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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감-그 미지?

영영 잊을 번한 외사촌삼형제의 해후(邂逅)

영영 잊을 번한 외사촌삼형제의 해후(邂逅)

차이797플러스의 내부와 울`외사촌 삼형제가 두어 시간을 뭉갯던 룸의 뷰

후덥지근한 날씨였다. 장마꼬리를 물고 북상하던 태풍이 일본열도로 빠져나가는 여진일 테다. 울`나라를 비껴가 다행이라. 나는 기대감과 설렘 속에 집을 나서 미아사거리전철역을 향했다. 오후1시에 외사촌형님 O와 동생 I를 만날 참이라. O형님을 뵌 지 십여 년도 훨씬 지나쳤지만 수려한 용모와 인자한 모습은 가물가물한 기억 속에 차환시킬 수 있으나, I동생은 한 번도 대면한 적이 없어 궁금했다. 약속장소인 H백화점 9층의 중식당 차이797플러스에 들어서 안내를 받았다. 홀 끝 아담한 방에서 먼저 도착한 O형님과 I동생이 나를 반겨줬다.

무슈포크 & 탕수육

O형님은 좀 수척해 보였지만 고운자태와 청음(淸音)은 그대로였다. 형님이 동생I를 나와 상견소개 했다. 미남에 듬직한 중년의 신사 I는 인상까지 좋아 단박에 호감이 갈 정도였다. 왠지 미안했다. 가까운 피붙이인 외사촌 형에게 십 수 년 동안 문안드리지 안했고, 이종동생은 노인이 돼서 대면했으니 외톨이 삶을 즐긴(?) 나의 각박한 처세일 망정 면목 없었다. 그런 자괴감도 순간적인 채 외사촌삼형제는 금방 격의 없이 파안대소 했다. 피붙이라는 디엔에이가 이심전심에 불 댕겨서였을까. 깔끔한 음식은 소량인데다 분위기도 오붓해 마음 편하게 회포를 풀 수가 있었다.

양쟝피 & 해물탕

오늘의 호스트는 I동생이지 싶었다. 미리 주문했던지 음식서빙이 자연스럽게 이뤄지고 있었다. 60대 후반인 그는 서울서 S대를 졸업하고 기업은행에 입사 정퇴하여 공인중개사무실 운영한지 10여 년째란다. 함평촌놈이 성공한 삶이라. 성실성이 물씬 풍겼다. 그래 보다 일찍 상봉치 못함이 안타까웠다. 나는 I의 자태에서 이모부님을 연상했다. 내 어릴 적에 몇 번 뵌 적이 있어 아스라한 기억을 더듬었다. 영판 닮았다. 과묵하고 무던한 심지도 판박일 것 같았다. 이모부님보다는 이모님이 더 활달했지 싶다. 동그란 얼굴의 미녀였던 이모님은 우리집엘 자주 오셨는데, 요즘 태어나셨다면 뭔가 쌈박하게 즐기는 삶을 살았지 싶다.

유산슬 & 짜장면

사돈어른 초상 때였을까? 나는 I동생의 고향집은 두 번인가 찾아간 기억이 있다. 들판 한가운데의 꾀 큰집과 어수선했던 상가 집 분위기가 퍼즐조각처럼 뇌리를 스친다. 늦게나마 오늘 I를 만난 건 행운이다. 그 행운을 O형님이 선사한 게다. 아무 까닭 없이 소식 두절한 내가 한 달 전쯤 카톡 안부를 띄운 게 소통의 끄나풀이 됐고, 형님이 그 끈 바늘귀에 I동생을 끼움이라. O형님은 지금도 귀공자 같았다. 어찌하여 한의원을 하실 때 나는 보약을 두 번인가 주문복용하곤 형님네 혼사에 바쁘단 핑계로 아내만 참석한 후 소원해졌었다. 몰인정한 나의 성품 탓이라. 친분도 어찌하다 소식 뜸해지면 안부 여쭙기 민망하여 다음에, 다음에 하다 요원해져 절연(?)되는 예가 많다.

왕년에 한의원였던 O형님이 손수 조제한 강장제 홍진원과 소화환을 선물했다. 슬하에 2남을 둔 형님은 장남을 한의사로 개업케 하는 꿈을 이뤘고, 그래 장남이 운영하는 한의원에 한약을 조제하여 치료케하며 노익장을 즐기고 계신다고 했다

 O형님과 익산의 J형님과의 소식두절도 변변치 한못 내탓일 것이다. 동생이 먼저 문안 드렸어야 옳다. 초등학교 이후 줄곧 홀로 삶이었던 나는 친족과의 내왕이 자연스럽게 소원해졌다. 의식 없이 싸가지가 없는 놈이 됐다. 그래 아내한테 늘 지청구를 듣는다. 그런 나를 O형님이나 I동생이 내색 않고 따듯이 보듬어줘 감개무량했다. O형님은 중동 붐일 때 ▲건설사가 사우디에서 건설공사를 하는데 파견노무자들의 의무실장으로 파견 나갔단다.  3년6개월 의료봉사하며 재기의 발판을 이뤘다며 뿌뜻한 기억을 소환하기 신명났었다. 그때의 사우디생활을 얘기꾼처럼 잘 풀어냈다. O형님의 열변을 경청하며 자수성가한 의지의 뚝심은 행운이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오늘은 O형님이 사우디생활얘기로 초미를 장식했다. 다음엔 I동생의 삶 한 토막을 듣고 싶다.

시골 촌놈으로 상꼰대 축에 든 우리또래들의 지난한 삶은 억지낭만일망정 애환이 있었다. 떵떵거릴 부자는 아니라도 나름 자수성가했다. 요즘의 가난한 젊은이들에게 그런 낭만이 끼어들 틈새라도 있을까? 싶은 게다.  O형님과 I동생은 슬하에 두 아들만 두었다.  딸이 없어 형수님이나 제수씨가 안됐다(?)고 은근히 심통을 부려봤다. 딸만 셋인 울`부부는 비행기만 탄다면서~?. 오늘의 해후가 필연이란 자긍심은 꾸준히 만남을 이어갈 때이다. O형님과 I동생이 고마웠다. 더위가 한 꺼풀 벗겨지면 만나자고 석별했다. 그날까지 건강 챙겨 재회하길 기원한다. 오늘 I동생은 호스트 한답시고 지출도 상당했을 테다.          2022. 07. 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