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탄강 지오트레일 - 고석정(孤石亭) , 승일교, 승일빙폭, 순담계곡(蓴潭溪谷)
영하8°C로 치닫는 한파는 서울의 아침하늘을 거울처럼 씻어냈다. 파란하늘을 투영하는 아침햇살이 눈부시다. 폐쇄된 경원선(복원중이다)의 신탄진역 앞을 지나칠 때 민들레홀씨처럼 흩날리던 눈발이 북상하는 차창 앞으로 부나비떼거리가 되어 군무를 춘다. 어지러운 허공 속에 다가서는 철원평야는 금세 하얀 옥양목을 깔았다. 버스가 조심조심 바퀴를 굴린다. 소복차림의 백마고지역사는 하얀 카페트를 깔아놓고 환승객을 맞고 있다.
동송행버스로 갈아타야한다. 옥양목 펄럭대는 철원평야는 함박눈춤 탓에 뿌옇다. 두루미 한 쌍이 긴 모가지를 빼고 허공을 응시할 땐 오리 떼가 설무(雪舞)를 가르고 있었다. 신기루처럼 펼쳐지는 설무의 철원평야를 눈 부릅뜨고 즐기며 가슴 터지도록 포식하다 슬그머니 걱정이 지폈다. 이러다가 눈 쌓여 교통 두절되면 어떻게 귀가하나? 하고. 한 시간쯤 걸려 철원관광정보센터에 닿았을 땐 함박눈발은 소강상태였다. 오후 1시였다. 8시에 문 밖을 나섰으니 5시간 만이다.
J가 앞장서 고석정을 향한다. 그실 오늘의 고석정탐방도 어제 J가 바람잡이 한 덕이라. 그가 뜬금없이 고석정엘 가자고 전화질을 해서 나대기 좋아하는 내가 얼씨구나 했고, 나는 C한테도 동행하자고 군불을 땠는데 감기 중인 그는 한나절을 뜸 들여 포기하겠다고 손들었었다. 바위벼랑 고석정에 섰다. 발밑에 우람한 선바위고석대가 흰 두건에 소나무를 심은 채 휘도는 한탄강을 빙하(氷河)로 탈바꿈시켰다.
그 빙하가 바위협곡을 내지르며 머리와 꼬리를 숨긴 채 강 한가운데에 부교를 설치 주상절리를 온전히 체감케 하나 싶다. 고석정에서 한 눈에 일별되는 한탄강의 빙하와 협곡의 주상절리를 상상만 해도 가슴이 쿵쾅댈 듯싶게 멋진 그림이다. 고석정에서 하강 고석바위 앞에 섰다. 화강암거석들이 엉켜 붙은 높이 15m의 고석대는 임꺽정의 아지트로 유명세를 탄다. 신라 때의 진평왕이 고석대(孤石臺) 위에 최초로 정자를 만들고 고려 충숙왕도 여기서 풍류를 즐겼단다.
그 정자는 6.25때 사라지고 벼랑의 고석정은 근래에 세웠단다. 한탄강이 고석대를 빙 둘러 흐르고, 강 양편엔 20~30m 높이의 절애가 요새처럼 휘둘러 쳐저 현상수배범 임꺽정에겐 천혜의 은신처였다. 양주에서 백정의 아들로 태어난 임꺽정은 문무에 출중했으나 천인출신이라 벼슬길이 막혀 의적단을 조직 탐관오리들의 재물을 훔쳐 빈자(貧者)들에게 나눠줬다. 그가 황해도 봉산과 재령, 구월산에서 의적활동을 하다 관군토벌대에 쫓겨 고석대에 숨어들었다.
임꺽정이 관군에 쫓길 땐 한탄강에 투신하여 고석대 바위굴에 숨은 통에 오리무중(五里霧中)한 그를 사람들이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그는 3년(1559~1562년)쯤 의적활동(?)했다. 벽초 홍명희의 소설<임꺽정>엔 고석정 이야기가 없다. 아마 사람들이 그를 아껴 쉬쉬하면서 입소문으로만 전한 탓일 테다. 고석대 꼭대기쯤에 동굴구멍이 있고 그 안에 10여명이 들어갈 수가 있는데 입구는 반대편에 있어 그냥 우람한 선바위로 보인다.
