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악산의 만추(晩秋)
아침하늘에 구름 한 점 없이 맑다. 요 며칠간 급강하한 날씬 강원산간에 적설이, 엊그젠 관악산정상에도 첫눈이 내렸다고 호들갑이다. 늦가을 관악산의 얼굴을 보러 사당역을 나섰다. 관음사뒷등에서 관악능선을 타고 연주대에 올라 자하동천계곡을 타고 과천에 이르는 코스를 밟을 참이다. 관악능선은 관악산등산로 중 젤 스릴과 전망이 좋은 곳으로 나는 6년 전에 첫걸음을 했었다.
물개바위 등에 올라 찍은 사진은 지금도 나를 흥분케 한다. 관악능선은 초장부터 빡센데 산님들이 꼬리를 물었다. 코로나19는 등산객들을 많이 양성해 자연사랑의 동인이 됐음직하다. 산에 오르고 산이 주는 묘미에 빠져 사랑하게 되는 호연지기의 삶은 행복바이러스를 뿜어 온 사회를 건강케 한다. 코로나19는 특히 많은 젊은이들을 산님으로 만들었지 싶다.
갈 곳 마땅찮은 청년들이 행복바이러스 찾아 나선 곳이 산이란 걸 자각한 소이다. 320봉,333봉,369봉을 오르내리는 곡예등정은 등산의 매력에 빠져들게 한다. 하얀 각설탕을 쌓아놓은 서울이란 도회를 휘감고 있는 산세들을 조망하면서 나름의 애환이 묻힌 곳을 보물찾기 하듯 알아내는 재미도 쏠쏠하다. 신기루 같은 각설탕 속 어딘가에서 잠시 꺼낸 기억의 쌉싸름한 추억은 망각했던 나를 찾는 낭만이기도 하다.
일상탈출 속에서 낭만 좇는 타임머신여행이라니! 산이 베푸는 선물이라. 하마바위,마당바위,417봉,659봉을 통과하는 비정규코스의 암벽코스는 짧지만 밧줄에 몸을 맡겨야해 밀려드는 산님들이 꽃뱀처럼 꼬리를 숨겼는데 대게 청춘남녀여서 좋았다. 산도 젊은 청춘들이 산 사랑을 해야 산세도 풍요로워지지 싶다. 관악산의 나무들은 말라깽이 관목이 많다.
특히 소나무는 영양가 없는 바위에서 몸부림친 일생을 보여주고, 바위는 골수를 짜내느라 부스러져 칼바위가 없다. 관악산의 바위는 모난 데 없어 더 사랑받는다. 연주대(戀主臺)는 인해(人海)였다. 세조임금이 저 위 영주대(靈主臺)에서 기우제(祈雨祭) 지내던 행사를 리바이벌한다는 건가? 연주대 넓은 바위에서 마당놀이 한 판이라도 벌릴 참인지 북새통을 이뤘다.
입장티켓인지 인증 샷 티켓을 끊을 산님들은 마당 뒤로 50여m 줄을 섰다. 이성계가 역성혁명으로 조선을 세우자 고려유신들이 이곳에 모여 지난 시절을 그리워한데서 연주대라 불렀다는 정상에서 오늘의 젊은이들은 누구를 그리워함인가? 그나저나 연주대근처의 웅덩이를 찾아볼 염두는 접어야 했다. 관악산은 풍수지리학상 화기(火氣)가 강한 화산(火山)이라 잘못하면 한양이 불바다가 될 수 있다고 숭례문 현판을 세로로 세웠다.
연주대부근 어딘가에 연못[南池]도 팠단다. 또한 경복궁 양편에 해태상을 만들어 화마를 막았으며, 관악산에 물동이를 묻었다. 정상 부근에 파놓은 연못을 찾아보려 했는데 사람바다가 됐다. 지금 혹여 화마가 불꽃 튀겨봤자 저리 많은 인파가 소방수가 될테니 기 죽었지 싶다. 관악산(冠岳山632.2m)은 꼭대기가 큰 바위기둥을 세워 놓은 모습이라 ‘갓 모습의 산’이란 뜻의 ‘관악(冠岳)’이라고 했다.
