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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창덕궁후원의 서설

창덕궁후원(昌德宮後苑)의 서설(瑞雪)

호랑이해 뜬지 열흘째인 어제 밤에 서울엔 첫눈발이 날렸다. 그 서설을 체감하러 창덕궁을 향했다. 호랑이처럼 매서운 한파가 비수처럼 살갗을 파고든다. 진종일 영하8°c~영하5°c라는 일기예보는 서울의 거리를 꽁꽁 얼어 붙여 방한복마스크`맨도 고슴도치를 만든다. 간밤의 서설은 땅거죽만 살짝 덮어 아쉽다. 밤새도록 눈부신 설경을 기대했던 바램은 한파에 눈이 얼른 녹지 않아 조급할 것 없다고 자위했다.

낙선재의 서설

오전10시, 첫번째 후원 관람그룹에 끼어 부용지를 향한다. 언덕 빼기 낙엽위에 내린 눈발은 갈색바탕에 흰 물감을 흩뿌린 기묘한 파스텔톤 세상을 연출했다. 후원은 창덕궁 뒷산을 최대한 자연지형 그대로 이용하여 언덕을 넘어야 부용지에 닿는다. 왕실의 휴식공간으로, 왕이 신하들을 불러 여러 행사를 연 곳이었다. 승마, 활궁 등의 군사훈련, 각종연회, 특별과거시험, 영농과 양잠을 체험한 다목적휴게소였다.

돈화문과 500살의 행목

창덕궁은 내시 박자청이 언덕과 골짝의 숲이란 자연조건을 최대한 멋지게 이용한 궁궐로 공간미가 출중한 자연친화적이다. 창덕궁은 '여인의 궁' 이라고도 한다. 성종(1483)이 세조비 정희왕후, 덕종비(추존왕) 소혜왕후, 예종비 안순왕후 등 세 명의 대왕대비를 모시려고 수강전을 지었고 이어 중건한 궁궐이다. 위 세 분의 대비(大妃)들과 인수대비와 장희빈의 거처로 사용되어 후원·창경궁과 함께 동궐(東闕)이라도 불렸다. 창덕궁엔 소나무와 회화나무와 단풍나무가 많은 숲속의 궁궐이라 사시사철 아름답다.

진선문을 들어서면 인정문과 숙장문을 휘두른 회랑이 서설로 산틋하다

고려시대 사냥과 연회를 즐겨 행했던 수강궁(壽康宮)이란 궁궐이 지금의 창경궁(昌慶宮)터에 있었다. 세종이 즉위하자 상왕(上王)인 태종이 머물 궁궐로 짓고 수강궁이라 하였다. 수강궁 공사는 수군(水軍)과 한양주둔 군인들이 동원되어 세웠다. 수강궁이 창경궁으로 바뀌고 크게 지어진 것은 성종 14년(1483)의 일이다. 수강궁을 개조하겠다던 성종은 아예 궁궐을 신축한 셈이다.

후원입구의 삼삼와
성정각 뒷뜰에서 본 관물헌쪽 후원입구

성종은 처음에 공사에 동원된 승려들에게 도첩증을 발급했으나 인력이 부족하자 도첩(度牒)증이 없는 2천명을 선발하여 양곡을 지참시켜 30일간 노역하면 도첩을 발행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공사시작 1년이 지난 성종 15년 2월에 이르러서는 4천명의 승려에게 도첩이 주어지자 유학자들의 반발이 있었지만 성종은 그의 소신대로 강행했던 역사였다.

부용정 언덕빼기
부용정

부용지는 길이34.5m, 폭29.4m의 장방형 연못으로 가운데에는 직경 9m의 둥근 섬이 있다. "물고기는 물을 떠나 살 수 없다." 임금은 항상 백성을 생각하는 정사를 펼쳐야 한다는 정조의 민본철학이 깃든 주합루가 언덕 빼기에서 부용지를 조감한다. 주합루를 오르는 남쪽 언덕에 3단 화계(花階)에 꽃을 심고 수석을 배치하여 정원미를 극대화 하여 어수문을 세웠다. 어수문은 임금이, 양 옆의 작은 문은 신하들과 일반인들의 출입문이다.

