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산(萇山) & 마고당(麻姑堂)
12월 문턱에 발 딛기 무섭게 한파가 극성이다. 달랑 하나 남은 달력까지 중압감을 더한다. 아내와 오피스텔을 나섰다. 부산날씨가 손 시릴 정도니 서울의 생물들은 꽁꽁 얼기 십상일 테다. 산님들로 붐비던 장산(634m)입구 체육공원도 휑하니 냉기만 팽배하다. 그래도 산자락을 파고드니 산의 온기 탓일까 안온하다. 어제 내린 겨울비가 계곡의 돌너덜을 뛰어넘는 물살을 자못 역동적이게 한다.
양운폭포수가 굉음을 내며 파란 소에 물보라를 일으킨다. 하얀 물보라는 흰 두루마기가 물살타고 춤추는 듯싶다. 사람들이 긴 막대를 들고 소를 휘저으며 두루마기를 건지려 야단났다. 끝내 두루마기는 건저지지 안했다. 두루마기 주인은 그길로 시름시름 앓다가 며칠 후 죽었다. 마을사람들은 그 비극의 원인을 마고할미의 노여움이라고 쉬쉬했다. 불과 50여 년 전의 일이다. 장산 중턱에 인근마을사람들이 산신제를 지내는 천제단과 마고당(麻姑堂 부산시 민속자료 제6호)이 있다.
천제단은 2천 3백년 전 장산국의 씨족마을사람들이 공동체로서의 일체감과 풍년을 기원하는 자연숭배사상으로 천신과 산신에게 1월과 6월에 제천의식을 올리던 곳으로 제단 위 벽에 ‘상산마고령상신위(上山麻姑靈上神位)’라 쓴 나무위패가 걸려 있다. 제를 주관하는 제관(祭官)은 제의(祭儀) 열흘 전에 부정 없는 마을 주민을 선정하고 금기생활을 하며 제물도 부정 타지 않은 정갈한 음식 몇 가지를 정해 정화수와 함께 올렸다.
근디 마을노인들이 갑계에 쓸 송아지를 잡아 제물로 올리고, 날씨가 워낙 더워 제관들이 두루마기를 벗어 신당 옆 바위 위에 얹어 놓았다. 이때 갑자기 두루마기 하나가 하늘로 날아올라 양운폭포 아래 가마소에 떨어졌다. 사람들이 달려가 소에 빠진 두루마기를 건지려 소동을 벌렸으나 허사였는데 알고 보니 두루마기 주인은 아내가 임신 중인지라 산신령의 신벌(神罰)을 자초했던 거였다.
양운폭폴 거슬러 오르면 거대한 바위와 돌들이 계곡을 뒤덮은 너덜겅을 만나게 되는데 천제단과 마고당 진입로 푯말도 있다. 빼곡한 숲을 뚫고 가파르게 이어진 조붓한 자연석계단은 낙엽 탓이기도 하겠지만 여느 등산로와는 분위기가 다르다. 너덜겅과 숨바꼭질을 하는 숲길에서 비껴 나와 너덜지대에 서면 계곡을 덮은 너덜겅바위에 넋을 빼앗긴다. 세상에 이런 바윗돌 강이 산자락 속에 있다니!
흡사 강 같은 너덜겅은 신기하고 장엄해 가슴팍의 응어리를 씻어내는 듯한 장쾌함을 안겨준다. 너덜겅은 해운대 마천루 숲을 통과해 바다로 이어진다. 바다에 발 담구고 장산에 등짝대고 온천에 몸 대우는 해운대를 사포지향(四抱之鄕)의 명당자리라 한다. 조선 중기학자 정조신은 저서 '순수역수기'에 '영구망해(靈龜望海)'라는 글을 썼는데 시인 김지하는 '영구망해'의 땅이 해운대 동백섬이라고 석명(釋明)했다.
‘신령스러운 거북이 먼 바다를 바라보는 땅’은 해운대 동백섬이라는 게다. 일찍이 신라의 최치원도 금강산에서 하산하여 해인사를 향하다 동백섬의 신령스런 기운에 반해 좌정했으니 영지(靈地)임엔 틀림없겠다. 오늘날 동백섬에 올라서면 선지자들의 탁견에 무릎 칠 수밖에 없다. 장산은 화산활동으로 분출된 화산재, 용암, 화쇄류가 쌓인 화산암산이다. 분출된 용암에 화산암벽들이 골짝에 떨어져 산의 경사면을 타고 흐르다 멈춘 암괴류(block stream)가 너덜겅이다.
