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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 길 - 산행기

설국 묘적산의 설인이 되다만 하루

설국 묘적산(妙寂山)설인(雪人)이 되다만 하루

간밤에 내린 눈이 살짝 덧씌워진 아침, 묘적산(백봉산 柏峰山)행에 나섰는데 남양주 덕소역사를 나서자 함박눈이 앞가림도 못하게끔 쏟아진다. 버스정류장에서 묘적사행 시내버스노선을 확인하려는 순간 60번버스가 다가섰다. 승객 한 분과 나, 달랑 둘을 태운 버스는 함박눈세례를 헤치느라 안간힘을 쓰나싶었다. 기다시피 하는 차들이 슬로모션 영화장면이라.

묘적산골짝의 카페

초행길인 나는 불안하고 초조해진다. 기사님 표정을 살피다,

“기사님, 묘적산행 초행인데 이렇게 눈 내리면 버스가 다닐랑가요?”

“정기노선이라 웬만하면 다녀요. 근데 이 눈 속에 산에 가시게요?”

“출발할 때 서울은 괜찮았어요. 가다가 못 가면 말아야지요. 하루에 차가 몇 번이나 있습니까?”

“30분마다 있긴 한데 이렇게 눈 내리면 모르지요. 버슨 묘적사 골짝입구에 섭니다.”

빙폭이 된 묘적폭포는 다시 눈을 뒤집어 섰다

기사님이 반시간쯤 기어가던 버스를 세우더니 여기서 내리란다. 눈발에 어지러운 왼편길목을 가리키면서. 쌓인 눈이 발등을 덮는다. 사람그림자도 없는데 자만치 ‘묘적산입구’란 현수막이 보인다. 눈 덮인 신작로에 방금 지나간 차바퀴자국이 나를 안내하는 거였다. 마을을 지나 골짝에 들자 하얀 세상에 움직이는 건 나뿐이다.

잿빛 하늘은 눈발폭죽이라도 터뜨렸나 싶게 쏟아 붓는다. 달빛 속의 백야(白夜)를 걷는 듯한 어스름한 시야는 야릇하게 나의 가슴을 시원하게 뻥 뚫어, 신명나게 하는 메타포의 역설에 들게 했다. 얼마 만에 걷는 설국속의 눈 세례행보인가! 함박눈 내리는 회색빛세상 - 백야에 부나비처럼 난무하는 눈의 속삭임소릴 들은 지가 언제 적인가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티 하나 없는 하얀 눈카페트의 묘적사입구. 발자국 남기기가 망설여졌다

지금 묘적사와 백봉산등정이란 생각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반시간쯤 그렇게 설국의 낭만에 빠져들었다. 흠결 없는 하얀 마당에 우뚝 선 전나무를 앞세우고 묘적사가 나를 맞는다. 발자국남기가 조심스러웠다. 8각7층석탑이 소복단장을 하고 오색연등을 허리에 맨 채 대웅전을 안내한다. 대웅전의 독경소리가 눈발에 묻혀 경내를 쩡쩡 울린다.

팔각칠층석탑의 호사

대웅전 옆에서 300여년을 보초선 보리수나무 앞에서 함박눈속의 묘적사를 담아본다. 독경소리만 없다면 쥐죽은 듯한 사찰은 눈에 휩쓸려 사라질 것만 같았다. 시누대밭 사이로 난 계단을 오르니 산령각이다. 석굴암부처님보다는, 어지럽게 흩날리는 눈발 속에 한 폭의 묵화로 다가서는 사찰과 묘적산자락 풍정이 그리 포근할 수가 없다.

산령각에서 조망한 묘적사, 건너편에 승군훈련터가 있다

세상이 멈춰버린 듯한 산사의 겨울이 아늑한 치유의 유토피아란 생각이 들었다. 대웅전독경이 멈추자 스님을 뒤따르는 유족 네 분이 유품을 태우는 소각장 앞에서 합장한다. 함박눈 춤사위는 승무(僧舞)가 되어 시공을 난무하고 영가(靈駕)의 연기가 승무를 타고 승천한다. 팬데믹세상에서 탈출한 영가는 행복할까? 전나무가 한 줌의 눈뭉치를 떨어뜨린다. 산문을 나섰다. 아까 입문한 나의 발자국이 사라졌다.