더구나 소나무가 바위틈에 자생하고 있어 은신처로써 최적이다. 한탄강부교 입구에 개표소박스가 있는데 관리인이 오늘은 입장할 수가 없단다. 아까 내린 눈이 한파에 빙판이 돼 부교길이 위험해서다. 낭패였다. 한탄강부교 위를 걸으면서 주상절리를 완상하려 4시간 반을 달려온 설렘을 어떻게 어디서 달랠 수가 있단 말인가? 맥이 풀렸다. 나는 고석정에 다시 올라 승일교 쪽으로 난 산책길을 향했다. J가 까짓 거 다음에 다시 오면 되니 점심부터 해결하잔다. 낙천적인 J는 늘 굼뜨는 편이라 영판 한량객이라.
빙하의 한탄강은 이따금 양지바르고 엷은 물길의 얼음을 깨뜨려 물의 노래를 들려주고 있다. 협곡 끝머리에 붉은 아취형 다리가 보인다. ‘콰이강의 다리’라고도 부르는 승일교(承日橋) 옆의 신설된 철교였다. 낡고 상처투성이인 승일교는 포도시 도보용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해방 후 철원이 북한 땅이 되자 김일성이 동송읍 쪽의 다리를 절반쯤 놓다가 6.25사변으로 중단, 수복 후엔 이승만이 갈말읍 쪽의 다리공사를 마무리하여 이승만의 ‘승’자와 김일성의 ‘일’자를 따서 승일교라 했단다.
콰이강의 다리와 신설 승일교와 철교 교각 아래서 조망하는 갈말 쪽 바위벼랑의 장대한 빙폭(氷瀑)은 장관 중의 장관이다. 높이 30m, 길이 100m쯤의 얼음폭포는 겨울한철에만 볼 수가 있는 고드름폭포다. 고드름폭포는 수많은 소나무들을 붙잡고 있는데 그 아름다움과 기이함은 감탄 외에 표현할 말이 궁색하다. 산책객들은 발길을 멈추고 탄성을 지르며 인증샷 하느라 망아(忘我)경에 빠져든다. 빙폭 끝머리에 왠 얼음바위덩이가 무수히 쌓였다.
그 밑으로 빙하수가 흐르며 자갈을 굴리느라 물거품을 일으킨다. 빙하의 계곡! 문득 칠레 파타고니아빙하가 떠올랐다. 다시 함박눈이 휘날린다. 한탄강이, 고드름폭포가 설무 속에서 아련히 피어오르는 몽유(夢遊) 같다. 아니 영락없는 극지(極地)다. 꿈결 같은 설무의 피날레는 금세 끝났다. 우린 순담골을 얼른 훑고 3;50분발 버스에 올라 백마고지역사를 향했다. 올 때 철원평야를 하얗게 뒤덮은 적설의 세계였는데 기이하게도 차도(車道)는 까만 색칠을 해 세상 끝을 향하게 해놓았다. 버스는 그 까만 길을 미끄러진다.
이 드넓은 철원평야를 미끄러지면서 궁예가 여기에 웅지를 튼 까닭을 상상케 했다. 불원간 다시 찾아와 한탄강 지오트레일을 완주하며 주상절리 멋에 취하고 싶다. 철원 주상절리길은 한탄강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에 등재됐다. 총연장 3.6km, 폭 1.5m의 주상절리길은 협곡의 잔도를 걸으면서 느낄 아찔한 스릴과 아름다운 풍경에의 감탄은 다음 기회로 미뤘다. 변화무쌍한 철원한탄강의 오늘의 날씨는 나를 희비의 흥분 속에 진한 추억 한 장을 선물했다. 아쉬움은 다음기회를 위한 에너지가 된다. 2022. 0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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