그 장대한 너덜겅지대는 자연에 대한 경외심 이외 할 말이 없겠다. 암괴류 너덜겅 속에 삼한시대부터 산신제를 올린 천제단과 마고당이 있어 천·지·인이란 한민족전통사상의 유구한 역사를 유추케 한다. 갈색낙엽에 묻힌 마고당 숲길을 반시간여 헤치면 너덜겅지대에 돌담을 휘두른 마고당과 마주친다. 청기와 맞배지붕에 창방 위에는 ‘상산마고당(上山麻姑堂)’이라 쓴 현판이 걸린 본당과 산신을 모시는 산신단, 제기를 보관하고 제물을 장만하는 부속건물이 있다.
“홀어머니와 살던 마음씨 고운 고씨 처녀는 해마다 장산 천제단과 마고당에서 천신(天神)과 산신(山神), 지신(地神)을 뫼신 마고할미에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낸다. 고씨 처녀의 정성과 심성을 어여삐 여기던 선인(仙人)은 무지개를 타고 장산에 내려와 고씨 처녀와 백년해로하게 된다. 둘은 아들 10명, 딸 10명을 낳아 장산국(萇山國)을 지상낙원으로 가꾸었다….” 지금도 공연 중인 창작시극 '장산국'의 내용이다.
천제당은 마고당 북쪽70m쯤 산중턱 기슭에 거석으로 만든 제당으로 신선이 내려와 놀았다는 신선바위 뒤에 바위제단을 한 단 더 높게 쌓고 제단 뒤쪽의 바위에는 천신·지신·산신을 상징하는 신격의 입석 3기가 있다. 제단 위 벽에 ‘상산마고령상신위(上山麻姑靈上神位)’라 쓴 나무위패가 걸려 있다. 천제단 입구의 너덜겅 아래로 석간수가 고이는 샘물이 있어 정화수로 사용했었는데 지금은 손길이 뜸해선지 정갈해 보이질 않아 마시고 싶질 안했다.
제의는 인근의 운촌, 중동, 미포, 장지, 오산, 좌동 여섯 마을에서 윤번제로 하다 1996년까지는 좌동마을 주민을 대신해 폭포사 주지스님이 망제 형식으로 제의를 대행해 왔다. 천제단을 뒤로 하고 정상을 향하다 8부 능선을 가로지르는 등산로를 걷다보면 암괴류의 너덜겅지대를 대여섯 번 만나게 되는데 널빤지바위에 앉아 영구망해를 조망하는 뜻 깊은 맛도 상서롭다. 억새의 춤사위가 장산의 혼백처럼 산등을 탄다. 그 억새밭 속으로 울`부부도 발길을 들여놨다.
우리나라엔 강화도 마니산 첨성단, 지리산 노고단, 태백산 천황단이 장산의 천제단처럼 신에게 제사 지내는 제천단(祭天壇)이 있다. 가뭄과 홍수가 두렵고 천둥과 번개가 두렵고 일식과 월식이 두렵던 시절 제천단은 간절한 기도처요, 마을사람들을 일체감으로 묵는 공동체와 번영을 기도하는 성소였다.
“해와 땅 중간쯤 / 돋보기를 들이대면/ 빛이 모여서/가장 뜨거워지는 곳/당장이라도 불붙어/ 불기운이 하늘에 닿을 것 같은 곳/ 그 옛날도 그랬네/ 하늘까지 닿은 불기운 분수처럼 퍼져서는/ 사방천지 김 나는 돌을 뿌렸네/ 시름 깊어진 사람들/ 가장 뜨거운 곳 찾아 돌기둥을 쌓았네/돌 위에 돌을 얹고서/불기운 꾹꾹 눌렀네/지금도 해가 뜨거우면/함께 뜨거워지는 그 때 그 돌들/그 옛날도 그랬네/불기운 식히려고/저 앞에 흥건히 고인/ 해운대 바닷물” 동길산 시 <장산 천제단> 2021. 12.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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