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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 그 여적

지옥문이 된 숭례문

지옥문이 된 숭례문

서울 숭례문 아래 홍예문 천정에는 용이 그려져 있다. 용은 왕의 권위와 권력을 상징한다. 영조 때는 이 남대문 앞에서 역적 처형식이 열리곤 했다. 1755년 여름에 벌어진 처형은 권력 콤플렉스와 정통성 시비에 시달리던 영조의 광기가 적나라하게 폭발한 사건이었다. /박종인 

1755년 초여름, 후덥지근한 날씨에 대취타(大吹打)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왕이 갑옷을 걸치고 숭례문 누각에 나타났다. 아까 창경궁 선인문 궐내각사 내사복(內司僕) 마당에서 윤혜(尹惠)를 심문하다 뿔따구나 난 영조가 궁궐에서 나와 중인환시할 수 있는 숭례문으로 심문자리를 옮긴 참이다. 내사복마당에서 왕의 친문에도 윤혜가 묵비권을 행사하자 격노한 왕은 형리에게 붉은 방망이(朱杖)로 매우 치라 명했었다.

조선 21대 국왕 영조(1694~1776) /국립고궁박물관 

그 정황을 지켜보던 노론의 원로 영부사(領府事) 김재로가                                                   “전하께서 매양 급하시기에 실정을 알아내지 못하십니다.”라고 아뢴다. 그러자 영조가                     “급하게 해도 실토하지 않는데, 느슨하게 하면 실토하겠는가?”라고 쏘아붙이고는 보여(步輿)를 타고 궁궐을 나서 종묘에 들러 선영께 음참한 후 곧장 남문(南門숭례문)으로 직행한 참이었다. 대노한 왕의 기세에 숭례문주위 분위기는 두려움과 공포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영조는 끌려온 윤혜에게 한차례 고문을 치르게 한 후 다시 심문한다.

1755년 노론 정권과 영조에 저항하는 괘서(掛書)가 걸렸던 전남 나주 객사./박종인 출처:  

 “문서를 누가 썼는가?”                                                                                         “심정연이 짓고 내가 썼다”고 자백했다. 득의만만한 영조는 문무백관을 차례차례 기립시키고 훈련대장 김성응에게 윤혜를 참수하여 헌괵(獻馘.목을 매달아 보이라는 명)을 명하며                                     “이 어찌 내가 즐거이 하는 일이겠는가!”라며 자조한다. 이때 영의정을 지냈던 판부사 이종성이 “하급관리가 할 형 집행을 어찌 지존(至尊)께서 하시나이까.”라며 읊조렸다. 그러자 영조가 상을 손으로 내리치며 고함을 질렀다.

이인좌의 반란군에 맞섯던 목천지방 16인의 선비들의 호국정신을 기리기 위한 충의비

 “그대는 나를 하급관리 취급하는 것인가!”라고 힐난하며 그 자리에서 이종성을 부처형(付處刑)에 처해 충주로 귀양 보낸다. 그렇게 뒤숭숭한 판에 헌괵이 좀 늦어지자 백정 김성응에게도 곤장형을 치루고 충청도 면천으로 부처형을 내렸다. 윤혜의 목이 깃대 끝에 매달렸다. 왕은 문무백관에게 수차례 헌괵을 조리 돌리게 하곤 거나하게 취해 천막에 들어가 드러누웠다. 살벌하고 으스스한 숭례문밤공기는 취타소리에 더더욱 음산했다. 인정(人定‧밤10시)이 지나고 새벽에 깨어난 왕은 그제야 환궁했다.

영조의 비극의 시작은 30여 년 전(1720년)에 시작된다. 경종 즉위 1년여 후 조정을 쥐락펴락 한 노론은 경종에게 이복동생 연잉군을 왕세자로 택하라고 강청하자 꼭두각시 왕이나 다름없는 경종은 연잉군을 세자책봉 했다.(1721년 8월 20일 ‘경종실록’) 그러고 두 달 후 노론은 다시 경종더러 연잉군에게 왕위를 물러주고 대리청정 할 것을 요구한다.

