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초록숲길단풍 - 봉원사
초록이파리가 노랑과 오랜지색 범벅이 된 숲길은 갈색으로 번져 여행채비를 서두르고, 틈새를 비집고 들어선 단풍나무는 빨갛게 불 지펴 가을을 태운다. 안산초록숲길은 벌써 낙엽이 수북이 쌓였다. 낙엽의 여행 종착지는 결국 태어난 뿌리등걸위일 테다. 쌓인 낙엽을 밟으며 봉원사를 향한다. 노란 은행나무 잎들이 기우러져 가는 가을햇살을 받아 금박처럼 반짝대는 봉원사는 보수공사를 하는지 비계천막을 휘둘렀다.
삼천불상 앞 오백 살도 넘긴 귀목은 깨 홀라당 벗은 채 눈발 날리는 겨울날을 기다리는지도 모르겠다. 귀목은 210여 년 전(음1819년11월16일) 이맘때의 눈 내리던 달밤도 어제 일처럼 기억하고 있을 테다. 10년의 유배생활을 마친 김려(金鑢, 1766~1822)는 절친 김조순(金祖淳) 등과 봉원사를 찾았다. 봉원사의 독서당은 선비들이 과거시험공부를 하던 장소로 소문 나있었고, 그들도 한때 머물렀던 곳이였다.
그들은 깨 벗은 귀목이 별 총총한 달밤에 한풀이 춤이라도 추는 듯한 소슬한 야경을 즐기며 시를 지어 읊었다. 인생이란 고통의 순간도 지나고 보면 추억이 된다면서 시를 읊으며 우정을 다졌던 공감대는 후일 ‘상심낙사(賞心樂事)’라는 시집으로 엮어냈다. 그날밤 김려는 함경도 부령에 사는 연인 연희와의 사랑이 그리워 가슴 쓸어내리는 시를 지으며 친구들과 공감한다.
“작은 우산에 치마 끌며 술병 들고서 연희는 벌써 다리 건너 이쪽으로 오고 있네. …… 찢어진 창으로 벌써 들리네. 또각또각 발걸음 소리.” 라고 읊더니
"서 있어도 생각이 나고, 앉아 있어도 생각나며, 걸어도 생각나며 누워도 생각난다.
어떤 때는 잠시 생각나고, 어떤 때는 오래 생각난다.
어떤 때는 생각을 하면 할수록 더욱더 생각난다." 라며 눈을 감았다.
- <사유악부>에서 -
노론의 명문가 출신인 김려는 27살 때(1791년) 진사시에 합격 촉망받는 인재로 회자됐다. 근디 1797년에 강이천(姜彝天)의 비어사건(飛語事件)에 연좌되어 함경도 부령(富嶺)으로 유배되었다. 강이천이 "해랑적(海浪賊: 해적)들의 소설(騷屑)스러운 말로 시골 사람을 속여 혹세무민하고 있다”는 얄궂은 죄목에 김려도 연루시켰던 거다. 부령에서의 유배생활 중에 그의 수발을 들던 관기 연희가 있었는데 교감하다 곧장 연인으로 발전됐다.
열정에 불붙은 젊은 남녀는 진정한 사랑을 키우며 죽고 사는 애인이 된다. 그 열애가 4년차일 때 김려는 또 신유사옥(辛酉邪獄)에 연루되어 1801년 경남 진해로 유배지를 옮기며 이별을 한다. 죽고 못 사는 애인이지만 죄인 주제에 관기를 동행할 순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두 연인은 오매불망 속이 검게 타도록 연연해했을 뿐이다. 유배형에서 풀려난 그가 절친과 회고담을 나누는 달밤인데 어찌 연희의 모습이 떠오르질 않겠는가!
“그대 어디를 그리워하나?
그리운 저 북쪽 바닷가연못에 붉게 핀 연꽃 천만 송이
연희 생각에 더욱 사랑스럽구나
마음도 같고 생각도 같고 사랑 또한 같았으니
한 줄기 나란히 난 연꽃을 어찌 부러워했으랴?
평생 살면 즐거운 이가 원망스러운 이가 되고
좋은 인연이 나쁜 인연이 되는 건지?
하늘 끝과 땅끝이 산하에 막혀서
죽도록 부질없이 이별가만 불러대네
전생에 지은 죄로 이생에서 이렇게 고생하는지
연희야! 연희야! 너를 어찌하랴!” - 연작 시가<사유악부(思牖樂府)>중에서 -
누군가를 오롯이 사랑한다는 것 같이 아름다운 일은 이 세상에 없다. 자연이 아무리 아름답다 해도 사람의 진정한 사랑만큼 아름답지 않다. 내밀한 감정이 없어서일 것이다. 허나 자연의 아름다움은 사람의 사랑을 더더욱 예쁘고 아름다운 결실에 이르도록 하는 바이러스를 제공한다. 그래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연인을 사랑할 수가 있겠다.
연인 중에서 가장 행복한 연인은 인구에 회자되는 사랑을 수 놓은 애인이다. 애인의 가슴에, 후세의 로멘티스트들한테 기억되는 연인은 영원을 살고 있음이다. 봉원사의 만추 속에서 김려와 연희의 애뜻한 사랑을 그려봤다. 4년간의 사랑이었지만 두 연인은 행복한 애인이란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 태어나 누군가를 오롯이 사랑한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님이어서다. 이 이쁜 가을에 김려와 연희의 사랑을 그려본다. 2020. 11.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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