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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2021, 창경궁의 단풍

2021, 창경궁의 단풍

통명전지붕 위로 솟은 남산타워

세종이 상왕 태종의 거처로 지은 수강궁 터에 성종은 왕대비들을 편히 모시기 위해 지은 내궁이 창경궁이다. 그 창경궁을 일제가 조선조왕권을 폄훼하기 위하여 동물원으로 개조하여 유흥장 놀이터로 사용했던 곳이기도 하다  

▲돈화문금천의 단풍▼
함양문입구의 육모정
함양문계단에서 조망한 창경궁 뜰

뜰 앞에(우측)에 멋들어진 함인정(涵仁亭)이란 정자가 있는데 각종 연회와 공연이 행해졌다. 연산군때 왕의 남자 공길이도 여기서 공연했다. 뜰엔 구경꾼들이 인산인해를 이뤘을 테고.

▲춘당지▼

후원의 영화당 앞의 넓은 터엔 연못이 있었고 임금을 비롯한 신하들이 농사를 지었던 직영농지 '내농포'가 있었다. 임금과 신하가 손수 농사를 지어 백성들의 귀감이 되려한 원려였다. 근데 일제는 동물원을 만들면서 농경지를 파내고 큰 연못을 만들었던 것이다. 1980년대에 숲속의 호수를 조성하여 아름다운 춘당지로 거듭 태어나 창경궁의 명소가 됐다 

▲춘당지의 단풍▼
춘당지 섬
관덕정
▲관덕정의 단풍▼
대온실

순종이 거처를 창덕궁으로 옮기자마자 일제는 창경궁의 전각들을 헐고 동`식물원을 만들었다. 왕실의 권위를 훼손하려는 계략의 일종이었다. 대온실은 1909년에 최초로 개장한 서양식온실이다 

팔손이 꽃망울과 꽃
하귤
낙타가 끌려온 뜰(?)

1695년(숙종 21년) 4월, 창경궁 뜰에 느닷없이 낙타 한 마리가 나타났다. 동물애호가인 숙종이 거간꾼을 시켜 데려온 낙타는 대신들의 반대로 곧 철수시켰다. 그 낙타는 청나라 사신이 짐을 싣고 와 의주 파발마에 맡겨 둔 무리 중의 병 든 놈이라 사신이 버리고간 놈이었다. 그 놈을 대궐노비가 끌고 와 돈 받고 낙타구경시켜 떼돈을 벌었다. 그 소문을 숙종이 듣고 창경궁으로 모신(?) 거였다. 슬픈 낙타의 눈물에 숙종은 어땠을까? 풀어주라고 하명을 했으면 낙타는 의주를, 아니 중국까지 갔을지도 모른다. 낙타의 기억력은 새끼가 있는 곳이라면 천리길도 찾아간단다. 

팔각칠층석탑
낙엽을 쓸어담은 마포대- 한군데에 모아서 부엽토를 만드나?
경춘전 옆의 굴뚝과 단풍
통명전

통명전(通明殿)은 대비(大妃)들의 거처로  현판 글씨는 순조의 친필이다.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시기하여 전각 주변에 흉물을 묻고 굿판을 벌렸던 곳이기도 하다. 그 저주극이 발각되어 숙종은 장희빈에게 사약을 내렸으나 희빈이 거절하자 숙종은 직접 붙잡고 억지로 먹였다. 한때는 죽자살자 엉켜붙었던 두 연인의 사랑은 그렇게 비극으로 끝난다. 부부가 삐틀어지면 상원수가 된다는 말이 실감나는 비련이었다.

경춘전(좌)은 인수대비의 거처인데 성종 얼굴에 상채기를 냈다고 할머니가 격노하여 연산군의 어머니를 폐위시켰다. 연산군의 할머니이기도 한데 연산군은 어머니의 원한을 앙갚음하고자 경춘전 앞의 함인정에서 온갖 심술을 부렸다. 

통명전 옆의 금천교

춘당지에서 비롯한 개울을 금천 또는 옥천이라고 한다. 궁궐의 뒷산과 어울려 왕권을 신성시 한 길지로 여길만큼 사랑받았다. 금천 주변엔 각종 과실수를 식재했다 

성종대왕태실비 앞의 숲길

“첫 눈에 반한다(一見鐘情)는 말 따위는 믿지 않았소.

당신을 만나기 전에는 오래 기다리게 함을 서운해 마시고 이젠 나의 ​곁에 머물러주기를

당신의 ​온기와 당신의 그림자를 놓치지 않기 위해 복을 드리니

멈추어라! 아름다운 모습이여!”                     - 헌종이 경빈에게, <錫福軒記>에서 -

18살에 한 여인을 점찍어 3년동안 연정을 품다 21살에 그 그리움을 사랑으로 꽃피운 임금. 사랑이 만개하기도 전 23살에 요절한 왕의 순정한 순애보에 감동한다. 왕의 한 여인을 향한 5년간의 연모와 오롯한 사랑은 5천년 우리의 역사속에 누구였던가? 

모과 & 홍시 & 고양이, 고양이는 관덕정의 터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