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기(知己)M과 떠난 여정(旅情) - 슬로시티 증도(曾島)
짱뚱어다리
아침8시반경, 경부고속도로죽전정류장에서 M이 승차, 우린 예정대로 남도를 향한 고향길에 들어섰다. 울 둘이만의 드라이브여행을 약속한 건 한 달 전 고속터미널부근의 어느 식당점심자리에서다. 특별한 일 없이 우린 가끔 고속터미널에서 만나 점심을 먹곤 했었다.
엘도라도리조트에서
M이 늘 바쁜 탓에 간단히 점심만 먹고 헤어지는 싱거운 만남이지만 깐엔 오랜 우의를 다짐하는 자리였다. 근디 지난번엔 M이 뜬끔없이 고향엘 한 번 슬쩍 갔다 오자고 했다. 무슨 볼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나이가 드니 이러다가 영 고향엘 가보지 못할지 모른다는 애잔한 맘이 자주 든다는 거였다. 나는 흔쾌히 대답했었다.
그러고는 4월 중순 나는 서울로 이사를 하면서 고향선산을 다녀왔기에 오늘의 고향길은 순전히 M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한 거였다. 하여 우린 고향엘 들른 후 슬로시티증도를 경유하는 2박3일 여행을 하자고 했다. 경부선-천안`논산선-공주`서천선-서해안고속도로를 통과하는 영광행 내비를 찍었다. 뚜렷한 목적지도, 상세한 계획도 없이 나선 여행이라 기대랄 것도 없었다.
오랜만에, 정말 오랜만에 단 둘이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드라이브를 하다보면 일상탈출과 함께 몇 십년간 묵힌 흉금도 나누는 흐뭇함을 느낄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공유하고 있었다. 우리나라도로망은 세계에 자랑할 만하게 사통팔달로 잘 닦아놓았다. 서해안고속도로는 M이 도공현장소장으로 재직하며 만든 회심작이다.
그가 고속도로를 닦을 때 나는 I시에 살고 있어 우린 빈번하게 만나곤 했었는데 본사로 자릴 옮겨 본부장이 되면서, 글곤 퇴임 후에도 사기업체에 출근하면서 만남이 뜸해졌다. 국영기업 퇴직 후 사기업체에 적을 둘 수 있었던 건 M이 성실하고 완벽해서였을 테다. 그래서 그는 더 바빴고 우린 점심시간에 한 번씩 밥이나 먹곤 했던 거였다.
지금은 회사에서 연락이 오면 출근한단다. 이 나이에 누군가가 아니, 회사에서 필요한 인물, 아직도 공익을 위해 할 일이 있다는 것은 행복이다. 자업자득이지만 M은 행운아다. 나는 M이 정퇴 후 나가는 사기업체 이름도 모른다. 묻지를 안했다. 궁금하기도 하지만 왠지 그의 프라이버시를 엿보는가 싶고 뭣보다 그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몰라서였다.
태평염전
영광톨게이트를 통과 불갑저수지갓길로 들어섰을 땐 11시가 지나서였다. 만수(滿水)였다. M이 중학생 때 물 빠진 저수지를 횡단하며 이십 여리를 통학했던 추억을 얘기했다. 그때의 교우들은 지금 다 어디서 뭘 하는지? 확실하게 근황을 아는 친군 다섯 사람 정도란 걸 헤아리며 세월의 덧없음을 새삼 절감했다.
학창시절의 친구들은 졸업과 함께 일터의 친구로 차환되고, 직장친구들도 하나둘씩 단절되다 정년에 이은 노년에 이르면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리는 고립의 씁쓸함에 울적해진다. 고향마을에 들어섰다. 어릴 적의 모든 추억을 담고 있을 동구(洞口)의 당산나무도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사라졌다. 정자(亭子)옆에 2세목을 한 그루 남긴 채였다.
