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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 그 여적

흔들의자

흔들의자


니스 칠로 고운 나무결을 살린 독특한 디자인의 기능성의자가 올 여름 나를 주인으로 맞아 제2의 생애를 보내게 되었다. 아니 그보다는 내가 더 그가 있어 마음 뿌듯하다.

나무의자는 체크무늬천으로 방석과 등받이의 쿠션을 싸서 탈 부착하게끔 만들어져 있어, 여름엔 쿠션을 떼고 왕골방석만을 깔개로 하면 시원하게 여름철을 날수 있도록 되어 있다.

그 의자에 앉아서 엉덩이에 약간 힘을 줘 움직이기만 하면 몸 전체를 앞뒤로 그네 뛰워주는 로킹체어 기능까지를 훌륭히 하는 고급품이라.

굳이 고급이라 함은 투박해 보이면서 섬세하고, 무게감이 있어 안정적이고 고풍스런 멋을 살린 희귀성의 맞춤의자이기에 점수를 더 주는 것이다.

나는 그 의자에 앉아 응접실 티-테이블에 발을 걸치고 120~130도로 상체를 눕혀 흔들어대면서 독서를 한다든지 상념에 젓는 시간이 그렇게 편할 수가 없다.

그래서 내 생각엔 의자가 두 번째의 주인으로 나를 잘 만났다고 흐뭇해 할 거라는 거다.

그 놈은 사실 내가 아니었으면 지금쯤 살아있기 어려웠을, 어찌 보면 내가 은인인 것이다.

의자 주인은 나의 매형님이셨다. 고혈압과 당뇨 합병증으로 수년간 병마와 싸우실 때 둘째아들이 ‘아버님이 가장 편하게 앉아있을 의자’를 선물하여, 몇 일전 영면하실 때까지 애용하셨던 깊은 사연이 깃든 의자였으나, 주인을 잃게 되자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되기 직전의 기구한 운명에 처했던 그였다.

매형님의 삼오제를 지내고 집안정리를 하시던 누나께서 어디선가 이 의자를 꺼내 오시더니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고 가족들에게 하문하고 계셨다.

누나는 슬하에 3남1여를 두었고, 그들은 다 성혼하여 자식들까지 둔 성공한 사회인이지만 누구하나 선뜻 자기 아버지의 애용물을 상속받겠다고 나서지를 않고 있었다.

의자의 운명은 다른 매형님의 하찮은 유품들과 함께 소각하여 버려지는 수밖에 없는 듯싶었다. 사실은 누나께서도 의자를 보관하고 싶지가 않으신 낌새였다.

“누나 내가 갖다 쓸래요. 애들도 내 집에 오면 이 의자를 보고 아빠를 생각할 수 있어 좋고, 나도 매형님을 늘 생각하게 되어 좋을 것 같네요”라고 나는 단호하게 제안했었고,

"그래~."라고 누나의 대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난 무거운 의자를 들고 나가 동구 밖에 주차한 내 코란도-벤에 실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내가 의자의 두 번째 주인이 된 횡재꾼이기도 하지만, 사연을 알고 보면 의자가 나를 만나 제2의 생을 시작한 톡톡한 행운을 입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네 풍습에 고인의 유물(중요한 것을 빼고)은 대게 소각시키는 걸로 정리함을 후련하게 여기는 장례문화가 보편화 되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 진부한 인습은 옛날에 전염병으로 사망한 후의 재감염을 막기 위한 한 방법으로 고인의 소지품 소각이 행해졌고, 그 행위가 전수되어 풍습으로 남게 되었다 할 것이다.

때문에 ‘사자의 물건은 불결하다’는 선입견이 아직 쓸만한 고인의 유물들을 소각 아니면 매장해 버리는 것이리라.

조금만 더 발상을 전환한다면, 고인의 유물을 영원히 애장함으로 해서 고인을 기리고 유지를 받드는 기횔 더 실감케 되고, 버리지 않고 활용함으로 재화를 아끼는 경제적인 이익도 상당한 것임을 고민해 봐야 할 것이다.

설혹 고인이 몹쓸 전염병에 죽었다 해도 고인의 유품은 얼마든지 깨끗이 위생처리한 후 재사용할 수 있지않은가. 죽은자의 유품이 아니더라도 우리들은 일상에서 아직은 쓸만한 물건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다 버리는 한심함을 종종 발견하게 된다.

수명이 다하지 않은 물건을 버리는 행위는 사회적 낭비고 인류에 대한 죄악이라고 자성해야 한다.

어떤 물건이던지 정성껏 사용하고 보관하여 후손들에게 대물려 주고, 앞서 사용한 사람들의 음덕과 물건에 담긴 역사를 엿보며 귀하게 애용함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당연한 도리이며 생활의 지혜라 할 것이다.

나는 집에 도착하여 의자 쿠션을 떼어내 깨끗이 세탁하고 몸체는 물걸레로 말끔히 닦아 말리면서, 매형님께서도 기뻐하실 거라고 생각되어 얼마나 흐뭇한 시간을 보냈었던가.

팔걸이 표면 니스 칠은 매형님 팔로 닳고 닳아 좀 벗겨졌었지만, 그 흔적은 매형님이 남긴 것이기에 더 정감이 가서 그대로 두기로 했으며, 매형이 그랬던 것처럼 나도 이 의자에서 편안한 자세로 많은 일들을 하게 될 것이다.

매형님이 남겨 준 선물이어서일까?

서울에서 귀가한 아내도 처음엔 마땅찮아 몇 마디 투덜대더니만 곧 편한 마음으로 의자를 대하여 한시름 놓이게 됐다.

