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산(開花山) 메타세콰이어숲길
정오쯤에 마곡나루역에서 친구C와 Y를 만나 일식집에서 초밥점심을 먹고 개화산을 향했다. C가 개화산둘레길 산책을 제안하자 Y와 나는 개화산행이 첨이라 의기투합했다. 개화산은 한강을 사이에 둔 방화동에 있는 높이128m의 야산으로 사방이 확 트여 임진왜란 때 정상의 봉수대에서 봉화(烽火)를 피운 군사요충지였다. 그래서 개화산(開火山)이라고도 했다는데 고유명사 개화산(開花山)은 신라시대 주룡거사(駐龍居士)의 일화에서 비롯된다.
주룡거사가 수양정진하다 열반한 후 그 자리에 꽃이 피어나서 개화산이라 했다. 처음 찾은 개화산은 주변이 신시가지화 돼서 많은 산님들이 찾는 탓인지 숲속의 산책길이 사통오달이고 정비도 잘 됐다. 우린 뭔 꾸꿈스런 얘깃거리가 그리 많았던지, 아님 거북이 한량걸음으로 시간 늘리기라도 할양으로 굼뜬 소요를 하고 있었다.
왕성한 이파리에 뭉텅 잘린 햇볕이 숲길을 밝히는 둘레길을 어슬렁대다 메타세콰이어숲에 들어섰다. 이열종대로 또는 삼열종대로 늘어선 메타세콰이어는 파란하늘을 가릴 듯이 꼿꼿이 서서 한량들을 맞는다. 훤칠한 놈들의 기개가 뿜어내는 피톤치드는 일상의 찌꺼기 한 톨도 걸러내는 테라피의 전당이지 싶었다. 시간을 붙잡아두고 싶은 메타세콰이어 숲길에서의 해찰~!
"걷기는 세상의 쾌락으로 이어지는 통로이다. 잠깐 쉬었다 갈 수도 있고, 내면의 평정도 찾을 수 있으며, 주변 환경과 함께 끊임없이 살을 맞대며 아무런 제한도 장애도 없이 장소의 탐험에 몰두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읊은 다비드 르 브르통의 <걷기예찬>을 곱씹게 한다. 브르통은 덧붙인다.
"모든 여행은 감각을 통한 전진이요, 관능으로의 초대이다. 행복한 감각들은 내가 존재하고 있음을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순간, 그곳에 있음을 수없이 확인시켜준다."라고.
우린 밴치에 앉아서 테라피 숲의 감촉에서 느끼는 관능적인 기쁨에 석양을 기다리고 있었다. 글고 무거운 궁뎅이를 일으켜 메타세콰이어숲길 아취형문을 나왔다.
그 아취목문을 석양보다 더 빨간 장미가 감쌌다. 5월은 장미의 계절이라던가! 그 장미의 달도 석양을 향하고 있다. 붙잡을 수 없는 시간의 냉정은 시니어들에겐 추억이란 선물로 포장한다. 그래 오늘 우리 셋은 추억 하나씩 품은 셈이다. 글고 브르통이 덧붙인 것처럼 나도 장미얘기 하나를 아까 두 친구와의 추억의 시간 끝에 덧붙인다.
오래 전, 프랑스에 구두쇠로 소문난 향수장사한테 ‘로사’란 고명딸이 있었다. 그녀는 자기 집 꽃밭일꾼 ‘바틀레이’란 청년과 눈이 맞아 열애중이다. 바틀레이는 아침마다 꽃밭에서 꽃을 따다가 향수를 만들었는데, 그중 젤 좋은 향수 한 방울을 모아 로사에게 선물하곤 했다. 그때 장미전쟁이 발발하자 바틀레이는 징집돼 참전하고, 로사가 애인이 했던 향수제조 일을 대신하면서 좋은 향수 한 방울씩 모은다.
전쟁에서 돌아올 애인에게 선물할 요량으로 애인의 귀향을 손꼽아 기다리던 어느 날, 전쟁터에서 배달된 상자 속엔 바틀레이의 유해가 있었다. 애인의 유해를 안고 애통해 하던 로사는 모아뒀던 향수를 연인의 유해에 모두 뿌려버린다. 이를 지켜보던 로사의 아버지는 버려진 비싼 향수가 아깝고 분하기도 해 홧김에 유해상자에 불을 질렀다.
순간 바람 탄 불길이 옆의 로사에게 옮겨 붙어 소사(燒死)한다. 그녀가 불타 죽은 자리에 새싹이 하나가 움트고 꽃을 피우자 사람들은 장미라고 불렀다. 피처럼 빨간 장미는 열정적인 사랑을 의미한다. 장미전쟁에 애인을 잃고 뒤따라 불길 속에 사라진 처녀 로사의 넋 장미꽃이 계절의 여왕 5월의 심벌처럼 만발했다.
고승이 열반한 자리 - 개화산에서 오늘 지기(知己)C와 Y와 함께 메타세콰이어 숲길을 소요한 희열은 빨간 장미처럼 진한 추억으로 새겨질 테다. 순정한 연인 로사와 바틀레이의 비련이 시공을 초연하듯 우리의 우정과 추억의 산책도 기억이란 시간 피안까지 머물지 모른다. 내일도 더 뿌듯한 추억 만들기를 염원해 본다. 행복한 하루였다. 2023. 05.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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