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봉산 - 구곡폭포, 칼봉, 강선봉
오전10시, 강촌역사를 나서자마자 세찬 바람에 할퀸다. 일단의 등산객들이 고슴도치 흉내를 낸다. 후드를 뒤집어쓰고 놈과 맞서며 문폭(文瀑;구곡폭포의 옛 이름)을 향했다. 횡덩그레한 구곡폭포매표소 앞을 빠져 계곡을 들어서자 미친바람은 다소곳해졌다. 잿빛 골짝은 흰 빙하 띠를 늘어뜨려 눈길을 뺏다가 하늘로 솟는 빙폭이 되어 어안을 벙벙케 한다. 춘삼월인데도 텅 빈 구곡정(九曲亭)은 스산하다.
강촌은 물가마을-물깨말의 변음이고 폭포는 아홉 굽이 골짝을 돌아서야 있다. 그 골짝 길을 ‘물깨말구구리길’이라 하는데 생뚱맞게 던지는 쌍 기억(ㄲ) 화두 - '꿈,끼,꾀,깡,끈,꼴,깔,꾼,끝' 자를 수수깨끼 풀 듯 나름의 사색에 들면 일상의 굴레에서 얼른 벗어나지 싶었다. 물소리도 없는 빙하의 적막골짝이라 사색하기 딱인 구곡혼(九曲魂)의 물깨말구구리길이지 싶기도 하고. 구곡폭포는 거대한 고드름폭포가 되어 얼음송곳으로 파란하늘을 뚫을 듯싶다.
코로나19탓인지 빙벽을 오르는 알피니스트도 없다. 움직이는 건 전무다. 세상은 일시정지다. 소리도 없다. 나의 심장 헐떡대는 내면의 울림이 전부일 뿐 정적이 골짝을 팽배한다. 그래 살아있는, 동적(動的)인 건 나 홀로뿐이다. 그렇게 골짝에 내려앉은 파란하늘에 나를 띄우고 있는데 산님 세 분이 헐떡거리며 나타났다. “미안하지만 사진 한 장 찍어주실래요?” 그들 중 누군가가 나를 향해 골짝을 최초(?)로 울렸다. 그리하여 나도 빙벽 앞에 설 수가 있었다.
나의 구곡폭포 인증샷도 그렇게 만들어진 거다. 잣나무 숲을 헤치며 구불구불 기어오르는 된비알코스에 들었다. 문배마을로 향하는 깔닥고개 길이다. 문폭과 문배란 지명은 이소응(李昭應 1852~1930)의 문집 습재집(習齎集)에서 유래한다. 이소응은 일제의 자객에 명성황후가 시해당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단발과 의관제도의 변혁을 비판하는 훼복훼형론(毁服毁形論)을 저술한다.
암울한 시기에 춘천에서 활동하던 의병주창자들의 강청으로 그는 의병대장직을 맡아 항일전에 투신하여, 삭발한 춘천관찰사 겸 선유사 조인승을 가평관아에 잡아 처단하여 전국적인 명성을 얻는다. 1910년 한일합방과 함께 부인 유씨가 타계하자 국외망명을 결심한다. 이듬해 봄 북간도 망명길을 떠나 20년간 항일전에 매진하다가 몽골사막에서 1930년 4월 23일(음력 3월 25일) 79세의 나이로 영면했다.
고개안부에서 우측 칼봉을 향하는 등로를 오른다. 바람이 옆에서 달려든다. 미친바람은 놓쳤던 나를 드뎌 찾아냈다는 듯 앙칼지게 달라붙는다. 놈은 때론 등 뒤에서 나를 떠밀어줬다. 낙엽이 미친바람을 타고 산릉을 휩쓸며 사라진다. 그때마다 잣나무 숲은 우~웅 우~웅 울어대고 나목들은 맨살 부딪치며 살갗 찢어지는 포효를 한다. 잠시 동행으로 끝낼 미친바람의 쓰나미가 아닌데 오늘 어찌한다? 아차! 이틀짼가. 동해안의 태백준령을 휩쓰는 산불은 지금 어떠할까? 거기도 미친바람이 화마를 부채질할 텐데~?
메마른 산에 수북이 쌓인 불쏘시개들은 광풍을 타고 산릉을 넘나들 텐데 화마와 전쟁을 치루는 소방인들의 처절한 모습이 상상을 절했다. 이 광풍에 불길을 잡을 수가 있을까? 칼봉(검봉산)은 헤아릴 수 없을 덱 계단을 올라선 후에 펑퍼짐한 마당을 깔고 맞아줬다. 그 마당구석에 한 무리의 산님들이 머리를 모아 원형을 그리며 기갈을 해결하고, 또 한 무리는 비닐포장 속에서 궁색을 떠느라 왁자지껄 했다.
미친바람 탓이었다. 몸 가누기도 힘든 광풍 속에 산불진화 하는 사람들의 고군분투를 상상해봤다. 강선봉을 향한다. 내리막 능선길의 광풍은 좌측 뒷덜미를 후려쳐 견딜 만했다. 엘리시안 강촌스키장 슬로프가 골짝에서 숨바꼭질한다. 이윽고 쭈빗쭈빗 솟은 무더기바위능선이 다가선다. 바위동산의 강선봉이라. 그 바위틈새의 꼬부랑 노송들과의 연애질은 강선봉을 매력 넘치게 만들고, 저 아래 흐르는 북한강이 끼어들어 창조한 기막힌 풍광을 조망하는 황홀경은 강선봉만의 특전일지도 모른단 생각을 해봤다.
무릇 산이 암송의 연애질 없이 맹숭맹숭 해봐라. 나부터 뭔 재미로 찾아오겠는가? 연애질 질펀한 강선봉은 조망까지 뛰어나 산님들한테 사랑받는다. 내가 몇 해 전에 올라와서 미쳐버린 강선봉! 제 멋대로 자란 소나무는 그 제멋대로 탓에 멋지다. 그 멋들어진 춤사위 사이로 조망하는 그림들은 살아있어 시시때때로 치장해 다른 얼굴을 한다. 미친바람만 없다면 늘어지게 쉴 텐데! 아쉽다. 더구나 오늘은 아무도 없다. 광풍 땜일까?
강선사쪽으로 하산한다. 근디 급살 맞은 하강 길은 낙엽까지 뒤덮여 신경 곤두서게 했다. 조심했어도 낙엽 깔린 바위를 딛다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 등쌀에 스틱이 휘었다. 바위에 부딪친 우측 팔꿈치가 아렸왔다. 귀가 후 약상자를 꺼냈다. 아내가 시큰둥하니 '다른 데는 괜찮냐?'고 묻는다. 소독을 하고 에어파스를 뿌리고~. 칠십노인의 악산산행이 못마땅 한 게다. 아내 말따나 나는 언제쯤 속 차릴런지? 어쨌던 오늘 미친바람과 씨름한 별난 산행은 진한 추억거리로 남을 것이다. 2022. 03. 05
# https://pepuppy.tistory.com/455에서 2014년 1월의 검봉산행기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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