부용지 섬과 어수문, 어수문 뒤에 주합루, 주합루 옆은 서향각

유흥을 즐긴 연산군이 후원에 서총대(瑞총臺)를 쌓고 큰 연못을 만들어 배를 띄워 놀았는데 이 서총대공사에 동원된 인부들이 온갖 고생을 당했다. 백성들은 서총대부역을 모면하려고 무명배를 짜서 바쳤는데, 헌옷의 묵은 솜으로 무명배를 만들었다. 하여 질이 나쁜 면포(綿布)를 '서총대 면포'라 불리게 되었다. 연산군이 폐위되고 서총대마당에선 활궁과 과거시험이 시행되어 '서총대과거'라고 했다.

부용지 샘과 사정기비각

부용정에서 왕은 과거시험 합격자에게 축하연을 베풀었으며, 정조가 신하들과 낚시를 즐긴 곳으로 지붕은 연꽃을 상징한다. 둥근 섬은 천원지방(天圓地方)이라는 동양의 세계관을 의미 한다나!  연못 서쪽에 지하수 샘물이 솟아 연지로 흘르는 물길을 관리하는 사정기비각(四井記碑閣)이 있다.

어수문과 주합루, 영화당(우)

주합루 서쪽에 있는 서향각(書香閣)은 포쇄소다. 포쇄(曝曬)란 책과 임금의 어진 및 어필이 습기로 좀이 슬고 삭는 걸 예방하려 햇볕에 내어놓고 말리는 작업이다. 하여 사대부선비들은 겨울철 햇볕 좋은 날이나 이른 봄에 자신의 책과 수장품들을 마당에 내놓고 말리는 포쇄풍정을 즐기며 자랑(?)삼았는데 유행병처럼 번졌다.

광해는 사전에 역모(인조반정) 밀고를 받았으나 측근 김개시와 훈련대장 이홍립만 믿고 밤 늦도록 어수대에서 연회를 즐기다가 반정군에 쫓겨 달아나다 체포된다. 그실 이홍립은 반정군에 깊숙히 발 담구고 내통한 간신이었는데~!

영화당(暎花堂) 앞의 넓은 마당은 애초엔 창경궁 춘당지까지 트인 드넓은 공간으로 과거시험과 궁술, 승마대회 등 군사훈련이 열린 곳이었다. 영화당 현판은 영조의 어필이다. 영화당을 곧잘 애용했던 정조는 술을 못 먹는 다산(정약용)을 붙들고 술주정(?)을 하며 군신의 정을 굳건히 했다. 지혜롭고 열성적인 다산이었지만 음주와 운동엔 소질이 없어 활궁과 말타기시합에 늘 꼴찌라서 정조임금이 더더욱 편애했지 싶다.  

영화당, 현판은 영조의 어필

광해는 임난에 소실 된 영화당을 비롯한 궁궐복원에 힘쓰다 국고탕진이란 인조반정의 빌미가 됐다. 그에 앞서 임진난에 불 타 폐허가 된 창덕궁과 후원은은 표범과 호랑이들의 은신처가 됐었다. 1605년(선조)에 창덕궁중건공사를 시작하여 1609년(광해군 1년)에 마무리되고, 이듬해 광해가 창덕궁을 법궁으로 선포하고 거처를 옮겼다. 그러자 이젠 경복궁이 폐허화되어 호랑이와 표범이 옮겨와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에 환궁할 때까지 270년동안 맹수의 소굴로 전락했다. 임금과 맹수가 번갈아가면서 왕궁주인이 된 셈이다. 

통돌을 'ㄷ'자로 파낸 불로문, 이 문을 통과하면 늙지 않는단다

애련지(愛蓮池)와 애련정은 숙종이 조성한 연못과 정자다. 여기서 숙종은 요부 장희빈(張禧嬪)과 깨쏟아지는 재미에 빠졌을 테다. 희빈은 애초에 인조비조씨의 시녀로 숙종의 눈에 띄어 후궁이 됐는데 간사하고 악독한 성품을 간파한 왕대비가 축출했으나, 계비(繼妃) 인현왕후 민씨가 희빈을 다시 궁중으로 불러들였다. 원자 경종(景宗)을 낳아 숙종의 총애를 받은 희빈은 민비를 음해 모략하여 폐위시키고 왕비를 꿰찬다. 

