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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감-그 미지?

갈~빗속의 깨복쟁이 친구들아!

갈~빗속의 깨복쟁이 친구들아!

안양사

 

간밤엔 천둥이 비바람과 휘파람을 몰고와 아파트 숲을 빠져나가느라 요란했었는데 동이 트자 고갤 숙였다. 창밖의 단풍들은 낙화되어 단지정원을 고깔 옷으로 입혀 놨다. 만추가 그렇게 속절없이 하루밤새에 초죽음 돼도 짠하질 않다. 메마른 산천을 촉촉이 적셔 갈증을 풀어줘서다.

새초롬한 아침에 전화벨이 울렸다. 깨복쟁이친구 J였다. 좋다면 점심을 같이 하고 싶단다. CM도 부를 참이란다. 코로나19가 꺼림직 했지만 쌍수 들며 반겼다. 모두 초등동창으로 몇 십 년 만에 해후하는 깨복쟁이들이다. C와는 몇 번 시간을 같이 했지만, J는 얼마 전에 차 한 잔 나눴고, M은 언제 봤는지 기억도 가물가물한 친구다. 그런 깨복쟁이들과의 점심자릴 코로나19탓으로 팽개칠 순 없었다.

오후1시 관악역에서 만난다. 처음 가는 곳이라 서둘러 11시 반에 집을 나섰다. 부슬비 속에 우산을 받쳐 든 나는 빗물고인 깔끔한 포도를 부러 물장난 치며 거닌다. 물기 젖어 윤기 흐르는 낙엽들을 밟는 감촉도 싫지가 않다. 만추의 정취에 잠깐 빠졌다가 땅속 지하철로 몸뚱일 구겨 넣었다. 20여분 일찍 도착한 관악역은 지상에 있었다.

간밤의 비바람 땜인지 차창으로 펼쳐지는 시가지는 교외의 전원도시풍이였다. JC, 그리고 M이 나타났다. 낯익은 사람도 복면하면 몰라보는데 마스크라고 얼른 알아볼 순 없다. 두 번째 만나는 J가 그랬고, 처음 M은 타임머신여행 속의 초딩모습만 떠오르고 있을 뿐 가늠도 안 됐다. 세월은 그대로인 채 살아 숨쉬는 실체만 변화시킨다.

그래 반갑고 더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악수를 했다. 비는 손꼽아 셀 수 있을 만큼 내려 걷기 좋은데 택시를 탔다. 안양유원지에 있는 식당까지 좀 어중간한 모양이었다. 토종오리백숙전문이라는 식당은 산뜻했다. J가 자주 찾는 단골집이고 이미 예약을 해뒀단다. 착석하면서 마스크를 벗자 M의 민낯이 들어났는데 어릴 적의 앳띠고 수려했던 얼굴은 주름살을 새겨 세월의 덧없음이 역력했다.

그가 남 못잖은 술꾼이었는데 병마에 된통 혼쭐난 후 금주했단다. 오늘은 사이다 한 캔을 반주(?)삼고 있었다. J는 오늘 찬찬히 보니까 임신8개월쯤 된 얼굴색 좋은 한량이었다. 겨우 두 번 만남의 내 짧은 소견으론 J가 오지랖 넓은 팔방미인에 수완가이자 등산꾼이지 싶었. 서울근교 산은 빤할 그에게 나는 길잡이를 부탁했고, 주말에 소요산근처의 **산행향도가 돼 주기로 했다.

오리백숙 맛이, 찹쌀누룽지 죽 맛이 일품이었다. J가 예약할 만한 식당이었다. 오후 내내 뭉그적대며 몇 십 년 동안 깜깜이었던 고향지인들의 얘기는 내겐 오리백숙 맛보다 더 맛깔(?)났다. 식당주인장한테 볼기 맞을 소리지만 코로나19 불안 속에 손님은 우리뿐이어서 좋았다. 1년 선배였던 S는 느닷없이 맹아가 된 불행한 삶이었는데 얼마전에 세상마져 등진 비통한 운명이었다는 얘기에 가슴이 쓰렸고, 누구어머님은 향년101세에 정정하시다는 희소식도 들었다.

누구누구는 어떻게 성공했고, 누구누군 언제 죽었으며, 누구누구는 소식도 모른다는 애기들은 우리가 고향의 살아있는 도서관의 AI로봇일가? 싶게 말이다. 우리가 그만큼 늙었다는, 그래 소중하다면 소중한 자산일 수도 있으련만! 지금쯤 고향들길의 탱자는 누르스럼하게 익었을까? 1년 후배 S집 옆 울타리의 탱자는 시큼한 맛을 좋아한 게 아니라 볼()로 차며 내달리기하느라 좋아했다. 귀한 공(볼) 대신 탱자볼이였다.

안양사 대웅전처마끝에 삼각산이 걸렸다 

 

때로는 베어놓은 탱자나무에 책보자기 얹어 싣고 등하교길 신작로를 내달리던 초등학교시절의 정다운 면면들이 주마등처럼 떠오르는 오후였다. 어느 날 하굣길엔 엄마가 애를 어디로 낳느냐?로 목청 돋우기도 했었다. 나는 엄마한테 들은 대로 배꼽으로 낳는다 고 우기고, 지금 내 옆의 J 아래 똥구녕으로 낳는다고 열변을 토했다. 친구들은 대게 J편이었다. J가 동생이 많아 현장을 목격했다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었던 거였다.

해도 나는 그 후 오랫동안 애는 배꼽으로 낳는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런 재밌는 일들은 제법 먼 등하교길을, 귀신이 우글댄다는 공동묘지 앞을 거뜬히 지나치게 했었다. 더구나 우리 동네는 10(여자 영애포함)이 동급생이었으니 신명날 일이 한 두 가지였던가! 60여 년 전 추억인데 엊그제 일처럼 선연하다. 벌써 10명중에 4명이 저세상으로 떠났다.

이제 10년 안팍으로 누가 불귀의 여행을 떠날까? 오늘 이 자리를 만든 세 친구들이 고마웠다. 귀향 꿈을 저버리고 서울에 정착한 내가 참 잘한 결정이었단 걸 오늘 다시 한 번 절감한 시간이었다. 깨복쟁이 친구는 아무리 잘 난 채 하드라도 서로가 배창시 빤히 들여다보고 있어 꾸밀 까닭없어 좋다. 배창시 훤히 들여다 보고 있응게 금방 허물이 없어져 파안대소한다.

낼 모래 죽을 때 가지고 갈 것도 없다는 진리를 깨우치고 있는 날머리에 와있응께 깨복쟁이 때가 사무치게 그리워지는지도 모르겠다. 우린 늦게 식당을 나와 뒷산의 안양사를 찾았다. 비는 개이고 안양천의 물길은 가뭄의 찌꺼기를 죄다 품어 안고 내달리고 있었다. 코로나19바이러스도 씻어갔음 좋으련만~? 그래야 고향의 깨복쟁이들 모두 만나게 될게 아닌가! 모두 건강하자. 씨 유 어게인!

2020. 11.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