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 차례상 앞에서
설날아침 소박한 차례상을 차리면서 아내가 밤,대추,곶감이 빠졌다고 계면쩍어 했다. 제수상(祭需床)차림이 아닌 설음식이니 어여삐 봐주실 거라면 서였다. 명절에 빚은 음식을 그냥 먹기엔 좀 멋쩍어 조상님 전에 차례상을 올리는 건 아름다운 가풍이다. 하여 격식에 얽매이지 않아도 된다고 울`부부는 생각한다.
식구들이 차례상 앞에서 향을 피우고 기도를 올린 후 그 음식을 먹으면서 선고(先考`姑)를 기리며 생전의 일화를 소환 추억하는 경건한 자리는 가족이란 울 속의 공감대를 돈독히 하는 뿌듯한 시간이다. 요즘은 차례상음식도 손수 빚은 음식보다는 공장식품과 수입과일이 많아 좀은 어설프다. 내가 작년가을에 산에서 채취했던 산밤과 손수 말린 곶감이 부실해저 차례상에 올리지 못해 죄송했다.
아내와 애들은 밤을 좋아하고 나는 곶감을 선호한다. 사실은 곶감 보다는 홍시를 좋아해 대체할 때도 있지만~. 홍시는 자못 독특한 과일이다. 누런 고체에서 액체로 변해가면서 빨개지는 홍시는 빛깔과 맛깔에서 어떤 과일도 흉내 낼 수가 없는 독특한 과일이다. 야들야들한 껍질속의 당분덩어리 홍시는 시장기를 때우는 간식거리도 된다. 부모님연세 오십 줄에 늦동이로 태어난 나는 부족한 모유 대신 홍시를 먹으며 자랐단다.
내 어릴 적 고향집 남새밭엔 제법 큰 접시감나무가 다섯 그루 있었다. 군것질이 귀했던 당시엔 떨어진 땡감을 물에 우려먹으려 너나 할 것 없이 감나무 아래를 훑었다. 그러다 가을엔 조생홍시를 따먹느라 감나무 밑에서 고개 떨어지는 아픔도 견뎌냈었다. 홍시 중에도 접시감홍시가 당도와 액즙이 풍성하고 말랑말랑한 껍질은 잘 터지지 않아 수저로 떠먹기도 편리했다.
홍시의 신비스런 단맛은 떫은맛이 액체화되면서 당도17도로 숙성탄생 된 것이다. 떫은맛이 남아있음 완숙한 홍시가 아니다. 홍시 한 개는 성인들한테 시장기를 때우는 훌륭한 간식거리가 되기도 한다. 지금은 거의 모든 과일이 비닐하우스 재배와 냉장보관 기술 덕에 시도 때도 없이 공급되지만 홍시는 오직 늦가을에서 겨울까지만 맛 볼 수 있는 한철 과일이다.
늦가을 깨 홀라당 벗은 감나무는 가지끝에 홍시 한두 개를 달랑 달고 서정(抒情)을 일깨운다. 까치밥이다. 우리네 선조들은 먹거리 귀했던 시절에도 날짐승들의 겨울나기를 위한 배려를 잊지 않았던 것이다. 새들이 까치밥을 쪼아 먹는 풍정은 가슴 뭉클케 하는 사생화다. 아! 얼마나 아름다운 공존의 생명존중사상인가!
금년 설엔 둘째와 막내가 참석해 모처럼 북적댔다. 막내가 코로나19 사회적 거리두기 6인이상 모임금지 탓에 시가(媤家)엘 안 간 땜이다. 명절은 피붙이가 모여 음식을 나눠먹으면서 온갖 얘기들을 화제 삼는 화기애애한 자리를 만들기 위한 전통적인 관례다. 복잡다기한 현대를 사는 사람들이 명절이란 핑계거리가 없으면 혈족끼리 모일 기회 만들기가 쉽지가 않아 명절은 축복의 날이다.
하여 명절이 기다려지는 소이다. 늙어갈수록 피붙이들을 만나는 기횔 은근히 고대하는 심정은 기쁨을 좇는 삶의 에너지이기도 하다. 아무것도 기대할 게 없는 노인의 일상은 얼마나 무미건조한 팍팍한 삶이랴. 노부모에겐 풍요한 선물보단 찾아가 뵙는 대면의 시간이 훨씬 더 기쁨을 수반하는 효행이란 걸 새겨야 함이다. 내가 나이 들면서 터득한 간단한 진리다. 코로나 팬데믹 속에서 맞는 두 번째 설날 - 화기애애했다. 2022. 02. 01
'느낌~ 그 여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만이란 가면 속의 공정과 상식 (0) | 2022.02.14 |
---|---|
‘전쟁의 가능성이 한반도 위에 드리우다’ (0) | 2022.02.12 |
멸공과 사드의 사잇길 (2) | 2022.01.18 |
‘서촌김씨’ 이태리식당에서 (0) | 2022.01.09 |
다윗과 밧세바 (1) | 2021.09.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