소각장의 유족들, 영가의 연기가 설무속에 승천하고 있다

다시 발자국을 남기며 백봉산을 향한다. 임도는 그야말로 순수무구다. 겨울나무들은 제 격에 맞는 소복성장을 한 채 나를 지켜보고 있다. 행여 내 발자국이 순수를 더럽힐까 응시하는 성 싶었다. 신라 때 원효스님이 창건했다는 묘적사는 한 때 왕실훈련도감이 설치됐고, 사명대사가 임난 때 승군(僧軍)을 양성한 곳으로 회자됐다. 전쟁이 나면 구국전선에 앞장에 선건 천대 받던 승려들이었다.

산령각오르는 계단

승군은 승려군인을 말하는데 조선조 때의 스님은 ‘8대 천민 중의 하나’였다. 배불숭유사상의 조선에서 스님은 나랏일에 동원된 노역자로 온갖 허드렛일을 도맡는 미천한 잡부며 양반가의 머슴과 다를바 없었다. 천대와 멸시를 받는 최하층의 노역자인데도 스님들이 넘쳐난 건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가난 탓이었다. 진짜 스님이 되려 출가서원을 한 분도 있었지만 거의가 가난한 백성들로 입에 풀칠하기 위한 생계수단 길이었다.

석굴암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천민 - 중이라도 되려고 절로 꾸역꾸역 모여들었던 것이다. 그 중들 - 잡부들이 전쟁이 터지면 선두에 서고 양반선비들은 뒷구멍으로 뺑소니쳐 지 살구멍 찾는 게 조선양반의 사회상이었다. 묘적사는 그런 승군들의 아지트였고, 저쪽 청량산의 남한산성에서도 암자의 승군들이 성을 쌓았고, 병자호란 땐 신료들은 화전논쟁으로 세월 보내면서 승군들을 앞세워 개죽음 시킨 비극이 생생하다. 묘적사 시누대는 화살촉 만드는 재료였다.

시누대는 승군들의 화살촉 재료로 쓰였다

영조 때 이복연은 여기서 훈련대장을 하다가 삼도수군통제사가 됐는데 묘친묘를 묘적산정상에 쓰고 자기도 그 옆에 묻어달라고 유언했다. 그의 쌍용검엔 맹산서해(盟山誓海)란 글귀가 새겨졌는데, 글귀를 충무공 이순신이 검에 쓴 걸로 잘 못 전해졌단다. '삼도수군통제사'란 벼슬이 오류를 빚게 했다. 눈발은 어지러이 내리고 적설은 하염없다. 발목이 푹 잠긴다. 적막한 산골에 움직이는 건 나 홀로다. 산길도 흐지부지 분간키 어렵다.

설무속의 대웅전

두 시간쯤 등정했으니 능선사거리께 당도했을 텐데 어디쯤인지 가늠이 안 된다. 불안이 스멀스멀 지폈다. 초행길이라선지 불안감은 더해졌다. 하늘도 땅도 없는데 하얀승복을 걸친 나무들이 떼거리 승군(僧軍)처럼 몰려온다. 한줌의 눈바람이 아우성처럼 들린다. 되돌아 서 하산한다. 푸석푸석 눈 밟히는 소리가 사락사락 눈 내리는 소리를 타고 골짝으로 사라진다. 아까 왔던 발자국도 사라지고 있었다. 문득 시장기가 들었다. 오후1시반이 넘었다.

바나나2개와 육포 네 개를 꺼내 행동식 한다. 그런 내 꼬락서니에 스스로 냉소를 지었다. 글다가 설산(雪山)에 산다는 설인(雪人)생각이 났다. 설인은 거인이라 발자국도 크다. 아까 올라온 눈 덮인 발자국이 그 흉내를 내나 싶었다. 그 발자국을 밟는다. 누군가가 이 꼴을 보고 있다면 영락없는 귀신 아님, 거지 아님, 공비일까? 하는 생각에 112신고할 것만 같았다. 해도 기분은 좋고 몸은 날것 같이 가벼웠다.

