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악산(白岳山),인왕산 & 한양도성
설 연휴 마지막 날 소풍가듯 집을 나섰다. 돈의문 쪽에서 한양도성을 따라 인왕산정을 밟고, 창의문을 통과 백악정상에 올라 숙정문을 돌아 말바위안내소를 거치는 산성탐방에 나서기로 했다. 백악`인왕산이 높지는 않지만 가파른 바위산이라 네 댓 시간은 헐떡거려야 할 테다. 해골바위 옆구리를 지날 때의 한양산성 돌계단 길엔 인파가 꼬리를 물더니 곡장 턱밑의 바위잔도에선 가다 서다를 반복한다.
미세먼지 탓에 뿌연 시계이긴 하지만 서울중심부가 발아래 펼쳐지는 수묵화의 파노라마는 빡센 바위타기를 그나마 수월케 한다. 한양도성 인왕곡장입구에 올라섰으나 군 시설인 여긴 아직 미공개다. 작년11월 한양도성의 군 시설들이 대게 철수하고 개방 됐는데 이 요새는 빗장을 열순 없나보다. 인왕곡장은 무지랭이인 내가 봐도 요새중의 요새다. 인왕정상에선 인증샷 하려는 인파로 북새통이고 제법 넓은 공지는 휴식처가 됐다.
코로나19로 갈 곳 잃은 젊은이들의 엑서더스 피난처가 된성싶다. 산속을 조금이라도 기웃거려 본 사람이라면 서울에서 살고 있다는 행운을 절감할 것이다. 다람쥐 쳇바퀴 도는 일상탈출의 해방구로 멋진 산들이 주위에 빙 둘러있어서다. 창의문을 향하는 산성여장(女墻)의 가르마가 백사처럼 계곡을 향하는데 성곽 밖의 기차바위는 홍은동쪽으로 출발하려한다. 글고 저 멀리 북한산의 희멀건 바위능선이 하늘 금을 그으며 팔 하나를 백악산으로 뻗치고 있다.
윤동주시인 언덕에서 잠시 쉬었다 창의문(彰義門)에 들어섰다. 개성의 아름다운 자하동 계곡 같다고 자하문(紫霞門)이라고도 하는데 태조 5년 한양도성을 축성하면서 건립됐다. 창의문 천장 아래 현판이 걸려 있는데 1623년 인조반정 때의 정사공신1등부터 3등 공신까지의 52명의 이름이 적혀 있는데 출입금지다. 인조반정 때 이괄이 선두에서 창의문을 돌파 반정을 성사시켰는데 1등 명단에서 누락되자 불만을 품고 1년 후 반란을 일으켰다.
이른바 ‘이괄의 난’이다. 그는 반군을 이끌고 창의문을 통과 경복궁을 점령해 하루천하를 했던, 외침 아닌 내침으로 창의문을 두 번이나 유린한 위인이다. 풍수지리설에 창의문 밖 지세가 지네 같아 그 기운을 누르기 위해 무지개 모양의 아치형문 위에 천적인 닭을 그린 홍예문(虹霓門)이라 출입이 뜸했는데 이괄이 죽음을 자초한 셈이다. 북악산은 백악산(白嶽山)이라는 이름으로 1396년 조선 건국 후 한양도읍의 주산으로 삼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청와대 뒷산 산책 중에 숙정문에서 서울을 조망하다 풍경이 아름다워 대통령혼자 즐기는 게 멋쩍게 여겼단다. 하여 문화재청에 권고하여 2007년 4월5일 식목일에 창의문, 숙정문, 말바위안내소에서 신분증 지참한 일반인에게 개방토록 하였다. 그리고 작년 11월1일부터 성벽 바깥쪽의 약1.8㎞길을 출입구 4개소와 안내소 2곳을 추가로 텄다. 창의문을 나서자마자 가파른 계단은 성곽을 타고 치솟는다.
비탈에 성돌을 쌓고 하얀 덮개지붕이 여인의 가르마 같아 여장(女墻)이라한다. 여장 아래에 총안(銃眼) 셋을 뚫어 가운데 총구는 아래로 행해 근접한 적을, 양 옆의 총구는 정면을 향해 원거리 적을 쏘게 한 과학적인 성곽이란다. 성돌 하나씩 쌓으면서 얼마나 머릴 썼는지 감탄케 하는데 요는 이 한양도성이 외침에 한번이라도 제 방어역할을 했느냐? 라면 울화통이 치민다. 임진왜란 때나 병자호란에 속수무책으로 임금을 비롯한 신료들은 도망치기 바빴다.
