다. 장우산을 받치고 집을 나섰다. 간헐적으로 내리는 빗발 속에 ‘어연례(御宴禮)’ 피날레는 행하겠지? 하는 기대 반 의심 반의 심보로 창경궁을 향했다. 4월28일부터 오늘까지 '시간여행-영조, 홍화문을 열다'라는 ‘2023년 봄 궁중문화축전’이 창경궁에서 열리고 있어서다.
이번 어연례축제는 180명의 ‘궁중 새내기’ 배우들이 6개 파트로 나눠 3시간여 동안 궁중회화, 궁중음식, 궁중무용, 궁중음악 등을 펼치는 체험행사를 한다는데 나는 오늘 마지막 날의 춘당지에서의 향연을 꼭 보고팠다. 창경궁에 들어서며 안내에게 “오늘 행사 합니까?”라고 묻자 “아마 취소됐다나 봐요”라는 시큰둥한 대답을 들었다. 우산을 받쳐 들어야하나마나 헷갈리게 부슬비가 바람 등을 타고 춤을 춘다.
통명전 툇마루에서 서성대는 새내기배우들한테 “오늘 공연해요?”라고 물었다. “취소됐다나 봐요” 여학생인 듯싶은 누군가가 알려준다. 그들도 보따리 싸는 품새였다. 창경궁 명칭 환원 40주년을 기념해 시민들이 직접 참여하는 축제행사로 신청자를 선발했는데 대부분 20~30대의 MZ세대란다. 궁중의례체험이란 특별한 콘텐츠라서 새내기배우들이나 일반인들의 관심과 기대는 여느 해 축제보다 더할 테다.
신록에 파묻힌 창경궁은 빗발세수 탓인지 한결 더 고즈넉하고 푸르다. 연둣빛에 덧씌우는 초록의 수목은 춘당지 마저 짙푸르게 한다. 금천을 흐르는 물길소리가 적요를 깨트린다. 통명전과 함인정과 경춘정과 문정전에 설치한 축전 가설무대가 포장이 뜯긴 채 비에 젖은 앙상한 받침목들이 처연하다. 며칠간 마련한 다과상음식 맛보며 걸 판진 피날레를 못한 채여서 설거지 하는 새내기들도 풀죽어 보인다.
창경궁 자리에 1909년 11월 1일에 일제는 나라를 빼앗긴 순종의 마음을 달랜다는 구실로 창경궁궐을 헐고 동물원과 유원지를 만들어 창경원으로 개장했다. 개원식에 모닝코트에 중절모를 쓰고 지팡이를 든 순종이 서양신사처럼 참석했으나 주최자인 이토 히로부미 통감은 5일전에 안중근 의사한테 저격당해 참석 못했다. 그 후 일제가 벌린 태평양전쟁이 패색이 짙어지자 그들은 동물들을 아사 내지 독살시킨다.
초식동물은 맹수들의 먹잇감으로 맹수들 우리에 넣어주고, 전쟁말기엔 폭격으로 맹수우리가 파손돼 사람을 해진다고 사살시키면서 철장창살은 무기용으로 뜯겼다. 명맥이라도 잇던 창경원은 6.25동란으로 초토화되어 동물원은 동란 후 정부, 기업체, 독지가들이 모은 기금으로 1954년 7월 15일 창경원의 동식물원이 개원했다. 기린은 17년 후에야 처음 들어온 늦깎이 대형동물이다. 당시 부호 박흥식(화신백화점)사장이 기증한 1만 달러로 기린 한 쌍을 일본에서 구입한다.
기린을 9월에 선박에 싣고 들여오다 태풍을 만나 암컷이 요동치는 배에 머릴 부딪쳐 죽고 수컷만 도착했다. 근디 흥화문 보다 기린 키가 높아서 사육사들이 기린 목에 매달려 머리를 숙여서 간신히 통과하는 진풍경이 장안의 화제였단다. 독수공방의 수컷에게 1년 뒤 암컷 한 마리를 일본서 구입 합사시켰는데 20일 만에 암컷이 목이 부러져 죽었다. 홀아비생활의 스트레스로 예민해진 수컷의 난폭성이 빚은 불상사였으리라. 놈도 3년 후 죽었단다. '모가지가 길어 슬픈 짐승이여!'란 탄식이 회자될 만했다.
돈화문을 나서며 거목느티나무가 연두 잎을 내밀고 2층 신문고자릴 넘보는 모습이 흡사 기린처럼 보였다. 목이 길어 슬퍼 보이는 기린이, 창경원의 비극적인 이주사가 문득 떠올랐다. 창경원에서의 생의 애환사가 기린뿐이겠는가? 오늘의 주인공 ‘홍화문을 열다’의 영조대왕도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아사케 했다. 그런 처절한 고뇌가 자기혁신을 가열 차게 했을까? 영조는 탕평책, 균역법, 서원정리, 신문고부활, 의례재현 등 문예부흥의 성군이 됐다. 2023. 05.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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