염전도랑
정자 옆엔 마을회관이 있고 그 뒤에 교회가 있는데 2층 신축건물이었다. M이 오늘 고향을 찾은 이유하나는 교회2층집을 둘러보기 위해서란 걸 목사님을 찾아 얘길 나눌 때 알 수 있었다. 교회 옆의 전답900여 평을 매물로 내놨었던바 매매계약직전에 매수자가 포기한 까닭이 문제의 2층 건물 탓이란 생각에 확인하고 싶었던 거였다.
2층 교회건물이 일조권과 전망을 웬만큼 차단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그렇다고 교회의 잘못이 있는 것도 아니니 해결책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다시 매수자가 나타나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는 걸 인지하고 우린 조카B의집을 방문했다. 점심을 같이하며 고향얘길 듣고 싶어서였다. 허나 집엔 아무도 없었고 전화도 받지 안했다.
짱뚱어와 게와 고동
모내기직전의 서래질 하러 논에 갔다는 걸 알았다. 농촌들판은 서래질 무논 만들기가 한창이었다. 점심을 같이하고 싶어서 초등친구Y와 J에게 전활 넣었으나 그들도 막 식사를 마친 상태였다. 12시가 지났으니 그럴만했다. 허나 농촌에서 정오가 되기 무섭게 점심을 든다는 게 얼른 수긍이 안 됐다.
소금창고
우린 증도를 향하다 영광`함평경계의 어느 식당에서 삼겹살볶음백반을 시켰는데 먹을 만했다. 식당 앞에 주차대수가 많은 건 입소문 난 맛집이란 걸 알리는 셈이다. 함평IC에서 무안공항고속도로를 이용 슬로시티증도를 향한다. 증도는 내가 제안한 행선지다. 사실 나는 진즉부터 그 섬엘 가보고 싶었었다.
지도를 통과할 땐 옛날 지인들과 예까지 와 어판경매장에서 활어를 구입하여 민가에서 회와 생선찌개요리를 만들어 포식했던 추억이 떠올랐다. 어판장에서 팔뚝만한 숭어를 공짜로 얹어줄 만치 생선 값이 싸서 일행 세집은 저마다 한 포대씩 쌌었다. 그땐 지도와 증도를 잇는 다리공사가 막 시작된 참이었다.
그 후 연육교가 개통된 증도는 슬로시티란 닉네임까지 붙으며 나의 동경의 섬으로 각인 됐다. 그 증도가 빨간 다릴 뻗어놓고 우릴 맞았다. 썰물로 민낯이 된 까만 갯벌은 짱뚱어다릴 몸통에 세워놓고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다. 글곤 곧장 바둑판들을 끝도 없이 연결하여 별천지를 이룬 태평염전을 쫙 깔아놓는다.
최대의 천일염보고지, 더는 아스름한 저 지평선을 느긋하게 걷지 않고는 자진할 만큼 끝없는 갯벌은 헬 수 없을 수많은 수생생물이 서식하는 섬사람들의 옥토다. 5월 햇살에 번쩍대는 바둑판염전은 수로위에 세월의 때를 덕지덕지 붙인 판자창고를 지아비처럼 동반한다. 낡은 창고 옆 물 빠진 수로엔 짱뚱어와 농게, 칠게, 고동의 놀이판이 펼쳐졌다.
엘도라도리조트
주위의 미세한 변화에 민감한 짱뚱어가 얼마나 멍청인지를 놈을 낚는 낚시꾼 옆에서 지켜보면 알 수가 있다. 낚시 바늘 몇 개를 맨 낚시줄을 갯벌에 던져놓고 빠르게 훑으면 놈들은 바늘에 걸려들어 줄줄이 매달려나오는 거였다. 한 번에 낚는 몇 마리씩의 짱뚱어라니! 그 짱뚱어는 미꾸라지 대용의 추어탕이 되기도 한다.