애련지

장희빈의 투기(妬忌)와 간악함에 실망한 숙종은 5년만에 민씨를 왕비에 복귀시키자 장희빈은 민비를 저주하는 온갖 폐륜행위를 자행했다. 민비는 시름시름 앓다가 35세의 젊은 나이로 승하하였다. 숙종은 장희빈의 질투와 저주의 비행을 확인하고 장희빈에게 사약을 내렸다. 그녀가 미친듯이 사약그릇을 내던지고 욕짓거리를 쏟아내자 숙종은 옥교(玉轎)를 타고와 취선당에서 장희빈에게 다시 사약을 명한다. 또 거부하자 숙종은 궁녀들로 하여금 문판(門板)으로 장희빈을 덮어씌우고 그 위에 올라앉게 하여 압사(壓死)시켰다.

의두합의 기오헌(좌)과 운경거(우)

의두합(倚斗閤)은 애련지 남쪽언덕에 소박한 사랑채 모습의 기오헌(寄傲軒)과 운경거(韻磬居)로 불리는 북향의 작은 건물로 효명세자(1809~1830)의 독서실 내지 휴식처였다. 총명하고 고만한 인품의 효명세자는 18세에 부왕 순조를 대리정치등극하여 22세에 요절했다. 운경거는 대궐안에서 젤 작은 한 칸짜리 건물이다. 의두합은 북향이라 햇볕이 들지 않아 효명세자의 건강을 해쳐 요절케 한 원인일 거란 설도 있다.

애련지 안쪽으로는 효명세자가 순조를 위해 조성한 사대부 저택을 형태를 하고 있는 이궁(離宮)인 연경당이 자리잡고 있다. 효명세자는 연경당에서 부왕 순조와 어머니를 위한 잔치를 열었다고 한다. 연경당은 안채와 사랑채를 담장으로 구분지은 여느 사대부집 같은 전각인데 단청을 안 해 소박하기 그지없다.

애련정
반월형의 존덕지

1644년 인조(仁祖22)는 우리나라지도 모형의 반월지인 존덕지(尊德池)에 이중구조의 육각지붕의 독특한 정자를 세우니 존덕정(尊德亭)이다. 정자는 24개의 기둥에 우물정자천정을 만들고 마루를 안쪽과 바같쪽으로 구분지운 채 육각지붕을 받치게 했다. 또한 존덕정에 들어가는 돌다리 남쪽에 일영대(日影臺)를 두어 시각을 재는 건물구조는 극찬을 받았다.

존덕지의 관람정
존덕정

존덕정에는 만천명월주인홍자서(萬千明月主人翁自序)란 정조의 명문 현판이 걸려있다. '만 개의 개울에 만 개의 달이 비치지만 달은 오직 하늘에 떠 있는 달, 바로 정조 자신뿐'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데, 결국 모든 백성을 골고루 사랑하는 초월적인 군주는 정조라는 자부심을 표현한 글이다. 정조22년 왕권을 공고히 한 정조가 백성에게 왕은(王恩)을 고루 베풀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었다. 

관람정 건너 승재정

정조는 규장각의 신하들과 그들 형제와 자식들을 이따금 후원으로 초대 연회를 열었다. 연회가 끝난 후 대내(大內)로 돌아오려고 할 때 다시 신하들을 불러세워 "오늘 일은 매우 즐거웠다. 술통에 아직도 술이 남아 있으니, 여기 존덕정에 처음 들어온 신하들은 다시 주량대로 다 마시라."하였다고 <1793년 2월 28일자 일성록>에 기슬되어 있다. 정조는 자상하고 화끈한 군주였다.

존덕정 천정벽면의 萬千明月主人翁自序현판
존덕정 앞 소나무와 행목(우)
효명세자의 독서방인 펌우사(앞)와 존덕정(뒤)
연경당 후면

애련지 안쪽에서 주합루와 영화당 서편의 작은 언덕을 넘으면 효명세자가 순조를 위해 지은 이궁(離宮)인 연경당이 자리잡고 있다. 아름다운 숲과 연못과 정자가 어우러진 골짝에 들어선 사대부 저택 같은 연경당(演慶堂)은 효명세자가 부왕 순조와 어머니를 위한 잔치를 열었다고 한다. 

농수정

우측의 장양문은 사랑채로 통하고, 이 문을 지나 사랑마당에 들어서면 안마당과 사랑마당을 경계 짓는 꺾인담장이 있으며 담장 가운데에 정추문이 있다. 그리고 좌측의 평대문은 안채로 통하는 수인문이다. 사랑채와 안채가 담으로 구분되어 있기는 하나 한번 꺾여 하나로 연결되어 있고, 전체 공간구성은 서로 연결된 만(卍)자 형으로 구성되어 있다. 연경당이란 이름은 원래 사랑채를 가리킨 것.

