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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경복궁 & 창경궁의 설경 2

2) 창경궁의 설경

창경궁은 1418년 세종이 즉위시 상왕(上王)인 태종을 모시기 위해 지은 수강궁(壽康宮)을 성종이 1483년에 세 분의 왕후(王后)를 모시기 위해 수강궁을 확장하여 세운 별궁으로 지형상 동향으로 세웠다. 일제는 1909년 궁내 전각들을 헐어내고 동`식물원을 설치하면서 권농장 자리를 파서 연못을 만들어 춘당지(春塘池)라 부르며 정자를 짓고 일본식 궁원을 만들었다.

소복단장한 담장과 거목과 돈화문지붕이 한 폭의 수묵화를 빚어 아름답기 그지없다

함박눈 내리는 날 소복단장하는 창경궁 품으로 들어가보지 않고는 꿈결 같은 낭만을 상상도 못하리라. 아니 일상의 찌든 마음주름살을 펴는 힐링의 순간은 쉬이 잊을 수 없을 추억으로 남는다. 소나무와 단풍나무와 느티나무 등 온갖 나목들이 함박눈을 맞으며 속살대는 구릉을 눈 밟으며 걷는 정취를 어찌 표현하리! 눈 내리는 날엔 숲을 찾을 일이다. 수풀이 눈을 맞으며 속삭이는 밀어는 우리들 영혼을 살찌우는 당의정이 된다.  

돈화문2층에 신문고를 설치 백성들의 직소를 경청했다
금천(錦川)은 북악산에서 발원한 북영천(北營川)물길을 동쪽의 옥류천과 만나게끔 바꾸면서 회동천에 흘러드는 물길로, 금천교(錦川橋)는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과 중문인 진선문 사이에 있다
인정전의 정적은 눈 쏟아지는 날 잠시 순간이다. 순수의 날에 인정전은 문을 활짝 열고 겨울서정에 취했다. 그 오붓한 고요를 깨뜨리기 망설여졌다. 찍사 한 분도 발걸음을 멈췄다
선정전(宣政殿)은 평상시 임금이 신하들과 함께 국사를 논하고 경연을 하던 곳이다. 뜻은 "정치와 교육을 널리 펼친다"이다. 왕비가 양로연을 열고, 신하들의 아내를 불러 잔치도 열었다. 그리고 친잠을 행한 뒤 하례와 책보를 받는 의례 등을 거행했다.
▲희정당(熙政堂)은 왕의 침전이었으나 조선 후기와 대한제국시기에 왕의 집무실로 사용되었다. 한식과 서양식이 어우러진 건물로 1997년에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성정각(誠正閣)은 세자가 경서(經書)를 공부하던 건물로 동궁이라고 불렀다. 성정이라는 이름은 대학(大學)의 성의(誠意)와 정심(正心)에서 앞 글자를 따서 붙였다
풍기대 앞의 눈꽃밭을 기점으로 성종태실비 언덕을 밟고, 춘당지 숲길을 어슬렁대며 대온실 뒤 언덕의 관덕정야산에서 자생식물원을 맴돌다, 월근문 앞 산책길을 소요하다보면 홍화문 옥천교에 이른다. 다시 사도세자비명을 품은 회화나무를 마주하다, 관천대 수목지대를 관통하여 주목에 눈길을 뺏기다가, 함인정의 소나무 퍼포먼스에 갈채를 보내고, 통명전옆의 샘물에 닿는 코스는 창경궁수목길의 품격을 오롯이 체감케 한다
춘당지는 창경궁 뒷산인 북악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모인 연못으로 소춘당지와 대춘당지가 있다. 애초엔 소춘당지만 있었는데 왕과 왕비가 농사와 양잠을 체험하던 밭을 대춘당지로 만들어 다리를 놓아 연결했다. 동시에 일제가 1909년 창경궁 안에 동물원을 조성하면서 일본식 인공연못을 만들었다. 내 개인적으론 일제가 춘당지를 만든 건 잘 한짓이란 생각이다. 창경궁의 아이콘이라 여겨저서다. 
춘당지 주인노릇 한 원앙떼는 지금 어디서 겨울을 나고 있을까?
8각칠층석탑 ; 성종 원년인 1470년에 세웠다
대온실(大溫室) ; 1907년(융희 원년)에 순종이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자 일제는 창경궁을 유원지로 개조하여 동`식물원을 세우고 '창경원(昌慶苑)'이라 했다(1909년).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온실로 동양최대의 규모였다
관덕정은 조선시대 왕들의 활궁터였다. 9대성종의 왕비 공혜왕후 한씨가 누애치기를 하기도 했다. 1624년에 인조가 취미정이란 이름의 정자를 세웠는데 1664년(현종5) 관덕정으오 이름이 바뀌었다
고궁의 설경엔 한복차림이 더 운치가 돋는다. 한복차림 관람객은 무료입장 특전을 받는다던가?
▲춘당지는 각종 어류와 원앙을 비롯한 조류들의 낙원이 됐다▼
영춘원은 내전으로는 간결하고 소박한 건물로 정조가 도서관으로 사용했다. 정조는 영춘원에서 승하했다. 집복헌은 후궁의 거처로 숙종 때 건립돼 사도세자와 순조가 태어난 곳이다. 1830년 화재로 소실, 1834년에 재건했다
오층석탑
함인정(涵仁亭)은 성종 때 건립한 인양전이 있었던 자리인데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그 자리에 인조가 함인정을 건립한 것이다. 임금이 제례를 위해 머물거나 문무에 급제한 인재들을 접견한 장소로 사용되었다
▲함인정은 사랑방 역할의 정자다. 1484년(성종15년)에 지은 인양전(仁陽殿)이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소실돼 인조때에 재건됐다. 영조가 문무과거에서 장원 급제한 사람들을 접견하는 곳으로 애용하였다.▼
▲환경전(歡慶殿) 창경궁의 침전 중 하나로 정면7칸, 측면4칸의 단층 팔작기와 겹처마집이다. 왕이 늘 거동하던 곳으로 중종과 소현세자가 여기서 승하했고, 효명세자가 승하했을 때는 관을 모시는 빈궁으로 사용하다가 불이 나 재궁을 불속에서 가까스로 꺼내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숭문당(崇文堂)은 광해군이 건립했다. 영조는 성균관 유생들을 숭문당으로 불러 접견하며 학문과 정사를 논하고 주연을 베푸는 등 인재양성소 이용했다. 학문을 숭상한다는 의미의 '崇文堂' 현판은 영조의 어필이다
▲명정전(明政殿)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창경궁의 전각으로, 조정에 깔린 박석은 일제 때 뜯겨 잔디를 심어 훼손돼었다. 지금은 인공박석을 깔았다.▼
옥천교(玉川橋)는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弘化門) 앞을 흐르는 금천(禁川)인 옥류천을 가로 질러 놓여 있는 다리로 궁궐내 다리 중 젤 아름답다
홍화문(弘化門)은 창경궁의 정문으로 북쪽에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다. 1484년(성종 15년)에 창건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 1616년(광해군8년)에 재건됐다
회화나무 ; 사도세자가 문정전마당 뒤주속에 갇혀 죽으면서 내는 신음소리를 100여m쯤 떨어진 금천 옆 회화나무가 들으며 애가 타서 휘고 비틀린 채 속까지 까맣게 썩어버렸다. 회화나무는 그 비극을 목도한 증인목이다.
관천대(觀天臺)는 세종때 간의(簡儀)를 설치하고 매일 밤마다 서운관원(書雲觀員) 5인이 입직하여 천문관측에 종사하였다.
▲문정전(文政殿) ; 서거정(徐居正)이 지었다. 영조38년(1762 윤5월13일) 왕은 문정전 앞뜰에서 친자인 왕세자 사도세자를 8일 동안이나 뒤주 속에 가두어 죽여 버린다. 뜨거운 여름날 뒤주에 갇힌 사도세자의 비명소리가 담장 밖에까지 들렸다▼
문정전은 인조가 편전으로 이용하고 정작 비좁은 탓에 왕들이 정사나 경연을 편 경우가 뜸했고 연산군과 중종이 연회와 잔치를 열었다. 인조반정과 이괄의 난 등으로 창덕궁이 몇 번 불타자 창경궁 문정전을 편전으로 사용했었다