그 갯벌이 밀물과 멀어지면 칠면초, 함초, 나문재 같은 염생식물이 색칠을 한다. 하여 푸른바다는 검은 알몸을 선보이다가 붉어진다. 국제슬로시티연맹은 2007년 증도를 아시아에서 맨 처음 슬로시티로 지정하여 갯벌 염전의 가치를 인정한다. 갯벌은 인류의 생명을 위한 옥토인 것이다. M과 나는 소금박물관을 지나 태평염전을 훑고 엘도라도리조트해안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슬로시티증도를 발로 답사하거나 자전거를 빌어 타고 한 바퀴 돌면 유네스코가 생물권보전지역으로, 갯벌도립공원으로, 친환경유기농의 섬으로 지정한 까닭을 알게 된단다. 허나 우린 떠나기로 했다. 햇살이 여름처럼 따가운데다 M이 한사코 도리질을 해서다. 그는 끈적끈적한 바다보다는 녹음의 숲길을 걷고 싶다고 했다. 선운사를 향한다.
2019. 05. 22
*지기(知己)M과 떠난 여정(旅情) - 모양성(牟陽城)과 맹종죽(孟宗竹)
모양성
함라산 아래 천둥오리집 ‘행복가든’은 여전히 성업 중이었다. I시에 살 때 우리부부는, 아니 지인들과 20여년을 뻔질나게 드나들던 식당이다. 특히 아내가 젤 허물없이 식도락을 즐기던, 그야말로 식당여사장이 만만하게 느껴진 천둥오리전문식당이었다.
맹종죽
직영하는 천둥오리장의 오리고기는 신선하고 저렴해서 농촌에 있는 식당이지만 늘 만석을 이루고 지금은 체인점까지 몇 군데 생겼다. 1여년 만에 맛보는 오리로스식감은 여전했고 뭣보다도 M이 맛있게 먹어 좋았다. 후속으로 나온 뼈따구탕은 포장을 해달라는 M을 보고 당황했다. 샌님에 비위살 약한 그가 남은 음식을 싸 달라는 게 믿기지 않아서다.
노을속의 북문
뼈따구탕은 나를 주는 게 아닌가? '남은음식은 버리기보단 포장해와 먹어야한다'는 그의 지론을 우리 모두 공감하면서도 굳이 실천하려 애쓰질 않는다. 그가 진정한 신사다. 그는 점심만 제대로 챙겨먹고 아침은 쑥`찹쌀인절미 몇 개로 때우며 저녁식사는 아예 생략한다고 해서 나는 놀랐다.
북문입구
‘밥이 곧 힘’이라 여기며 삼식을 꼬박꼬박 챙기는 나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하루 한 끼의 식사로 버틸 수 있다는 M은 포만의 고통보다는 배고픔의 행복을 즐긴단다. 세월은 죽마고우인 그가 실로 많이 변한 걸 모를 정도로 소원했음을 통감케 했다. 선운사는 내일가기로 하고 고창에 입성, 석정온천에서 사우나로 피로를 씻었다.
북문 앞 모양성입구
모텔에 여장을 푼 우린 나란히 침대에 누워 피곤도 잊은 채 자정까지 참으로 많은 얘기를 나눴다. M과 잠자릴 같이 한 건 까마득한 옛일이어서 감회가 뭉클했다. 학창시절 이후 첨으로 갖는 동숙(同宿)의 밤이었다.
서문과 성곽
죽마고우도 삶이란 일상 속에서 잊혀 지기도, 때론 영원히 헤어지기도 한다. 절친들이 생활이란 각박한 시간의 수레바퀴에 소리 소문 없이 떠나버린 거에 대해 우린 한숨을 쉬며 자조했다. 그런 부질없을 아쉬움을 씹느라 자정을 넘겨서야 잠에 들었었다.