사랑채의 오른편으로는 서재 구실을 하는 선향재(善香齋)가 위치해 있으며, 선향재 뒤편의 경사진 언덕에는 화계를 설치하고 제일 높은 곳에 농수정(濃繡亭)을 배치하였다. ‘연경(演慶)’은 경사가 널리 퍼진다는 뜻이다. 자고로 임금이 사는 궁궐보다 큰 집(99칸 이상)을 지을 수가 없단 불문율을 깨고 효명세자는 120칸의 연경당을 지었다. 

선향재와 200살의 귀목

선향재(善香齋)는 연경당을 확장하면서 지은 손님 접대실 내지 서재로 사랑채 동쪽에 있다. 경복궁의 집옥재 같은 청나라 건축양식의 건물이다. 서양식 차양 시설과 동판으로 지붕을 얹은 이국적인 건물로 특이하다. 허나 서향의 선향재는 일조량이 작아 습기가 많이 서려 서재로썬 불합격 건물이었다. 그래서 지붕에 통풍을 위한 이중지붕과 온돌방을 만들었단다.

▲애련지 서쪽 언덕빼기를 오르는 계단과 구 선원전을 향하는 숲길▼
구선원전을 관통하는 금천
궐내각사는 인정전(중앙에 지붕만 보인다)과 좁은 통로로 연결된다

조선왕조의 궐내각사(闕內各司)는 궁궐 안에 설치된 여러 관청을 뜻한다. 국왕을 보좌하고 왕실업무를 챙기는 관청으로 승정원, 홍문관, 규장각, 예문관, 선전관청, 오위도총부, 내의원, 세자시강원, 세자익위사 등이 있다.

인정전과 연결되는 궐내각사의 통로는 유기적이면서 멋지다
인정전
인정전의 박석마당과 품계석에 서설이 내렸다

임진왜란 초기 탄금대전투에서 신립이 대패했단 전갈을 받은 선조는 억수로 퍼붓는 빗발속에 인정전에서 말을 타고 허겁지겁 도망을 한 통에 백성들의 원망을 샀다. 임난 후 창덕궁을 복원한 광해는 여기서 전시(殿試)를 거행하고 연회를 자주 열다보니 궁안이 더럽고 악취가 진동 했다.  술 취해 방뇨한 탓이다. 하여 광해는 병조에 명하길 “오줌 싸는 일을 엄금하라”고 하명했다.

소방수를 담아두는 드무(무쇠항아리)는 화마에 취약한 목조궁궐을 보호하기 위한 수조다. 귀신 중에서도 가장 추물인 불귀신이 왕궁에 불을 지르러 오다가 느무속 물에 비친 자기의 추한 얼굴을 보고 기겁을 하여 도망치느라 불 지르는 걸 깜박 잊게 하려는 방책이었다.
인정전의 통풍을 위해 천정을 높이려 이층지붕을 만들었다

궁궐 행사장은 잔치음식이 풍성하고 먹은만큼 배설을 해야하는데 화장실이 턱 없이 모자란 게 광해조 뿐만 아니라 프랑스 루이왕조때의 베르사이유궁전도 마찬가지였다. 베르사이유궁의 연회엔 시종이 오강을 들고 주인을 따라다니며 배설을 받아 정원 후미진 곳에 쏟아버렸다. 화려한 궁궐 밖은 악취가 진동할 수 밖에. 조선의 양반이나 프랑스의 귀족들이나 먹고 싸는 쾌감만 즐기는 저급양반들 - 지금도 해바라기성 고위직들이 기생하지 싶다. 그런 귀족들의 방탕했던 아랫도리 방사 탓일까? 지금도 프랑스에선 배꼽 아랫일은 불문에 부친다.

선정전 앞뜰의 서설
선정정과 희정당 전면
▲선정전과 희정당 전각지붕의 선이 이뤄낸 조형미가 아름답다▼

선정전(베푸는 정치여야 한다)은 평소에 왕이 입회하여 매일 신하들과 대면업무를 논했던 편전이었다. 문무대신들이 양쪽으로 정좌한 채 국사를 논하고, 예문관과 승정원의 사관들이 그 대담을 한 글자도 빠뜨리지 않고 기록하여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가 태어났던 것이다. 오늘날 청와대에서 귀감삼아야 할 정사다.