이인좌의 난을 묘사한 '역모'

이때 소론 김일경이 상소를 올린다.                                                                           “저(노론) 무리들이 벌써부터 전하를 군부(君父)로 대접하지 않고 또 스스로 신하로 여기지 않는다(彼輩旣不以君父待殿下 亦不以臣子自處也)”라고-.                                                                   경종은 자신의 흉금을 대변한 전직관리 김일경이 미뻐보여 이조참판으로 등용하고 노론의 거두 네 대신들을 유배형에 처했다. 노론을 내치고 소론이 권력을 잡아 세상을 평정하나 싶었다. 근디 3년도 안 돼 경종이 갑자기 승하한다. 노론은 잽싸게 연잉군을 등극시키니 영조다.

다시 노론세상이 된 조정은 소론한테 하늘이 노래졌다.(1721. 12월 6일 ‘경종실록’) 영조는 숙종과 무수리 사이의 소생이었다. 노론세력에 의해 등극한 영조는 정통성 콤플렉스에 시달린다. 조정을 비난하는 괘서(掛書·대자보)가 난무했고, 1728년엔 영남 남인들이 주축이 된 ‘이인좌의 난(무신란‧戊申亂)’이 발발했다. 경종의 사인에 의혹을 품고 영조는 숙종의 친자가 아니니 폐위시켜 밀풍군 탄(密豊君坦 : 昭顯世子의 曾孫)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었다.

6개월 만에 무신란이 평정되자마자 1755년 나주객사 망루에 ‘간신이 조정에 가득하여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다.’라고 쓴 반정부 대자보 - 괘서 사건이 터졌다. 포도대장을 시켜 탐문하니 1724년 영조즉위 후 역적혐의로 처형됐던 윤취상의 아들 윤지(尹志)가 제주도에 유배됐다 나주로 옮겨 쓴 괘서였다. 노론은 이를 역모 사건으로 확대 재생산시켰다. 영조가 직접 윤지를 심문하고 서울에 있는 소론 인사들을 체포해 고문을 했는데 윤지는 끝까지 버티며 곤장을 맞다 죽었다.

영조는 윤지의 아들 윤광철의 참수현장에서 잘린 목과 팔, 다리를 저자거리에 걸도록 명했다.(1755년 3월 8일 ‘영조실록’) 두 달 후 영조는 역적을 토벌했다는 자축기념으로 특별과거시험[討逆庭試]를 실시하여 합격자10명을 직접 뽑고 답안지를 훑다가 울분에 상을 내쳤다. 난언패설(亂言悖說)로 채워진 종이엔 금기 사항인 선왕(先王)들 이름까지 적혀 있었다. 범인(?)은 1728년 무신란 때 처형당한 역적 심성연의 동생 심정연 이었다.(1755년 5월 2일 ‘영조실록’)

영조의 직접심문에                                                                                             “내 일생 동안 가진 생각이기에 시험장에 들어오기 전 이미 써둔 글이다. 어떻든 왕에게 음흉한 말을 했으니 내 흉한 마음이 탄로 난 셈이다.”라고 실토했다. 자백 중에 나주 괘서 사건 주모자 윤지의 사촌 윤혜가 끼어 있었던 것이다. 그 꼬투리로 윤혜의 형과 아우도 이날 억울하게 곤장을 맞아 죽었다. 지난번에 사촌 윤지와 윤지의 부친까지 처형 됐으니 멸문지화를 당한 셈이다.(1755년 5월 6일 ‘영조실록’)

숭례문(남대문)

문예부흥을 일군 왕으로 회자된 영조는 숙종과 무수리 소생이라는 자격지심에다 이복형을 죽이고 노론세력에 의해 꿰찬 왕이라는 소문이 피해망상증에 시달리게 하였지 싶다. 그런 울분(?)의 응어리가 괘서사건으로 폭발한 게 숭례문(崇禮門) 앞의 광기에 찬 친국처형 이였지 싶다. ‘예를 숭상한다“는 뜻의 숭례문은 영조의 등극콤플렉스에 잠시 피비린내 낭자한 지옥문이 됐던 것이다.      2021. 07

# 박종인의 <1755년 남대문에서 폭발한 영조의 광기(狂氣)>에서 간추려 발췌함

소론 반역자들에게 지옥문이 돼 버린 남대문. /박종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