담날아침, 내가 일어났을 땐 아침 7시였다. 숙면 중인 M을 깨우기 뭣해 나 혼자 모양성산책에 나섰다. 모양성(牟陽城)에서의 일출을 기대했던 간밤의 꿈은 꿈으로 삼키면서 아침햇살이 소나무숲속을 더듬어야 했었다. 모양성아침을 여는 산책객들이 한가롭고 행복해 보였다.
관청
모양성 속살을 헤집으면서 송림속의 오솔길마다, 전각들마다 간직하고 있을 무진장한 얘기들을 되새김질 할 시민들의 산책이 진정 행복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성곽에서 조망하는 고창시가지는 더할 나위 없이 깔끔 푸근해 보인다. 훤칠한 소나무가로수로 사통팔달한 아담한 전원도시라.
고창시가지
모양성은 조선조 단종때 왜침에 대비하러 축성했다. 둘레가1.7km쯤 되는 성벽은 낮은 언덕을 이루고 5만평의 성내는 울창한 송림(松林)속에 띄엄띄엄 전각들이 들어서 트레킹하기에 딱이다. 더구나 낫살께나 먹은 홍송(紅松)들은 훼훼 몸뚱이 비틀고 있어 운치가 그만이다.
동문
제멋대로 춤추는 듯한 붉은 소나무언덕을 오르랑 내리랑 하는 산책은 신선이 된 기분이 들었다. 글고, 글고말이다. 느닷없이 나타난 맹종죽(孟宗竹)밭에 서면 완전한 망아(忘我)의 경지에 들어 탄성을 연발하게 한다. 붉은 소나무에 첩첩으로 갇힌 맹종죽은 푸른 하늘을 향할 수밖에 없었기에 더 고고하고 더 서늘한 기운이 서릴까?
맹종죽
누가 뭣 땜에 소나무밭에 대나무를 심어 녹음청정 물씬 풍겨 찾는 이까지도 온통 푸르게 만들까? 청월(靑月)선사가 포교를 위해 모양성 안에 보안사(普眼寺)를 짓고 운치를 돋우기 위해 맹종죽을 심었다(1938년)라는 푯말이 있다. 처음 접한 맹종죽! 대나무처럼 시원시원한 어원(語源)을 모른 채 글을 쓰고 있다.
어느 때라도 이곳에 서면 서늘한 기운에 상념의 굴레에서 벗어나겠다싶으면서도, 바람 한 자락이 불 땐 이파리울음소리에 오장육부까지 씻어낼 것만 같았다. 모양성엔 맹종죽림이 있고, 맹종죽림안에서 나를 보고 싶으면 모양성을 찾을 일이다.
윤달에는 돌을 머리에 이고 성곽을 밟는 부녀자들의 답성놀이가 볼만하단다. 성곽 밟기 한 바퀴면 다릿병이, 두 바퀴면 무병장수 세 바퀴를 돌면 극락승천할 수 있단다. 모양성입구에 답성놀이 하는 세 여인이 탐방객을 맞고 있었다.
성곽외벽
“보리밭 이랑사이 모양성 오르는 길 / 추억하나 남겨두고 떠나버린 그 얼굴
그리운 사람 잊지 못해 돌이 되어 쌓였는가 / 지금도 마디마디 가슴 저려 오누나
떠난 사람 달이 되어 장대봉에 떠오른다 / 얼마를 더 돌아야 매듭이 다 풀릴까
머리마다 돌을 이고 성을 밟는 아낙네여 / 오백년 모진풍상 모양성 이끼긴 길
사랑하나 남겨두고 떠나버린 그 얼굴 ----”
<모양성, 노래;최진희>
2019. 05. 23
북문성곽
부도밭
옥. 죄인들을 심문하던 도구들이 전시 됐다
작청
고인돌
풍화루
샘
내아
동헌
객사
성황사
남치
서문
서문성곽 외벽을 타고 한 바퀴 도는 데 40분쯤 소요된다
팔각정
모양성 수목관리 중
동문
운치 만점인 고창읍 소나무가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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