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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 길 - 산행기

수락산, 그 영험함을~!

수락산, 그 영험함을~!

수락산정상

“나그네 취급도 못 받아도 성나지 않네 (我不客至嗔)

산중에 세속사람이 한 사람도 없으니 (山中無俗人) 

외로운 구름 밝은 달과 함께 (孤雲與明月) 

오래도록 신선동네의 손님이 되리니 (長作洞天賓)”                                                                                                            -매월당 <세속을 끊다>-

전망대서 되돌아 본 기차바위홈통방향

누렇게 변한 고엽이파리가 간당간당 목매달고 버티다 수동골짝냇가에 내려앉는다. 웅덩이에 갇혀 살얼음이 낀 물길을 트기라도 하려는 듯! 내일이 대설(大雪)답게 만추도 얼어붙어 동장군에 자릴 내주고 있다. 매월당은 가을에 금강산을 내려와 여기 수락산자락에 은거하여 십여 년을 자적한다. 그 매월당을 사무치게 흠모했던 서계(박세당1629~1703)의 고택이 골짝입구에 있다. 코로나19땜인지 출입금지 팻말을 세우고 인기척도 없다.

빗장 걸린 서계고택

서계는 부인이 죽자 부친(박정)이 인조반정 때의 공훈으로 하사받은 수락산일대의 사패지(賜牌地)로 이사와 산골을 개간 과수농원을 경작하며 학문에 정진한다. 그런 자연친화 속 안빈낙도의 삶35년은 실사구시의 전범이 되었다. 4년 만에 찾는 서계의 고택은 빗장을 걸었으나 동편을 흐르는 개울이 말끔히 단장돼 속이 시원했다. 난잡한 포장천막상가가 사라진 정갈한 골짝은 노강서원과 석림사 앞을 거슬러 오른다.

노강서원과 홍살문

노강서원도 서계가 매월당 추모사업으로 일궈 매월당진영을 모셔 숙종임금이 청절사(淸節祠)란 편액까지 하사받았다는데 어찌하여 서계의 차남서원으로 바뀌었을까? 석림사도 서계가 매월당을 추모하며 당시 은선암의 두 승려에게 공사비 일체를 시주하여 세운 암자였다. 그렇게 서계는 매월당에게 매료돼 있었던 올곧은 선비였다. 석림사골짝을 파고든다.

수동골짝

산님이 좀 많다. 갈 곳 없는 코로나19세상에 도회인들의 탈출구는 산록이 최상일터이다. 하루 확진자가 600명을 넘나드는 우울한 서울한파를 벗어날 산골짝구멍이 근교에 많다는 게 다행이란 듯이~. 마른골짝의 바위를 찌질찌질 흐르는 물길은 얼음길로 변해 겨울로 성큼 내딛고 있었다. 가파른 바위길 오르려니 숨이 차고 마스크는 그 숨길마저 막는다. 마스크를 벗어 한쪽 귀에 걸쳤다.

수락산은 바위옆구리를 휘도는 잔도가 많다

나처럼 기회주의자거나 성질 엿 같은 산님들도 제법 있다. 마주치는 산님 중엔 마스크맨이 있어 부러 등을 돌려주곤 하지만 이 깊은 산골짝에서 필히 마스크맨이 돼야 한다고 강변하고 싶질 않다. 비말이 튀어올 리도 없고, 탁 트인 청정산골에서 바이러스가 살수나 있을까? 싶어 움츠러들고 싶지 안했다. 마스크 벗고 활보하려 산행하는 쾌재를 포기할 순 없다고 생각하는 나의 독심 말이다. 기치바위홈통을 밟고 전망대에 섰다.

선바위

넓은 바위에서 젊은이들이 마스크 벗고 살맛 났나싶게 활기차다. 뿌연 안개 속으로 도봉산이 얼굴을 내밀고 코로나19로 움츠러든 시가지가 미몽 속을 헤매느라 가물댄다. 뒤쪽에선 독수리바위가 곧 비상할 듯하다. 바위들은 피부를 갈라 소나무들을 키우느라 까칠까칠해졌다. 소나무를 키워 연애하는 재미 이외에 바위는 무슨 낙으로 살 텐가! 바위의 끈질긴 구애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치는 소나무의 몸부림이 아름답다. 그리하여 굽은 소나무는 그대로 명품이 되고 암송은 멋진 그림으로 우뚝 선다.

수락산의 바위다랭이산

수락산바위들도 애초엔 서글프고 처량한 신세였다. 한양을 멋지게 단장하려고 금강산에서 씩씩대며 달려오다 ‘한양 조경작업 끝’이란 정도전의 일갈에 수락산에서 발걸음을 멈췄던, 낙동강오리알신세였다. 헌데 지금은 서울사람들이 서울의 공해탈출구로 찾는 명산이 됐으니 전화위복이 된 셈이다. 깔딱고개 안부를 지나 정상에 섰다. 정상은 인파에 휩싸였다.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나 싶었는데 인증샷 하느라 줄선 산님들 이었다. 태극기가 하염없이 펄럭인다.

