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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3) 영실코스의 영주십경 (제주여행3박4일 셋째 날)

3) 영실코스의 영주십경(瀛州十景) (제주여행3박4일 셋째 날)

아침8시, 호텔로비주차장에서 예약한 타다`승합차에 올랐다. 빗발은 산뜻하게 꼬리까지 감췄다. 동쪽하늘에선 구름이불을 벗느라 햇살이 몸부림친다. 봄비세수를 한 삼라만상이 싱그러워 보이고. 8;40분, 타다기사가 영실입구에 차를 세우곤 내리란다. ‘여기가 등산입구냐?’고 묻자 젊은 기사는 그렇단다.

영실안내소(들머리)

인터넷검색에서 읽었던 등산로입구가 아닌 성싶었지만 벌써 차는 떠나버렸다. 오늘 강풍 조심하라는 예보대로 차가운 바람이 매서울정도로 엄습해 왔다. 차도를 따라 한라숲길을 걷는다. 승용차만 가끔 지나칠 뿐 트레킹족이 없다. 인터넷 웹에서 영실등산로입구는 2.2km전방인 걸 확인한다.

지금도 바가지 내지 덤터기 씌우는 운전사가 있나?  더구나 싹수가 노오란 젊은이어서 더욱 허탈했다. 인터넷세상에 둔감한 청년기사라니? SNS에 올려 바루자는 내게 아내와 둘짼 한 시간 더 산에 파묻히라는 배려로 생각하잔다. 깨 벗은 나목들 사이를 휘파람불며 내달리는 바람에 손이 시리다.

병풍바위계곡

겨드랑이 찢고 움 트려다 놀랜 새싹의 표정이 궁금해도 엿볼 기분이 싹 가셨다. 목에 건 디카를 준비한 게 그나마 다행이다. 한 시간을 정신없이 한파와 씨름했다. 아무도 없는 영실 들머리게이트를 통과한다. 바람의 포효가 팡파레인가! 데크계단은 숲을 뚫고 은근히 오르막길을 펼치다가 가파른 돌계단으로 바통을 넘긴다.

병풍바위 맞은 편의 골짝에 숨은 눈덩이와 상고대군락
볼레오름과 이스렁오름

울창한 관목들은 희멀거니 영양실조에 걸린 꼴이다. 화산석에 뿌릴 내린 나무들이 한라산조릿대에 치어 앙상할 수밖에 없지 싶다. 그 앙상한 나지의 엉킴이 춤사위 같고 가지에 달라붙느라 앙탈하는 바람결이 아우성처럼 들린다. 병풍바위 골이 가까워지자 된비알 오름길은 급살 맞다.

고도1,500m가 넘는 고산의 가쁜 숨길은 광풍에 숨 멎을 것 같았다. 웬만한 오기로는 버티기 버거운 미친바람과의 싸움은 한순간도 풍경을 즐길 찰나까지 빼앗아 간다. 병풍바위 앞 골짝엔 하얗게 상고대가 피었고, 눈덩이도 숨어들어 봄과 숨바꼭질 할 참이다. 겨울은 그렇게 질기다.

구상목의 미학

주상절리 병풍바위는 영실코스의 압권인데 가까이 다가갈 수가 없으니 그게 한이로다. 그나저나 미친바람은 언제쯤 잠잠해 질려나? 방풍막이 쉼터도 없는 된비알코스2km는 죽음의 길이라고 어느 여학생이 투덜댄다. 영실코스의 매력은 해발1,400∼1,600m지점에서 하늘로 치솟는 거대한 기암괴석들이 병풍처럼 늘어 선 영주십경(瀛州十景)의 하나다.

 

그 천태만상의 기암들을 옛부터 '오백나한', 또는 '오백장군' 이라고도 불리었다. 병풍바위고개를 넘으면 평탄한 데크 길이 구불구불 관목 숲을 헤집는다. 하얀 뼈대의 몸짱 콘테스트라도 벌리는지 구상나무들은 죄다 깨 벗었다. 언젠가 매스컴에서 한라산구상나무가 고사목이 되간다는 소식을 접해 정말일까 싶어 안쓰럽다.

깨 벗은 구상나무가 펼치는 기기묘묘한 자태는 자연이 선물하는 미의 극치다. 난 여태 한라산백록담등정을 두 번 했을 뿐이다. 영실코스의 빼어난 풍광에 도취한 나는 연신 쾌재를 토했다. 아내와 둘째도 광풍에 죽다 살아났어도 영실코스의 풍경이 더 오래도록 추억창고에 남을 거란다.

윗세오름을 향해서

윗세오름을 향하는 광활한 툰드라(?)지역에 활주로 같은 등산로가 뱀처럼 한라산 화구벽(火口壁)을 기어오른다. 그 길이 그리 푸근하고 평안해보여 저절로 발길을 옮기게 된다. 정오에 윗세오름에 섰다. 어디서 언제 나타났던지 휴게실엔 산님들이 띄엄띄엄 자릴 채웠다. 한라텃새가 되버린 까마귀 한 쌍이 노려보고 있다.

구상나무와 고사목의 처연함

광풍에도 꿈쩍 않는 놈들은 산님들을 우습게 보는지도 모른다. 저만치에 시꺼먼 한라산이 커다란 질그릇 엎어 놓은 모습으로 다가서고 어리목 쪽의 툰드라엔 오름 능선이 리드미컬하다. 산에 올라서면 자연의 위대함에 겸손해지면서 철학자가 된다고, 삶 자체가 하나의 산이라고 편지를 쓴 다니엘 린데만의 글이 떠오른다.

윗세오름 쉼터

“지구야, 산에 오르는 걸 ‘힐링’이라고도 불러. 산에 올라가면 철학적인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아. 자연은 정말 위대하구나. 산은 참 높기도 하다. 그에 비해 우리인간은 너무 보잘 것 없는 존재야. 어쩌면 삶 자체가 하나의 산이 아닐까? 정상에 올라 주변을 돌아보고 ---- 맞아, 삶은 하나의 산이야. 그러니까 우린 산을 지켜야만 하고!”

윗세오름에서 본 한라산

독일출신 방송인 다니엘 린데만의 <지구에게 쓴 편지> 중 일부를 모닝 캄(MORNING CALM)에서 옮겼다.미친바람에 맞서 연탄성을 토한 아내와 둘째가 대견해 더욱 보람 찬 한라산등정이 됐다. 동네자락길만 다녔기에 내심 걱정이 됐던 모녀였다. 내일은 어리목코스에 도전하겠단다. 좋구말구!   2021. 03. 21

ㅔ타다기사가 내려준 영실입구, 영실등반로 들머리는 2.2km 후방에 있었다
병풍바위
어슬렁오름
영주십경 중 하나인 병풍바위와 골짝
구상목
고사목군락으로 변하는 구상나무
전망대 갈림길
전망대오름
영실코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