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석날에 찾은 광혜원(廣惠院)
견우와 직녀가 게으름피우자 옥황상제가 뿔따구가 나서 그들 사이로 은하수를 만들어 떼어놓았다. 그 사연을 딱하게 여긴 까치와 까마귀가 해마다 칠월칠석날 머리를 모아 다릴 놓아서 두 연인이 해후하게 한 칠월칠석이 오늘이다. 연희캠퍼스 백양로를 거니는데 햇살이 쨍하다. 말복(末伏)이 지나선지 아님 캠퍼스의 녹음이 살랑대서인지 햇볕은 따갑질 않다.
아마 260년 전(1762년 윤5월) 사도세자가 뒤주 속에서 8일간을 버티다 절명했을 때도 후덥지근한 이맘때였지 싶다. 외아들의 비극에 통탄하다 2년 후 세상을 뜬 영빈이씨(暎嬪李氏)의 무덤이 연세백주년기념관 옆에 있어 발길을 옮겼다. 수경원(綏慶園)인데 지금은 광혜원이라 한다. 사도세자의 부왕인 영조가 여기에 영빈이씨의 묘를 쓰고 '의열묘(義烈墓)'라 했다.
의열묘는 1788년(정조 12)에 '선희묘(宣禧墓)'로, 1899년(고종36)에는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되면서 '수경원'으로 승격했던 것이다. 그 수경원의 낡고 작은 대문을 들어서니 인적 없는 잔디마당 저만치에 ‘광혜원(廣惠院)’현판을 단 기와집이 고즈넉하다. 우측에 정자각(丁字閣)이 있고 좌측엔 비각(碑閣)이 있다. 대문과 정자각 담장 밑에 석물(石物)들이 나열돼있고-.
근디 정자각 뒤 언덕에 있어야할 능침(묘)이 없다. 1969년 서오릉으로 이장하면서 비석도 옮겨 비각도 텅 비었다. 제사 지내는 정자각은 박물관(?)시늉을 내고 있다. 1885년에 설립한 광혜원이 석유재벌 세브란스의 자금으로 의학전문학교로, 1886년 설립된 구세학당이 1917년에 연희전문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여 1957년 두 학교가 통합하니 연세대학교다.
1884년 12월4일 ‘3일천하’로 끝난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그날 밤 명성황후의 조카 민영익이 칼 맞아 중상을 입자 한국에 온지 2개월 된 앨런은 석 달간 헌신적으로 그를 치료하여 완치시켰다. 왕실의 신망을 얻은 앨런은 1885년 1월 고종에게 ‘서양식병원을 설립하여 무보수로 일하겠다.’는 건의서를 올리자 고종황제는 갑신정변에 연루돼 사형된 홍영식의 집을 하사했다.
앨런은 4월10일 옛 창덕여고 자리에 한국 최초의 서양식병원 ‘광혜원’을 개원한다. ‘은혜를 널리 펼친다’는 뜻의 광혜원은 보름 뒤 ‘대중을 널리 구한다’는 제중원으로 개칭했는데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의학교육이라. 제중원엔 며칠 전 입국한 언더우드 선교사가 머물고, 감리교의 스크랜턴 선교사도 6월까지 의사로 활약했다. 또 1885년 여름에 장로교 의사인 헤론 선교사가 1886년엔 최초의 여의사 엘러즈도 입국 봉사한다.
정부에선 전국에 공문을 보내 의학도 16명을 선발하여 3개월 교육 후에 12명을 최종선발 의사교육을 받게 했다. 연세대가 1987년 4월10일, 개교 100주년을 기념해 옛 영빈이씨 묘역에 광혜원을 복원한 역사적 의의다. 능침자리엔 루스체플이 들어섰다. 광혜원과 백주년기념관사이 동산에 이한열열사 기념탑이 있다. 백주년기념관 옆으로 학생회관, 대강당, 경영관이 나란히 들어섰다.
광혜원을 뒤로한 나의 발길은 스틸스관과 아펜젤러관, 언더우드관과 연희관 앞을 지나 안산솔밭길에 들어섰다. 무악정과 봉수대에 오르는 등산로와 이어지는 숲길을 한 시간 반쯤 산책하면 울`아파트에 닿는다. 안산초록숲길과 연세대캠퍼스를 관통하는 백양로를 나는 이따금 산책하면서 젊은 날을 소환하는 타임머신여행을 즐기기도 한다. 큰애가 연대입학시험을 치룰 때와 졸업식 때의 뿌듯하고 달떴던 정경들이 파노라마 되는 그리움의 시간이 좋아서다.
몇 년 후면 큰애가 지네 아들 대학입학시험을 치룰 테다. 그렇게 세월은 흐르고 역사는 차곡차곡 수 놓이며 순환하나 싶다.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음에 이르게 하고, 어머니 영빈이씨의 통한의 묘소가 의학의 요람이 되며 사도세자의 아들이 정조임금이 되어 탕평에 진력하듯이! 나의 삶도 후손들에게 반추될 터이다. 어찌 허투로 살 수 있으랴. 청명한 오늘밤 견우와 직녀의 뜨거운 포옹을 기대한다. 2021. 08.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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