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파랑길4코스 - 다대포해변과 노을
석양의 노을은 희망을 여는 고운 빛깔이다. 못내 아쉬운 오늘을 위무하는 노을빛은 내일을 여는 찬란한 여명의 시작이다. 그 간절한 기도를 할 수 없다면, 희망이 없는 내일은 삶의 종언(終焉)일 것이다. 그래 우린 노을빛을 사랑하고 내일 또 석양을 기대한다. 다대포의 석양은 아름답고 장엄하다.
하 넓은 바다와 모래사장은 어디에서건 그 장엄한 노을빛의 스펙트럼을 온전히 채 받을 수 있어서다. 다대포의 노을빛에 찌든 때를 씻고 간절한 소망을 꿈꾸기 위해 벼르기 언제 적부터였던가! 근디 해질녘이 돼도 서쪽하늘 구름이 물러서질 않고 틈새를 벌렸다 오므리다 감칠맛을 돋우며 자리를 뜨지 못하게 한다.
찬란한 노을을 고대하는 나는 여간 초조하지만 정작 다대포 해안은 속상한 적이 헤아릴 수가 없어 치유 불가능한 트라우마로 남는걸까? 눈부신 노을을 환한 웃음 속에 맞을 수가 없게 된 다다포의 안타까움이 해질녘엔 도드라진다. 다대포해수욕장은 환경오염에 쓸쓸한 해변이 되고 있어서다.
낙동강 하구둑 탓에 자연수유입이 잘 안되면서 퇴적층이 쌓이고, 항구에 들어선 가게와 공장들은 오염물질을 방류하여 해수욕장으로의 기능을 상실케 한단다. 황홀한 노을을 안을 수가 없는 해수욕장에 인적이 뜸하니 안개 많은 다대포는 더더욱 애끓는 한숨으로 뿌옇게 뿌옇게 몰운해(沒雲海)가 되가나 두렵다.
태양은 어떻게 해서든 얼굴 내밀려고 용쓰다 안무에 가린다. 나는 아쉽게 자리를 턴다. 황홀한 노을구경은 다음으로 미뤄야 하나 싶었다. 드넓은 백사장에 망루처럼 서 있던 사람들도 하나 둘 되돌아선다. 노을은 구름 속에서 애태우는 성싶고! 다대포해수욕장을 살리는 길은 영영 없는 걸까?
5월의 몰운대는 몽환적일만치 낭만과 애잔함이 질펀하다. 낙동강끝머리를 붙드는 을숙도와 감천동사이에 다섯 개의 만을 품어 다대포라 했다는 부산의 땅 끝은 모래사장이 바다가 된다. 드넓은 다대포 모래사장은 바다 같다. 하 아득해 사장과 바다가 구분이 안 되는 해수욕장을 아장대는 사람들은 신기루 같다.
신기루가 되고픈, 멋과 낭만을 아는 사람들만 다대포를 찾는지 넓은 해수욕장의 인적은 뜸하다. 낙조에 반했거나, 트레킹과 서핑 아님 라이딩에 몸이 근질대는 사람들이 찾는 해수욕장 아닌 해수욕장이 됐단다. 해수욕장을 에워싼 방풍림의 공원은 해풍과 파도소리에 파묻히고 싶은 로맨티스트들의 보금자리다.
연두신록에 드리우는 5월의 햇살은 해풍에 춤을 추고 해조음은 자장가처럼 귓가를 스친다. 훔칠 수 없는 낭만이 숲 공원을 흐른다. 낙조대는 다분히 그런 로맨티스트들이 산책하는 별궁이었다. 붉게 번지는 일몰의 환영이 어둠을 초대할 때 몽환적인 그림 속에 나도 하나의 정물이 된다. 내가 그렇게 아름다운 그림이 될 수 있단 순간이 다대포해수욕장의 마력일지 모른다.
기암괴석으로 해안을 휘두른 몰운대는 태종대와 해운대와 부산의 3대(臺))명소로 꼽힌다. 몰운대는 왜구의 출몰이 잦아 만포진과 조선시대 군사요지로 성종은 높이4m, 둘레560m의 다대포진을 축성했다. 임진왜란 때 왜군과 맞선 정운(鄭運)장군과 윤흥신,흥제(尹興信,興悌)형제의 순국은 후세의 귀감으로 회자된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마자 원균의 부산포가 왜구에 함락되자 이순신장군의 연합함대는 1592년 음력 9월1일 새벽 가덕도를 출발 부산포 해전(釜山浦海戰)에 나선다. 부관 정운장군은 다대포 앞바다 몰운대 화준구미(화손대와 경도(모자섬) 해협에 이르자 “나는 여기 전투 중에 죽을 것이다(我沒此臺), 내가 죽더라도 적이 알지 못하도록 하라.”고 지시하고 독전 순절하였다.
왜선470척 중 100여 척을 격파하는 대승이었다. 이순신장군은 계속 된 전투에 지친 정운장군의 출전을 만류하였으나 그는 ‘장수가 나라를 구하지 못한 상황에서 어찌 전쟁을 회피 하겠습니까, 제 한 몸 부셔져 물고기 밥이 되더라도 이 전쟁의 끝을 꼭 보고 죽을 것입니다’ 라며 출정했었다.
몰운대는 16세기까지는 ‘몰운도‘ 라는 섬으로 낙동강의 토사가 퇴적되어 다대포와 연결육계도로 변했는데, 잦은 안개와 구름 속에 잠겨 ’몰운대’라 불렀다. 몰운대 다대진전투를 선조(宣祖)때 좌찬성 구사맹(具思孟)은 그의 『조망록(繰亡錄)』에 “왜적이 성을 포위하자 힘껏 싸운 끝에 이를 물리쳤다.
이튿날 많은 수의 왜적이 쳐들어오자 군졸은 모두 도망쳤고, 윤흥신은 홀로 남아 온종일 활을 쏘다가 성이 함락되자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서제(庶弟)인 흥제가 왜적이 형을 포위하고 칼을 날리자 형을 껴안고 함께 죽었는데, 껴안은 것이 너무 견고하여 끝내 풀지 못하고 같은 관에 넣어 묻었단다. 2021. 05.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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