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릉 숲길 (국립수목원 - 광릉 - 봉선사)
엿새 전, 국립수목원에서 하루를 오지게 소요한 나는 아쉬움 털어내려 오늘 또 먼 발걸음을 땠다. 그날 국립수목원을 찾아가면서 봉선사에서 수목원까지의 광릉수목원로와 동무하는 데크길과 숲길이 연애질을 하면서 동행하고 있음을 알았다. 광릉숲길인데 울창한 숲속을 소요하는 트레킹코스는 사시사철 계절의 진수를 만끽하면서 명상과 치유를 하기 그지없이 좋다고 수목원 안내원의 예찬이 나를 더욱 달뜨게 했었다.
국립수목원 경내에 발도 내밀지 않고 광릉(光陵)을 향해 광릉숲길 - 데크길에 들어섰다. 47번 광릉수목원로를 줄곧 동반하는 데크길은 앙상한 겨울나목들의 퍼레이드 사열이다. 깨 활딱 벗은 겨울나무들의 민낯은 순수의 결정체다. 회색거목들이 수많은 잔챙이 가지들 위에 파란하늘을 걸쳐놓고 겨울의 순수를 농익혀 보인다. 간혹 바람이라도 한 마장 불면 파란하늘보자기를 흔들어 나를 망향의 노스탤지어로 만드는 거였다.
내 고향은 겨울이면 눈도 하 많이 왔었다. 파란하늘은 밤새워 하얀 세상을 만들곤 담날은 시리고 흰 순수에 스스로 홀려 낮게 내려온 하늘은, 꼬맹이들 눈싸움소리를 유난히 크게 맥놀이 하는 거였다. 여기 협곡속의 광릉숲길은 나목(裸木)들의 지줏대노릇이 없다면 파란하늘이 무너져 내릴 듯싶게 낮다. 47번 광릉수목원도로는 차량속도도 시속30km까지다.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몸 사려 자연동화를 꿈꾸라는 곳이다. 봉선사천 물길도 얼음장을 깨고 흥얼대며 흐른다. 얼음을 깨는 봄빛의 몽니를 달래나 싶었다.
개울물소리에 마른 갈대가 미동한다. 갈대의 파장이 바람이 되어 두루미목깃을 건들자 긴 다리를 살짝 들어 자릴 옮겨 비켜선다. 겨울의 진경 속에 광릉이 나타났다. 주차장의 차들만 아니었으면 그냥 지나칠 뻔했다. 재실(齋室)에 들렀다가 앙증맞은 연지(蓮池)를 훑으며 광릉홍살문을 향해 울창한 숲을 헤친다. 아름드리 전나무가 켜켜이 쌓아올린 세월처럼 높다. 홍살문을 통과 정자각에 올라섰다.
저만치 언덕에 있는 세조(世祖, 좌)와 정희왕후(貞熹王后, 우)의 묘는 정자각 밖에서 가이드라인을 쳤다. 왕과 왕비의 묘가 정자각을 두고 양편 언덕에 떨어져 만든 능을 동원이강(同原異岡)이라 하는데 광릉에서 비롯됐단다. 광릉은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권을 꿰찬 수양대군 - 세조와 정희왕후의 묘다. 세조는 자신의 묘에 석실(石室) 대신 회격(灰隔)으로 만들고, 병풍석(屛風石)도 두르지 말라고 해 공사비용을 절감하라는 경세의 왕이기도 했다.
직전(職田)법을 실시하고, 군비를 강화하며 경국대전(經國大典)을 편찬하는 등 왕권을 반석위에 올리는 선정을 했지만 계유정난을 일으켜 단종 폐위, 사육신과 수많은 인명의 희생을 강요한 폭군이었다. 나는 세조의 폭정을 경원한다. 포용보다는 척결을 우선하는 위정자는 고금을 털어 숭앙받지 못했다. 요즘 550여 년 전의 세조의 독불장군 넋이 꿈틀대나싶어 불안하다. 배려와 섬김의 정치가 아쉽다. 우람한 거목 전나무 하나가 우듬지가 없이 청정하여 놈을 디카에 담고 홍살문을 나왔다.
봉선사를 향하는 데크길에 들어섰다. 데크길과 만났다 갈라서다를 반복하는 숲오솔길은 출입금지딱지를 땐곳이 있어 올타구나 들어섰다가 질퍽수렁길이라 곤역을 치뤘다. 해빙 중인 동토(凍土)의 심술이라. 숲길엔 다양한 식물군이 분포돼 봄철개화기 부터선 멋진 산책길이 될 거였다. 더구나 고엽식물들이 대게 이름표를 달고 있어 숲을 익히는 알찬 트레킹코스가 될 듯싶었다. 암튼 날씨가 싸한데 산책객들이 상당히 많다. 조용한데다 걷기 편한 코스여서일 것이다.
봉선사(奉先寺)에 들어서자마자 입구 우측의 부도밭을 찾았다. 거의가 다 근대 봉선사를 반석에 올린 선사들의 부도였는데 춘원 이광수의 비도 있어 검색을 해봤다. 춘원은 금강산 답사길에 월하스님을 만나 <법화경>에 심취하고, 월하의 사촌형인 운허스님에게서 불교사상을 해찰하여 불교소설 <원효대사>, <꿈>을 저술하고 대장경 역경에도 일조하게 된다. 그런 소이로 춘원추모비가 봉선사에 세워짐이라. 춘원이 친일에 앞장서지만 안했다면 위상은 어찌 됐을까!
