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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사람아

두 장의 사진 앞에서

두 장의 사진 앞에서

내가 가지고 있는 헬 수 없을 사진 중에서 애틋하고 소중하게 간직하는 두 장의 사진이 있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쯤의 사진과 세 살 땐가의 사진인데 켜켜이 흐른 세월을 갈무리하느라 누렇게 바랜 걸 얼마 전에 사진관에 맡겨 새롭게 복원했다. 그렇게 복원한 두 장의 사진을 책상머리에 안치하고 마주하는 일상은 미처 생각지 못한 감정의 순화란 묘미에 들게 했다.  사진 속의 두 분 - 오래전에 작고하신 나의 부모님이신데 어떤 땐 앨범 속에서 튀어나와 살아있는 듯 대면하는 순간은 형용할 수 없는 회한의 여울에 젖게해 처연해진다.

원각사십층석탑과 팔각정 앞의 선친님, 석탑은 국보제2호로 지정 돼 지금 종로2가 탑골공원유리벽 속에서 보호 받고 있다

이 사진을 기억하는 사람은 지금 누님 셋뿐이다. 세 분 누님마저 연세가 80후반이라 빛바래고 토막 끊긴 기억을 땜질하며 소환하는 애석함이었다. 어머님은 설흔아홉살에, 아버님은 마흔여덟에 나를 얻으셨단다. 딸 아홉 명을 낳으시고 늦둥이로 얻은 아들이었다. 그 외아들이 부모님 생전에 효도는커녕 젊은 날의 유일한 사진마저 앨범 속에 묻어두고 살다가, 당신네보다 더 늙어서야 책상머리맡에 모셔 애틋해하고 있으니 불효막심이라. 어머님께서 나를 안고 앉아계신 대나무평상은 내 기억에 없다. 용모 수려한 어머님이 어째 우측 눈이 쳐진 것 같아 누님들께 연유를 물었으나 알 수가 없단다.

검정멜빵바지를 입은 나는 세 네 살쯤일 거라는데 사진기에 다소 놀랜 듯싶고, 이목구비가 또렷한 모습은 초등학교입학전의 유일한 사진으로 신기한 기분이 든다. 아버님 사진도 누님들의 어림셈으로 40대 후반쯤으로 기억했다. 아버님께선 한양(서울)에 두 번인가 가셨는데 탑골공원 원각사지십층석탑 앞의 사진은 해방이듬해 이승만과도정부에서 주는 상(賞)을 받으러 가서 찍은 모습일거란다. 상장과 포상(훈장 비슷했단다)을 받으셨는데 훈장은 막내누님이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도 봤다고 기억하고 계셨다.

세 네살 무렵 어머니 품에서의 필자. 최초의 사진이다

내가 좀 일찍 정신 챙겨 부모님생전의 일화(逸話)들을 친족들로부터 구전(口傳) 듣지 못할 걸 후회한다. 아니 부모님 전에 불효를 고백하지 못했음을 용서받고 싶다. 아버님은 오형제의 막내로 한학(漢學)을 수학한 강씨문중(姜氏門中)의 유학자(儒學者)이셨다. 영광향교(鄕校)장을 지내셨고, 불갑초교 사친회장과 면의원, 6.25전란 땐 불갑산에 아지트(빨치산 지리산본부와 불갑산지부)를 둔 빨치산과 대치한 국군과의 경계 속에서 주민보호를 하느라 애쓰셨던 일화를 친족들로부터 심심찮게 들었었다. 강문의 유망주들은 그때 좌우익 갈등에 거의 희생되어 암울한 침체기에 빠졌으며 어린 우리들의 앞길에도 깊은 트라우마로 분노케 했다. 

늦둥이 외아들이 혹여 버릇 나빠질세라 엄격하셨던 사랑은 내가 초등6학년 때 광주서중학교 입학을 위해 담임선생님께 부탁 개인과외수업을 받게 했던 선지자(先知者)이셨다. 정oo담임선생님은 하숙하고 계셨는데 나를 동숙(同宿)시켜 개인교습을 해주셨지만 소기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나는 그때의 경험으로 나의 자식한테 면학에 대한 강박관념적인 무리수를 지양하려 고심했다. 공부는 맑은 정신으로 하고 싶은 시간에 쌈박하게 정진해야 효율적일거란 걸 절감했던 것이다. 암튼 나의 아버님은 당시 피폐한 농촌에서 상당히 깨우친 선지자이셨다.

큰어머님

어머님은 무학으로 한글문맹이셨다. 지아비 모시고 자식들 잘 키우며 살림살이 잘하는 게 현모양처인 여자의 일생을 한순간도 잊지 않고 살아내신 전형적인 촌부(村婦)이셨다. 그렇게 훌륭하신 부모님의 은혜를 오롯이 받고 성장한 나는 단 한 번도 효도다운 효도를 생각도 못하고 여의었다. 이제 후회한들 소용 있나? 두 장의 사진은 그런 나를 부끄러움으로 속박한다. 시간의 무한대 앞에서 나의 시간도 끝이 올 거란 걸 상상했을뿐 절박하게 예측해보지 않았던 것이다. 시간은 절대 기다려주질 않는다.

나의 시간은 한정 없이 널려있어 웬만큼 허투루 써도 아무렇지 않다는 듯 방기한 삶이 뒤늦게 아픔으로 옥죄어 왔다. 내가 내 자식들을 위해 나의 부모님이 내게 베푼 열정만큼 열심히 살았을까? 긍정할 자신이 없다. 하여 이 순간에 충실하라고 충고하고 싶다. 행복의 순간이 내일도, 또 다시 올 거라고 예단하며 적극적이지 않는 생활의 자세는 후회를 수반한다. 애들이 지금 걱정 없는 듯 살아가는데 있어 나의 역할은 2할 정도 됐지 싶다. 부모는 세상에서 자식들에게 제일 중요하고 위대한 스승인데 말이다. 부모님! 이제부터라도 주신 몸 소중이 챙기면서 세상에 누 끼치지 않는 삶 꾸리겠습니다. 영면하십시오.            2022. 08

1980년대 어느 날, 생애 최초로 구입한 한옥 마루에서
어느해 겨울방학 평창리조트에서의 울 가족
필자의 최근 저서 <숲길의 기쁨을 좇는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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