선정전 내부 어좌(좌)와 주랑

궁궐에서 유일한 청기와지붕의 선정전은 각종 행사장으로 쓰였으나 비좁아 바로 옆의 왕의 침전으로 사용한 희정전도 편전의 기능을 하다가 1917년 화재로 소실된다. 3년 후 복구하면서 쪽마루와 카펫, 유리창문, 천장의 샹들리에 등 서양식으로 바꿨다.  예문과, 사헌부, 사간원, 홍문과 등의 관리들과 언관들이 주야로 왕과 정사를 논했던 ‘궐내각사’여서 한군데 모여있다. 

희정당
▲대조전

대조전 우측의 흥복헌은 1910년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렸던 경술국치의 장소로 뒤의 경훈각 등의 건물과 유기적으로 잘 연결됐다. 또한 옆의 건물 희정당 행각과 복도로 연결시켜 여러 전각들과 복합적인 공간구성을 이뤄 감탄케 한다. 

대조전은 왕비의 생활공간으로 왕권을 잇는 세자를 낳는다 해서 대조전이라 했다. 왕비는 겉옷을 두 번 다시 입지를 않고 보관했다가 궁중행사가 열리면 양반가의 부인들에게 하사했다. 대조전과 임금의 침전인 희정당은 복도로 연결되어 래왕하기 편리하게 했으며 창덕궁에 전기가 최초로 들어와 불켰던 전등과 드무가 있는 곳이다.

▲대조전 뒷뜰의 화단은 궁중여인들의 산책장소로 인기였다▼
▲대조전의 왕비를 비롯한 여인들은 뒷뜰 화계를 운동삼아 산책하며 일광욕울 줄겼다▼
▲대조전과 성정각 돌담 사이의 화단과 솟을 문▼
▲성정각(동궁)▼
▲세자의 거처였던 동궁▼
성정각(誠正閣)은 왕세자가 자기훈련을 하던 동궁이다. 성의(誠意)와 정심(正心)으로 학문을 대하는 올바른 마음가짐을 뜻한다. 성정각 현판 글씨는 정조 (正祖)의 어필이다.
낙선재

낙선재에 들어서면 인도무굴제국의 황제 샤 자한이 지은 타지마할궁전이 생각난다. 부인 몽타즈 마할이 애를 낳다가 죽자 아내를 추모하기 위해 22년동안 지은(1648년) 타지마할궁전의 샤 자한 황제의 사랑은 세기적인 로맨스다. 조선조 24대왕 헌종이 경빈김씨에게 바친 사랑도 가히 비견할 만해서다. 미남에 문예에 조예가 깊은 헌종은 왕비(효현왕후)가 16세로 세상을 떠나자 서둘러 왕비간택을 하게 되는데 이때 두 번째 왕비 효정왕후 홍씨가 선택된다.

허나 헌종의 눈에 쏙 든 여인은 홍씨와 경합했던 경빈김씨였다. 헌종은 대비 순헌왕후 김씨가 간택한 홍씨를 마지못해 맞았을 뿐 마음은 경빈김씨한테 가있었다. 효정왕후 홍씨가 결혼 2년이 되도록 자식이 없자 헌종은 그걸 빌미삼아 17세의 경빈김씨를 후궁으로 정식 간택하여 맞이한다.  헌종은 대조전 옆에 낙선재를 지어 전각 이름을 '석복헌'이라 명명하여 경빈김씨에게 바치면서 불꽃 튀기는 허니문에 들었다. 신축전각에서의 사랑의 역사라! 헌종은 낭만이스트였다.

 

 

 

 

헌종13년 1847년의 일이다.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궁궐을 지은 헌종의 사랑이 인도 타지마할 궁전의 세기적인 '사랑의 역사'와 닮은 꼴이 아닌가! 사랑은 참으로 위대하다.

 "그대의 눈빛이 되려 / 그대의 마음이 되려 / 내가 여기 이 자리에 왔나 보다.

무엇이 나와 그대를 만나게 했는가. / 나는 그 뜻을 따르리라."

헌종이 경빈김씨에게 바친 사랑의 독백이다. 우리나라 임금이 애인을 위해 전각을 지어 바친 로맨스가 있었던가~!              2022. 0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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