언제 이런 낭만적인 설인행색을 다시 할 수가 있을까? 산 준령에서 하얀 벙거지를 쓰고 도열한 채 빼곡히 늘어선 겨울나무들이 나를 개선장군처럼 환영하는가 싶었다. 함박눈은 하얀 꽃가루가 되어 골짝을 난무하고! 한 시간 반을 설인행세에 도취되어 하산하니 묘적사가 눈 속에 파묻혀 아까 봤던 나를 못 알아보는지 미동도 않는다. 나도 외면했다.

묘적사부도비

눈 뒤집어 쓴 빙폭포(氷瀑布) 속에서, 적설을 뚫은 개울 웅덩이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자장가처럼 새나왔다. 반시간을 개울 따라 설몽(雪夢)에 취한 듯하자 아까 하차했던 마을이 나타나고 60번버스가 나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 저쪽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엉겁결에 손을 흔들며 달려갔다. 설인이 버스에 오른다. 놀랜 기사님이 엉겁결에 내뱉었다. “나가서 눈 좀 털고 타세요.”

묘적산골짝 풍경, 피서지로 각광을 받는단다

“예~,” 자켓 후드를 벗자 한 삽 남짓의 눈덩이가 쏟아졌다. 두텁게 눈 덮개를 쓴 배낭도 털었다. 멋쩍은 생쥐 꼴로 다시 버스에 올라서니 기사님 왈, “산에 갔다 오세요?”라고 물으며 어이없단 표정이다. 

“예, 백봉산 가다 말았어요.” “산에 보물이라도 있답디까?”라고 기사님이 조소조로 물었다. 버스엔 달랑 한 사람이 있었다. 좌석에 앉으려는 데 기사님이 뒤도 안돌아본 채 “아저씨, 마스크는 있지요?”라고 외친다. 운전석백미러가 짚어낸 나의 범법행위(?)였다.

묘적산계곡의 사유지, 개발 중인 넓은 공터는 티끌 한 점 없는 순수로 나를 황홀하게 해줬다

마스크 벗고 설인행색한지 네 시간은 훨씬 넘겼던 참이다. 아무도 없던 설국엔 당연 코로나19도 없었다.  “아이고 미안합니다. 예, 쓸께요.” 그렇다. 나는 코로나19세상과는 무관한 설국에서 설인으로 있다가 코로나19팬데믹세상으로 다시 진입하고 있었다. 마스크 없는 순수한 자연인이었다가 마스크를 쓴 가면인간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설국이 천국이어도 살맛 나는 세상은 사파세계란 걸 모를 바보는 없다.

마스크 없는 하얀설국의 스님들, 우울한 표정은 눈 씻고봐도 안 보인다. 

눈세례는 그 가면세상을 지우려는 듯 줄기차게 내리는데 염화칼슘 흩뿌리는 제설차가 새까만 아스팔트길을 일깨우고 있다. 버스는 오전엔 눈길을 기느라 용 썼는데 지금은 잘도 미끄러진다. 세상은 온통 하얀 설국으로 변했는데 까만 아스팔트길은 코로나세상으로 치닫는 거였다. 역사는 길 위에서 만들어지고, 설국도 역사를 외면하곤 존재의 의미조차 없을 테다. 코로나19도 역사발전의 한 매듭으로 기록되고.

딱 한 번 찍힌 묘적산 설국입구의 도로

마스크 벗고 싶다. 설인이고 싶다. 그렇게 창시기 없는 놈은 예상보다 일찍 집에 들어서고, 그 모습에 쬠은 놀랜 아낸 창아리 빠진 남편을 보는 둥 마는 둥하며 맞았다. 

“어째서 이리 빨리 온디야?”의아해 하는 아내를 향해 “묘적산엔 눈 폭탄 쏟아지데~!”라고 나는 멋쩍게 응답했다. 강추위에 눈 내리는 날의 산행을 못마땅해 하는 아내를 무시한(?) 적이 한 두번이던가? 계면쩍었다. 어떻든 간에 설국의 설인행세를 한 한나절의 오늘은 기분 째지게 좋은 날이었다.        2021. 01. 18

대웅전 마당, 빗자루 쓸어 낸 길이 금새 사라졌다
스님은 비질 하면서 탑돌이 행선을 하고~
독경이 끝난 대웅전 법당
▲산령각▼
석굴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