미쳐 다 헬 수 없을 암봉들과 기형적인 나무들로 촘촘히 얽힌 바위산은 마치 금강산과 같다 하여 소금강(小金剛)이라고도 한다. 연주대를 빠져 연주암으로 내려서는 길목에서 조망하는 연주대와 관악송신소, 기상레이더의 연봉들은 기막힌 풍광을 연출한다. 죽순처럼 솟은 주상절리[石筍絶崖] 기암절벽위의 연주대에는 응진전(應眞殿)이라는 불당이 있는데 금방 무너져 내릴 듯 아슬아슬하다.
불당은 바위틈새를 비집고 오르는데 코로나19땜인지 출입금지였다. 응진전은 677년 의상대사가 세운 암자란다. 태조는 연주대에 친히 올라 국운을 빌며 원각(圓覺)·연주(戀主) 두 절을 지었는데, 태종 때 동생인 충녕(세종)에게 왕위를 양보한 양녕대군과 효령대군이 암자에 머물면서 연주암으로 옮겼다. 두 대군은 세종을 그리면서 왕권의 무궁을 기원했다. 연주암은 산님들의 쉼터 겸 기갈 해소처가 됐다.
연주암 경내엔 산님들이 빼곡 찼다. 점심때 산님들에게 점심공양을 해 나도 두 번 포식했었는데 코로나19로 문 닫았다. 자하동천계곡을 따라 하산한다. 이 높은 골짝에 물소리가 살갑다. 낙엽 직전의 단풍이파리들이 관악의 만추를 춤춘다, 돌계단을 덮은 누런 낙엽들이 발부리에 채이며 내는 신음소리가 골짝기슭으로 번지고. 가을 낙엽 밟는 소리는 구르몽이 아니어도 시심(詩心)이 절로 난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낙엽의 신음소리는 골짝을 내려올수록 물소리에 파묻힌다. 조그만 폭포가 있고, 그 아랜 풍경을 담은 소(沼)가 있다. 오케스트라연주를 듣는 계곡산행의 스페셜코스다. 물길에 닳고 닳은 바위를 유심히 보면 발자국이 보인단다. 관악산에 큰 별이 떨어진 곳 - 낙성대에서 태어난 강감찬장군의 발자국이라. 강감찬은 체구는 작지만 체중은 상당하여 바위에 오르면 발자국이 났단다. 오늘날 강감찬이 재림(再臨)하길 고대하는 사람이 많을 것 같다.
비바람을 몰고 오는 천둥벼락에 사람들이 아우성치자 강감찬은 하늘의 벼락방망이를 없애려고 산을 오르다 칡덩굴에 걸려 넘어졌다. 뿔따구가 난 강감찬은 산의 칡을 죄다 뽑아 버렸다. 산촌 사람들은 밭뙈기의 칡덩굴걱정 없이 농사를 지었다. 수목성장의 장애물인 칡덩굴 재거가 아니라도 강감찬의 노련한 책략이 그립다. ‘귀주대첩’같은 묘책으로 미중갈등에 시달리는 지금 우리네의 난제(難題)들을 해결해 안심하게 말이다.
양녕대군이 어느 날 스님에게 준 오언절구란 시가 유명하다.
“山霞朝作飯 산노을로 아침밥을 짓고
蘿月夜舂燈 여라(女蘿)의 덩굴에 걸린 달이 불을 밝히네
獨宿孤巖下 홀로 외로이 바위 아래
惟存塔一層 오로지 탑 한층만이 남아있네”
*여라(女蘿) ; 선태식물에 속한 이끼의 한 가지. 암수딴그루로 나무 위에 난다. 줄기는 실처럼 가늘고 길며 몸에 광택이 있다. 포자낭(胞子囊)은 달걀 모양이다.
과천향교 앞 자하동천골짝은 단풍이 절정을 이뤄 황홀하기 그지없다. 앙상한 이파리들을 붙들고 있는 만추의 관악산행이 좀 아쉬웠는데 단풍터널을 통과하는 피날레의 환희라니! 관악산은 언제 찾아도 흐뭇하게 하는 소금강산이라. 향교가 왜 여기에 자리한지 알 듯 싶다. 하루를 행복하게 해준 관악산을 그리며 희열에 잠긴다. 2021. 1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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