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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 길 - 산행기

청계산 만경대의 비경과 비사

청계산 만경대의 비경(秘境)과 비사(秘史)

만경대

청계산의 하오고개-청계사-국사봉-이수봉-만경봉-혈읍재-매봉-옛골을 잇는 누비길은 청계산의 비경과 비사를 켜켜이 품고 있는 젤 사랑받는 코스다. 오전10시 청계사문에 들었다. 청계산은 고려말 이성계가 역성혁명을 일으키자 고려의 충신들이 앞 다퉈 은거했는데 이색(李穡)은 청계사에 은둔하다 이성계의 간청을 받고 개경 송도를 향한다.

청계사

궁궐에 들어서자 이성계가 반가이 맞아들더니 옥좌에 오르는 게 아닌가. 배알이 꼬인 이색이 뱉는다.     "옛정을 잊지 않기 위하여 찾아왔을 뿐 형(이성계)에게 신하의 도리를 하러 찾아오지 않음이라" 라고 한마디를 남기고 홀연히 발길을 돌렸다. 이성계는 낭패였지만 아들 이방원(李芳遠)이 포은 정몽주를 죽인 선죽교사건이 떠올라 우두커니 하늘만 쳐다봐야했다.

지장전과 석가모니열반모습의 와불(臥佛)을 참배하고 국사봉을 향하는 누비길에 들었다. 가파른 산길의 울창한 숲은 녹음터널의 절정인데 낙엽 또한 수북이 길섶은 덮었다. 지천으로 깔린 도토리가 계절의 사이 길을 뒹굴고. 1392년 조준, 정도전 등이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자 신하들은 불사이군(不事二君)을 아뢰며 두문동(杜門洞)으로 떠나고 백성들은 이성계를 욕하면서 외면했다. 설상가상으로 심복 정도전이 난을 일으킨다.

신덕왕후 강씨 소생인 의안군 방석을 세자로 봉하고, 신의왕후 소생인 왕자를 모살하려다가 정안대군에게 죽임을 당한 '정도전의 난' 후유증에 이성계는 사람(인재)이 그리웠다. 국사봉(國思峰540.2m)에 올라섰다. 노송 한 그루가 우산처럼 선 뒤로 관악산이 다가선다. 청계산에 은거하던 조준(趙浚)이 조선개국공신이 된 동생 조견(趙狷)이 조정에서 함께 일하자고 간청했지만 마이동풍한 채 여기에 올라 고려의 멸망을 슬퍼했던-국사봉이라.

성낄 급한 단풍나무는 심심찮게 단풍꽃을 피웠다

마침 쉬고 있던 산님이 인증샷을 해 주겠단다. 이수봉을 향한다. 아까까지 활엽수속에서 드문드문 위용을 뽐내던 소나무들이 떼거리로 솔 춤을 추기 시작한다. 어떤 놈은 울퉁불퉁한 바위와 스킨십을 하느라 눈길도 안준다. 연애는 그렇게 정신 팔리는 법이라는 듯~! 산행의 별미는 암송의 연애질을 훔쳐보는 맛깔일 것이다. 근디 뜬금없이 성깔 있는 단풍이 울긋불긋 꽃처럼 피었다. 가을이 그렇게도 좋을까? 아서라! 십일 홍이라 했다.

정여창이 두 번이나 목숨 건진 걸 축하 하는 듯 소나무는 군무를 춘다

이수봉(二壽峰)은 소나무춤판이다. 정여창(鄭汝昌)은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여기 난무하는 소나무숲에 숨어 아슬아슬 위기를 모면했던가 보다. 스승 김종직과 벗 김굉필이 연루된 연산군의 폭정에 두 번이나 살아남을 수 있게 송림에서 정여창을 생각하며 어슬렁댔다. 한편 야은 길재(吉再)는 이성계가 '박사'호까지 추증하지만 입궁도 않고 어머니 공양핑계를 대며 편지만 전하고 입산한다. 김자수도 끈질긴 초청에 못 견디어 사당에 들어 음독자살하니 이성계는 간담이 서늘해졌다.

혈읍(血泣)재에 닿았다. 고개마루 넓은 쉼터에 산님들의 점심이 한참이다. 정여창이 무오사화로 스승 김종직이 부관참시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피(血)눈물을 흘(泣)리며 은거지인 하늘샘(금정수)을 오르내렸던 고개였다. 그 하늘샘 찾는 걸 포기하고 만경대를 오른다. 빼곡한 송림을 뚫는 된비알 산길은 군부대가 만경대 오르는 걸 막아선다. 철조망을 따라 비정규코스를 미로 찾기 하듯 험한 곡예 길을 헤쳤다.