그 뿐이랴. 매형님 1주기 遷度祭를 거행키 위해 누나 댁을 갔을 때 서울큰누나와 누나는 내게 칭찬과 격려를 해 주시는 게 아닌가.

두 누나들 왈, “동리사람들이 네가 의자를 갖고 가니까 ‘처남이 매형과 정은 단단히 든 모양이여!’라고 부러워했다”고 흐뭇해 하셨다.

많은 매형님들 중 정읍매형을 가장 가까이 자주 대한 것은 사실이고 그래 은연중 매형도 나에게 우스갯말을 곧잘 할 정도로 이심전심이 소통했던 친밀함은 자인한다.

그러나 난 매형의 철저한 수도승 같은 생활방식이 마땅찮았고, 그런 자기본위의 삶으로 해서 가정의 대내외 온갖 일들을 누나 혼자 감당해야하는 고난의 생활이,내가 매형을 좋게만 생각할 수 없는 요인 이였다.

결혼 초부터 가난한 살림을 꾸리는 누나에게 매형은 하숙비(?)조차 제대로 지불하지 못하는 하숙생 같은 남편(교직자`무보수였던 원광중.고에서 호남중.고로 직장을 옮길때까진)이였고, 더구나 집안일엔 손끝도 내밀지 않는 위인 이셨다.

오직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의 직분에만 충실하고는 다른 면엔 어떤 관심도 갖지를 않는,그럴 생각도 없었을외골수 인생이 매형의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런 누나의 고단한 생활을 가까이서 자주 접한 나는 자연히 매형을 경원시하는 마음이 생겼고, 그런 서먹한 마음의 빗장은 누나네 생활이 좀은 윤택해 지고 나 역시 결혼하여 안정된 가정을 꾸리게 될 때까지 오래도록 간직하였었다.

내가 익산으로 이사를 오게 되면서부터는 자형님과의 사이는 급속도로 화기애애하게 되며 무한한 신뢰감속에 ‘형제의 정분’을 돈독히 나누고 있었는데, 매형은 애석하게도 50대에 몹쓸 병마와 투병하여야 했고 정년도 아직은 먼 연세에 명퇴하고 끝내 운명하심 이였다.

매형이 앉았던 의자에 앉아 옛날을 회억해 보건데 옛날 어린 내가 당신에게 반감을 갖고 냉전시위(?)를 했던 옹졸함이 부끄럽고 죄송스러워졌다.

가난은 결코 죄가 아니며, 매형은 무보수로 교직에 봉사하여야 할 절대적인 사명감을 어찌할 수 없었던 상황 이였고, 더 중요한 것은 누나와 매형은 그런 상황을 기꺼이 감수하면서 양심을 저버리지 않는 삶을 인생의 최고선으로 하는 신앙인임을 난 간과했던 것이다.

누나와 매형의 일생은 철저한 안분의 생활, 자리이타의 신념, 감사와 봉사의 원불교도로써의 신앙인의 길,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생활자세가 일관되어 온 일생이셨다.

두 분은 세인들이 속칭으로 즐기는 삶(음주,가무,여행등)과는 거리가 있는, 아니 그런 생활엔 전혀 눈길을 보내지도 않는 올곧은 참 인생을 살아오신 것이다.

그런 누나 부부께 내가 세칭 ‘생활의 엔조이’를 모른다고 불만을 토했으니 얼마나 어리석은 짓 이였을까. 매형께 늦게나마 심심한 사죄드리는 처연한 내 몸꼴을 용서하실런가.

7여 년의 매형 간병에 심신이 지칠만한 누나였지만 나는 한번도 그런 낌새를 본적이 없었을뿐더러, 발인식 전날 밤에 옆 동네 일부사람들이 매형님 운구(運柩)행렬이 동네 앞을 지나치게 됨을 반대한다는 소문을 듣고 달리 운구길 찾아 뒷산을 헤매는 누나의 모습에서 참부부의 위상을 절감하기도 했었다.

나와 같이 마을 뒷산을 답사하며 내일 장례 운구 길을 찾고나서 한시름 놓은 누나는 비탄에 젓은 축원을 혼잣말로 하시는 거였다.

“당신이 가는 길, 이렇게 좋은 길이 있는데---, 어떻게 산 당신인데---.가시는 길이 편안하지 않을 리가 없지요.”라고 울먹이셨던 거였다.

평생을 남에게 털끝만한 실수나 폐를 끼치지 않은 삶을 살아오신 매형의 마지막 가시는 길에 잡음이 있어서야 될 법이나한 소리-고인의 음덕이 의당 장해물을 용납지 않을 것이란 확신을 확인하는 기쁨의 탄성일 것이라 생각되었다.

발인식 후 운구행렬은 누나가 답사해 두었던 마을 뒤 산길로 아무 탈 없이 장지까지 행해졌고, 그런 매형님, 참 사람이 남기고 간 의자는 나에게로 와서 내가 진솔한 인간이 되가는가를 지켜보며 보좌해 주려는 것일 것 같음이다.

나는 이 의자를 매형 못지않게 애용하리라.

그리고 조카들, 매형님의 자식들이 내 집을 방문하게 되면 이 의자에 숨겨진 역사에 대하여 얘기하자고 할 것이다.

누나도 의자 앞에서, 지난날에 있었던 헬 수 없는 기억의 순간을 즐기실 거라고 미쁘게 된다.

저 세상에서 매형님도 그런 우리들을 굽어보며 흐뭇해하실 거라고 확신하는 바이다.

2001. 7.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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