운허(雲虛, 1901~1980)스님은 상해흥사단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30세에 동국대 역경원장으로 부임하여 여기서 대장경의 한글번역을 했단다. 현재는 월운스님이 역경사업과 한글서당을 운영하면서 젊은 인재배출과 교학불교로 봉선사의 학풍을 드높인다. 봉선사의 일취월장은 생불조사들의 법력에 힘입음일 테다. 봉선사사찰은 심산유곡의 고색창연한 기존 사찰과는 좀 다른 불교의 현대화를 읽게 한다. 특히 목재가 아닌 시멘트건축물인 대법당에서 자못 운치가 다르다.
“종소리 사바세계에 울려퍼지매 참답고 진실한 교법이 일어나느니
이 종으로써 하루 여섯 번씩 울려 경계하노라
어찌 도 닦는 사람만이 자신을 성찰할 것인가
저 육도 중생에게는 괴로움이 그치는 소리 되리라” - 동종에 새긴 강희맹의 글 -
위글은 시문서화가(詩文書畵家) 강희맹(姜希孟)의 명문으로 명필 정난종(鄭蘭宗)이 봉선사동종(奉先寺 銅鍾)에 글씨를 썼다. 하여 나는 17대고조인 희맹 할아버지로 인해 봉선사동종에 관심이 많았던 거다.
“추충(推忠) 정난 익대공신(定難翊戴功臣), 숭정대부 행형조판서 겸 경연지사 진산군 신 강희맹은 교지를 받들어 찬함”이라 전제한 <봉선사 종명병서(奉先寺鐘銘幷序)>명문이다.
동종의 격조 높은 문장과 유려한 글씨의 조화는 빼어났으며 하루 여섯 차례씩 종을 쳐서 중생을 구제하고자 염원하였다. 1469년에 세조의 아내인 정희왕후가 세조를 추모하며 봉선사를 89칸 규모로 중창하였던바, 예종이 아버지인 세조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조를 추모하며 현판을 직접 써 걸어주고, 왕실 발원으로 만든 종이 봉선사동종(奉先寺 銅鍾)이다. 동종은 광릉의 '능침사찰'인 봉선사에 소장되어 있으며 현재 대한민국의 보물 제397호이다.
나는 강희맹이 나의 17대조여서 동종에 새긴 명문을 친견 하고팠던 것이다. 봉선사는 한국의 5대 명산인 금강산, 구월산, 지리산, 묘향산과 함께 경기도 운악산 자락에 있다. 고려 광종 때(969) 법인국사(法印國師) 탄문(坦文)이 창건해 운악사(雲岳寺)라 했는데, 조선조 예종이 세조의 위업을 기리고 능침을 보호하기 위해 세조의 비 정희왕후와 불교중흥정책을 펴면서 교종의 우두머리 사찰(敎宗首寺刹)로 전국사찰을 관장하는 봉선사(奉先寺)로 중수하였고 승과고시인 교종시(敎宗試)를 열었다.
그래선지 사찰 내엔 기도드리는 스님과 신도들, 많은 관광객과 동분서주하는 보살님들이 활기찬 모습이 역력했고 목하 불사도 한창이었다. 사찰 앞 연지는 꽁꽁 얼었는데 해동하여 연꽃이 만개하면 봉선사는 인파에 휩싸인단다. 종각 옆 뒷산을 오르는 등산로가 선명하게 꿈틀대고 있다. 스님들이 사찰 뒷산에서 행선(行禪) 내지 치유산행 하는 길인가 싶은 궁금증이 모락모락 피어 도둑고양이처럼 올랐다.
긴장감 속에 한참을 올라도 인적이 없어 불안하기도 했지만 봉선사 바로 밑에 있고, 뚜렷한 등산로는 울창한 소나무 숲속의 삼림욕장을 파고드는 듯싶었다. 근디 일정한 간격으로 山자 새긴 작은 표식돌이 등산로에 일정한 간격으로 박혀있다. 훤칠하게 잘 자란 소나무 숲은 죽은 듯이 적막한데 등산로는 반시간여를 행군해도 종잡을 수가 없다. 참으로 멋진 소나무숲길이다. 처음엔 국립수목원을 잇는 비밀(?)길인가 싶었는데~?
그만 빠꾸할까? 고심하던 참인데 안내판이 보인다. 출입금지란다. 크낙새를 비롯한 식생보호를 위해 통재하오니 무단출입자를 발견하면 신고해 줄 것을 당부하고 있었다. 얼른 되돌아 서둘러 빠꾸했다. 경고안내판을 세우려면 입구에 세울 일이지? 누굴 범법자 만들려고 환장을 했나? 독백하며 봉선사로 내달렸다. 지금도 알 수 가 없는 건 출입금지구역치곤 산길이 닳고 닳았다는 점이다. 도대체 누가 뻔질나게 다녔단 말인가?
산림청 내지 수목원에서 정기 순찰하는 코스일까? 모르면 몰라도 스님들도 산책길로 애용하지 싶었다. 행선하기 그만인 산길이었다. 설마 스님들을 범법자로 처벌하진 않을테니 산책 겸 행선길로 애용하리라. 암튼 귀신에 홀린 산길일까? 궁금증 속에 봉선사 앞 주차장에 닿았다. 오후4시 반이 지나자 기온이 뚝 떨어진다. 한시간거리인 서울의 날씨와 확연히 다르다. 서둘러 귀가 길에 올랐다. 늦봄에 다시 찾아와 이름표만 단 식물 얼굴들과 인살 나눠야겠다. 막바지 한파를 잘 이겨 내거라. 2023. 02.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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