이괄이 반란군을 이끌고 두 번이나 경복궁을 침입할 때도 순식간에 무너진, 도성 쌓느라 전국에서 차출된 백성들만 죽기 살기 한 지옥성이 된 셈이다. 한양도성 길을 걷다보면 성벽에 새겨진 각자성석(刻字城石, 성곽을 쌓은 책임자의 이름과 날짜가 새겨진 성돌)이란 성돌이 보인다. 이것은 일종의 공사 실명제로 어느 여장부터 어디여장까지 어느 지역 인부들이, 석공장인이 누구인지를, 또 누구의 책임 하에 쌓았는지를 명기한 성석이다.
멀리 전라도와 함경도백성들도 노역했단 증거다. 도성을 지키며 적을 막아야 할 사람은 왕을 비롯한 신하와 군사들이다.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때 죽임당하고 노예로 끌려간 수 십 만의 백성에 대한 반성보단 무너진 성벽보수공사에 올인 한 조정의 권부였다. 보수공사 땜질한 화강암 성돌이 그냥 볼거리로, 문화유산이란 자랑거리로 회자되나 싶어 씁쓸하다.
멋들어지게 자란 송림 숲은 그런 비극의 불행한 과거사를 치유하나 싶다. 하얀 구렁이가 가파른 백악마루를 기어오르는 듯한 여장과 춤추는 소나무군락에 눈길 빼앗기다보면 빡센 계단타기도 인고할만하다. 길게 누운 바위가 돌고래처럼 생겨 돌고래 쉼터는 산님 몇 분에게 벤치를 내줬다. 망중한을 즐기는 한량이 보기 좋다. 드뎌 백악마루에 섰다. 여기 벤치도, 소나무아래도 산님들의 망중한이 더 없이 행복해 보인다.
청와대 뒤 꼭지인 백악정상엔 북한의 공중위협에 대처하려 발칸포진지가 있던 곳이었다. 백악산이라 음각된 정상석이 초라하다.백악산정을 내려와 곡장을 향한다. 조선조 때부터 취병(翠屛)으로 도성길과 소나무군락지를 구분지어 보호수가 된 소나무들은 백악산의 또 다른 명물이다. 그 소나무 중에 15발의 총탄 세례를 받고도 늠름한 200살 넘은 소나무가 상흔을 자랑삼듯 하고, 산님들은 기념촬영 하느라 서성댄다.
1968년 1월21일 무장공비 김신조일당이 청와대습격을 시도하다 생포된 1.21사태의 트라우마는 박정희정권이 40년 동안 백악산구간은 출입금지 시켰다.‘1.21소나무’를 지나 청운대(靑雲臺) 앞 성벽에 성곽을 쌓은 책임자의 이름과 날짜가 새겨진 ‘刻字城石’성돌이 있다. 청운대쉼터 너른 공터도 산님들 차지다. 코로나19 해방구일까? 열댓 명의 단체 산님들이 여장을 넘어온다.
그 여장을 넘어 성밖의 곡장안내소를 가는 길이 개방되어 수백 년 동안 이어진 한양도성의 땜질보수공사의 생생한 민낯을 보게 된다. 곡장에 서면 멋진 사위가 파노라마로 펼쳐져 백악산의 풍류에 한껏 취할 수가 있다.북악팔각정과 유명한 요정 삼청각이 닿을 듯하다. 곡장은 성곽일부를 원형으로 돌출시켜 적의 침입에 효율적으로 대치케 만든 시설이다. 촛대바윌 지나니 숙정문이 소나무숲속에서 대문을 활짝 열고 맞는다.
숙정문도 음기가 세다는 풍수학 탓에 항상 폐문한 채였다. 여성이 내왕하면 바람이 난다는 설에 근래까지도 여성은 접근금지 처였다. 그 숙정문 밖의 성곽숲길1.8km를 작년 말에 개방했다. 멋지게 꼬이고 휜 채 춤추는 거목소나무 숲에서 힐링할 인근의 여성들이 살판이 난 셈이다. 말바위안내소에서 출입카드를 반납하고 청운동계곡으로 하산한다. 정도전이 왜 가파른 바위산 백악을 배산으로 경복궁을 짓고 도성을 쌓아 한양을 설계했는지를 공감할 수 있었다.
한양도성은 1396년 태조가 백악산,낙산,남산,인왕산 능선을 따라 높이5~8m로 연장18.6km를 쌓은 성곽이다. 그 성을 500여년을 보수 수성하여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 됐다. 한양도성엔 사대문(홍인지문,돈의문,숭례문,숙정문)과 사소문(혜화문,소의문,광희문,창의문)을 둔 문화적 유산으로 자긍심 이전에 이름 모를 희생자들의 넋을 기려볼 일이다. 서울시민들은 행복타 할 것이다. 2021. 0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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