 

함인정은 임금이 제례를 위해 머물거나 문무에 급제한 인재들을 접견한 장소로 사면 벽이 없는 정자다
함인정(涵仁亭)은 성종 때 지은 인양전 자리인데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되어 인조가 그 자리에 함인정을 건립했다. 함인정은 인왕산 아래 인경궁의 함인당을 철거하여 옮겨온 것이다
환경전(歡慶殿)은 1484년 성종 때 창건한 임금의 침전으로 임진왜란, 이괄의 난, 순조 때 화재로 소실 됐다. 중종이 승화한 곳이기도 하다.
경춘전(景春殿)에서 정조와 헌종이 태어났으며, 숙종 계비(繼妃) 인현왕후 민씨(閔氏)가 여기서 죽었다. '景春殿'이라는 현판은 순조(純祖)의 어필. 경춘전 뒤뜰의 화계도 일품이다
빨간 산수유열매가 하얀 꽃잎을 달고 겨울꽃을 피웠다
통명전(通明殿)은 창경궁 안에 있는 정전(正殿)으로 왕의 생활공간이면서 연회장소로도 사용했다. 옥황상제가 있다는 집.
양화당(養和堂)은 대비전으로 병자호란때 남한산성에서 환궁한 인조가 잠시 머문 곳. 여기서 철종비 철인왕후 김씨가 승하했다. 현판글씨는 순조 어필
연당 ; 통명전 뒤 샘물에서 솟는 물이 연당을 가득 채우고 월대 앞을 돌아 빠져 나가 금천과 합류한다.
통명전 뒤 화계정원 ; 취선당(지금의 낙선재 부근)에 머물던 장희빈이 서쪽에 신당을 꾸며놓고 숙종의 처소인 창덕궁의 대조전과 인현왕후의 처소인 통명전 아래에 흉물을 묻고 밤마다 무당을 불러들여 재앙을 빈 곳이다
▲동궁(東宮)은 왕세자의 거처로 동쪽에 있는 궁궐이라 동궁이라 했다. 임금의 후계자로 떠오르기 전의 태양과 같은 존재가 머무는 동쪽궁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