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숲 튤립(Tulip)에 홀리다
어제부터 단비가 내려 봄다운 날씨를 되찾더니 한식(寒食)인 오늘은 한식날답게 서늘하다. 춘추전국시대 진나라 진 중이(晉重耳)는 19년을 방랑생활하다 제나라에 정착해 공녀와 결혼하여 자릴 잡나싶더니 귀국하여 왕위에 오른다. 주위사람들이 그의 덕망과 능력을 높이 사 추대한 탓이다. 그는 진나라의 제24대 공작에 즉위하니 진 문공(晉文公)이다. 진 문공은 자신을 섬긴 충신들에게 포상을 했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개자추(介子推)는 빠져있었다.
섭섭한 생각이 든 그는 그런 자신이 부끄럽기도 해서 깊은 산중에 들어가 은거했다. 문공이 뒤늦게 그 사실을 알고 불렀다. 허나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개자추는 문공이 떠돌이생활로 굶주릴 때 자신의 허벅지살을 베어 바쳤던 충신이었다. 문공은 산중으로 개자추를 직접 찾아가 동행하길 간청하지만 응답이 없자 집에 불을 지른다. 밖으로 뛰쳐나올거라 여겼는데 초가집이 전소돼도 인기척도 없잖은가?
잿더미 속에서 홀어머니를 껴안은 채 죽은 시신만 수습할 수 있었다. 오호통제라! 문공은 이 비통한 날을 개자추를 애도하는 날로 정해 백성들은 절대 불을 지피지 말라고 선포했다. ‘불을 지피지 않고 찬밥을 먹는다.’는 불문율은 풍습이 되어 ‘찬 음식’ 먹는 날 - 한식날이 됐다. 오늘 같이 이슬비 흩뿌리며 서늘한 날씨에 세상 살판 난 놈이 있다. 튤립이다.
난 그 튤립이 피었는지? 과연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 서울 숲을 찾아들었다. 튤립은 서늘한 기온에선 꽃봉오리를 오므리고 단아하게 있다가도 온도가 살짝 오르면 꽃잎을 활짝 벌려 고혹(蠱惑)스런 자태를 유지한다. 말쑥하고 우아하며 어쩜 섹스심벌 같기도 한 튤립은 지구상에서 가장 센세이션한 사건을 일으킨 식물이란 생각이 들었다.
꽃대 쏙 뽑아올려 얹혀있는 꽃봉오리는 거만하기도 하고 앙증맞기도 한데 실상은 향기가 진하지도 않다. 더구나 애초의 야생화였을 땐 우아함도, 화려함도 별로였지 싶은 놈이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을 천당과 지옥의 나락으로 빠져들게 했단 게 미끼지 않는 역사적인 사실이었다. 아니 인간의 맹목성과 허욕의 실상을 까발린 우화(寓話)였지 싶다.
17세기 네덜란드 황금시기에 무역상들은 해외에서 꽃, 과일, 박제동물, 화려한 식기 등 각종 희귀품을 수입 짭짤한 재미를 봤다. 특히 아름답고 희소성 있는 꽃은 상품성이 뛰어나 부자들의 독과점이 되어 네덜란드 꽃시장은 투기 대상이 됐다. 알뿌리에 바이러스가 감염돼 특이하게 변종된 튤립은 부의 상징처럼 거래됐다. 1637년 튤립구근 하나에 3000~4200플로린에 거래됐다.
요즘 우리 돈으로 3000~5000만 원쯤 된다나? 튤립알뿌리 하나가 집 한 채 값이었다. 당시 잘 나가는 장인의 년봉이 300플로린이었다니 네덜란드사람들은 투기광풍에 미쳐 공황상태에 빠진다. 네덜란드 법원은 튤립의 재산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판결을 내리자 튤립가격 폭락으로 꿈도, 앞날도 폭망해 버린 거였다. 튤립의 원산지는 튀르키예다.
1593년에 네덜란드의 식물학자 클루시우스가 다양한 색과 번식개발로 네덜란드 전역에 튤립이 식재됐다. 변종튤립일수록 값비싸 400여 종의 품종이 개발되었으며 황제, 총독, 제독, 영주, 대장 등의 이름을 붙여 거래했다. 국토가 좁고 저지대인 네덜란드 주민들은 마당 한 귀퉁이에 튤립을 재배하며 횡재의 꿈을 꾸었던 것이다. 부자들의 투기장이 된 동인도회사의 주식은 돈이 없어 엄두도 못 내고 튤립재배에 희망을 걸었다.
그 튤립이 서울숲에 화려한 꽃밭을 일궈 눈호강을 시킨다. 집 한 채 값을 웃돌던 튤립이 쫙 깔려있어도 뉘 손끝 하나 대지 않는다. 어쩜 튤립꽃밭 앞에 거대한 공룡처럼 서 있는 주상복합아파트는 내겐 튤립 한 송이만도 못한 콘크리트 괴물일 뿐이다. 십 몇 억짜리 아파트보다 튤립 한 송이가 나를 기쁘게 한다. 하루를 행복하게 살고 싶걸랑 서울숲에서 튤립 콘테스트에 참여할 일이다. 지친 심신까지 치유해 준다.
2023. 04.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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