내원암을 향한다. 수락산을 두 서너번 왔어도 내원암코스는 처음이라 설렌다. 가파른 바윗골 하산길은 아직도 수많은 고엽들이 나무에 목매단 채 우수수 비벼대며 서로 밀쳐내느라 바스락댄다. 소란스런 고엽 아래 빙판이 된 물길은 가을과 겨울의 리턴매치가 이뤄지는 진풍경이 전개되고 있었다, 내원암에 들어선다. 단촐한 암자는 200여년 된 전나무 한 그루가 삭발한 채 스산한 계절의 사잇길을 불침번하며 암자의 사천왕노릇을 하나 싶다.

대웅보전 앞마당의 시커먼 투구바위는 암자 뒤 수락산정에서 굴러온 걸가? 그 바위는 영험이 있었던지 조선왕조의 대를 잇는 기도처의 내밀한 역사를 앙팡지게 품고 있지 싶었다. 숙종임금은 영원스님에게 백일기도를 청해 아들(영조)을 얻었고, 영조가 후사가 없자 용파스님을 시켜 삼백일기도 끝에 손자(순조)를 낳았다. 그래 정조는 내원암에 칠성각을 지어주고 ‘관음전(觀音殿)’이란 어필을 내려줬단다.

내원암미륵입상

그렇게 왕실의 각별한 관심을 받았던 내원암을 어슬렁거렸는데 적막하다. 암자 아래에 뜬금없이 허름한 가게 하나가 문전성시를 이룬다. 수락산정화차원에서 계곡의 모든 먹거리업소가 철거됐는데 말이다. 매월당이 내원암 아래서 은거한 그 자리일까? 하는 상상을 해 봤다. 생육신 매월당은 21살 때 세조의 왕위찬탈에 울분 승려가 되어 전국을 유랑하다 40대에 하산하여 여기서 침거했다.

내원암은 수락산의 심장이란 생각이 들었다. 내원암을 나서 금류폭포를 끼고 내려서는 급경사 길은 된통 바위길이다. 202개의 계단은 바위를 깎아내던지 깎은 바위를 포개 놓은, 한 사람씩 비켜다닐만한 아슬아슬한 일직선의 돌계단이다. 계단이 빤히 보여 아찔아찔 현기증이 날 정도인데 만드느라 얼마나한 공력을 쌓았는지 상상을 절한다. 일직선의 계단은 층고마저 높아 신경 날 서게 하는 데 스님들에겐 행선수양처 일테다.

아스름이 끝이 안 보이는 202돌계단

옆엔 금류폭포가 은빛 반짝이는 얼음활강코스를 연출했다. 금류폭포 상단바위에 산천으로 둘러싸인 경치 좋은 곳이라는 ‘금류동천(金流洞天)’이 음각돼 있는데 매월당의 작명이란다. 아래로 은류폭포, 옥류폭포가 즐비한 바위골짝은 산이름이 왜 수락(水落)이라 했는지 가늠하게 한다. 이 산자수려한 산에 광해의 폐세자 이지가 강화유배 중에 땅굴 파서 탈출하다 붙잡혀 죽고 그의 시신을 어딘가에 묻었다는 데 찾지를 못했단다.

금류폭포

수락산은 영험한 끼가 있는 산이다. 왕가를 잇는 탈출구로, 코로나19해방구로 올 겨울엔 시민들의 기도처, 탈출구가 되리라. 내일이 눈 많이 내린다는 대설이다. 겨울이 강치로 꽁꽁 얼어붙어 코로나19바이러스를 동사시켰으면 좋겠다. 그렇게 잡것 없는 하얀 세상을 만들면 좋겠다. 마스크 없는 민낯의 세상이면 좋겠다. 얼굴도 훤하게, 속창시도 훤히 보이는 세상이면 좋겠다.           2020. 12. 05

서계고택
살얼음낀 바위길
내원사골짝의 고엽들은 여태 만추의 미몽을 즐기나 싶었다
▲암송의 연애질▼
삼신각을 오르는 돌계단 우측에 내원암석가탑꼭지가 보인다
▲200여년 된 전나무가 삭발한 채 대웅보전을 수호하고 있다▼
내원암의 다보탑. 석가탑은 위 삼신각마당에 있다
바짝 다가앉는 쉼터의 고양이, 산님들의 보시음식도 입맛에 맞아야 처다본다. 겨울나기 위해선지 토실토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