만경대쌍암

그 험한 미로는 모험할 만한 신비경을 연출했다. 바위절벽을 기어오르내리는 협곡엔 위험한 만치 스릴과 볼거리가 많다. 골짝 한 구석의 붉게 타는 단풍은 옥빛 하늘을 수놓았다. 적막이 음침한 골짝을 배회한다. 드뎌 산정 아래 단애에 올랐다. 산정의 석대가 망천대이다. 만경대 바위 숲에서 만끽하는 풍광과 오찬은 천상의 맛깔이었다. 하늘을 떠받는 바위 망천에 오르면 눈앞에 만경(萬景)이 전개된 데서 만경대라 했다.

조윤(趙胤)이 만경대 아래 마왕굴에 움막을 짓고 고려의 재건을 꿈꿨던 은거지가 여기다. 철조망 따라 만경대를 한 바퀴 돌았다. 조윤이 지리산에 은둔할 때 이성계가 임명한 호조판서의 벼슬을 반환하고 이름을 견()으로, 자를 종견이라 개명했다. 즉 나라와 임금을 잃고도 죽지 못하니 '개와 같다'함 이였다. 글면서      "아우 조종견은 물러가오. 형[이성계]은 역신의 영화를 길이길이 누리시오" 이렇게 이성계를 조롱하며 은둔처를 찾아 헤매다 청계산 만경대를 찾아들었던 것이다.

군시설로 만경대는 출입금지다

조윤도 아마 내가 앉아있는 바위에서 헬 수 없는 시간을 망국의 한에 혈읍 했을 테다. 매봉을 향한다. 매의 날개형상이란 매바위엔 공사판으로 어수선하다. 청량산 누비길은 자연친화적이어서 좋은데 설마 공작물 설치하는 건 아닐 것이다. 매바위와 매봉엔 산님들로 북새통이라. 옛골이나 원터골 쪽에서 등반한 산님들이라. 살가운 산님들이 인증샷을 해 주겠다고 해 기뻤다. 홀로 산행을 하는 탓에 내 사진이 없는 편인데 오늘은 모델도 됐다.

돌문바위를 세 번 돌았다. 합장을 하고 세 번 돌면 청계산 정기를 받아 소원이 이뤄진단다. 길마재 팔각정을 경유 원터골 쉼터정자에서 미적대다 진달래능선을 등정하며 청계산입구역을 향했다. 전망이 좋다는 진달래능선은 수목 탓에 별로였다. 어찌됐던 청계산의 진면목은 국사봉에서 만경대를 경유하는 매봉까지의 8km남짓이 하이라이트일 것이다. 청계산의 옛 이름은 청룡산으로 청룡이 승천했단 전설에서 유래된 이름이었다.

돌문바위. 합장한 채 세 번 돌면 청계산의 정기를 받아 소원성취한단다

원터골로 흘러가는 골짝물길소리가 은근하다. 청정계곡이어 설까? 알 수 없는 버섯꽃이 낙엽 속에서 가을햇살을 탐한다. 어쩌다 눈에 띈 참나무말굽버섯을 따러 숲속에 들었다가 세 송이를 채취했다. 사진으로만 봤던 말굽버섯을 첨으로 채취하는 행운이라니! 귀가하여 인터넷으로 확인하며 희열에 젓는 뒷맛이란~! 가을 청계산이 선사한 다섯 시간(11km)의 열락은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2021. 10. 20

길마재
네모안의 그림은 천남성과 열매
천개사
청계골의 메타쇄콰이어
청계사의 와불, 부처님의 열반상이다
국사봉을 오르는 된비알 참나무숲은 도토리천국이었다
국사봉에서 조망한 관악산과 서울
▲청계산의 단풍 침투▼
몽돌바위
청계산 소나무는 명표를 네다섯 개 달았다. 안타까운 건 쇠못을 이용한 게 있었는데 소나무의 아픔을 망각했을까? 
헬기장과 쉼터
국사봉에서 매봉까지는 신바람 난 솔춤에 취해 고됨을 잊는다 
만경봉등로는 여기서 우회한다. 앞에 군시설 철조망이 보이는데 만경봉비경은 철조망길을 택해야 한다
만경봉의 악어대가리
▲만경대에서 조망하는 서울시가지 일부▼
산능선 파도 너머 관악산이 하늘금을 그었다
엄지바위
▲만경대골짝의 단풍과 마른 고엽▼
 
버섯나무 & 영지버섯과 가지버섯
말발굽버섯(좌 아래)
청계사-국사봉-이수봉-만경대-혈읍재-매바위-돌문바위-길음재-원터쉼터-천개사-원터입구, 약 11k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