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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감-그 미지?

좋은 밤 아름다운 자리

좋은 밤 아름다운 자리

 

식탁 뒤 창틀 프레임속의 북악산

 

M과 내가 광화문FS호텔라운지에 들어섰을 때가 오후6시경이었다. 주중에다 이른 퇴근시간이여선지 라운지테이블엔 손님이 없었다. 이 레스토랑에 처음인 나로썬 단아한품격도 좋았지만 27층에서 조망하는 광화문일대풍광이 장관이라 연탄성하고 있었다. 넓은 홀엔 손님이 없어 우리는 홀 안 구석구석을 어슬렁대면서 땅거미 내리는 사대문일대의 풍정에 빠져들다 인왕과 북악산이 조망되는 테이블에 착석했다.

 

왼편의 인왕산과 중앙의 북악산, 그 아래 경복궁. 북악 뒤로 북한산이 실루엣같다

인왕산치마바위와 경복궁경회루가 지척간이다

 

이럭저럭 서울에서 꽤나 뭉그적대며 살아왔지만 광화문 한 복판 고층에서 석양의 풍정에 취하긴 첨이라. 좀 아쉬운 건 구름이 많아 눈부신 황혼을 기대할 순 없겠다 싶은~? 경복궁이 미니어처사진처럼 저만치에 있고 그 뒤를 북악산이 산정에 바윌 업은 채 병풍을 쳤다. 한 폭의 묵화 같은 북악의 실루엣으로 북한산준령이 그 뒤에서 하늘에 마루금을 쳤다. 북악산 왼쪽엔 인왕산이 흰 치마를 걸치고 하얀 성곽을 어깨띠마냥 산릉에 수놓았다.

 

왼편의 인왕산 전경 & 우측의 북악산

 

인왕산치마바위에 홍치마를 널어 경회루의 남편(중종)에게 그리움을 전하는 폐비신시의 애련이 생각났다. 여기서 조망하니 치마바위를 보려고 경회루서 어정대는 중종이 그려질 만큼 지척간이다. 땅거미를 쫓는 불빛이 여기저기서 도깨비처럼 명멸한다. 우린 와인 한 잔씩을 들고 와 착석했다. 며칠 전 내가 동창의 전활 받고 허둥지둥 달려갔다가 되돌아선 얘기를 꺼냈다. 재경불우회임원진 이`취임자리였다. 엘리베이터서 내리자마자 즐비한 축하화환과 야단법석인 만석의 얼굴들은 내겐 낯설었다.

 

 

만석인 테이블하나에 동창 네댓이 앉아 반갑게 맞아줬지만 재경불우회가 생소한 나는 비회원인데다 며칠 전부터 백내장수술중이라 시력도 안 좋아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 들었다. 더구나 얼른 일별하니 하객들이 모두 젊고 더는 장연꼰대들이라. 이미 노인반열에 들어선 나지만 이 자리만큼은 별 환영받지 못한 노인네일 것 같은 자격지심까지 더해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고 슬그머니 자릴 떴다. 누구한테도 귀띔 않고 귀가하면서 동창사돈한테 미안타고 메시질 띄었다.

 

남산, 빌딩울타리 속의 덕수궁(중앙)

 

곧장 사돈의 섭한 감정과 힐책이 전화선을 타고 내 귓가를 후볐다. 애당초 사돈한테 자세히 알아보고 참석여부를 결정했어야 했다. 미안하기 짝 없는 실수였지만 내 경솔한 행위를 후회하진 않았다. 불편한 자리에 끼어 두서너 시간 마음 졸이는 것 보단 낫다고 여겨서다. 더구나 식후 브로냑과 비가목스란 두 종류의 안약을 넣어야 하는 걸 깜박 잊고 그냥 왔다. 그런 얘기를 M에게 하자 그는 더 자조(自照)적인 회억을 한다. 어느 결혼식장엘 가서 보니 늙은이는 자기만인가 싶어 후딱 자릴 털고 식장을 빠져나왔노라고-. 글면서 한 수 더 보탰다. 이젠 우리들은 한발 뒤로 물러나 있어야할 때라고-.

 

 

자기가 서 있어야 할 자릴 알고 머무를 때 모습과 인격마저 아름답다는 M의 지론은 잔잔한 감동이 됐다. 바로 앞에 엘이디조명소복을 걸친 아시아나빌딩이 은은한 옷차림으로 변신했다. 휘황찬란한 네온사인으로 으리비까 황홀의 극치미를 과시했던 빌딩이 고상한 은빛 옷으로 바꿔 입은 거다. 화려한치장의 아시아나빌딩이 인구에 회자된 건 총수의 제왕적경영과 부실한 재무구조로 재벌의 허상을 안고 있어 세간의 입방아 찧기 딱 이었지 싶다. 결국 아시아나빌딩은 주인을 바꿔야 했다.

 

엘이디조명에 소복을 걸치 아시나아빌딩. 작년까진 오색찬란한 네온빛으로 빌딩전체가 호사의 극치였다. 앞 도로가 충정로

 

권력과 부를 가진 사람일수록 서 있는 자리에서 수신을 잘 해야 주변까지 아름다워진다. 부자가 돈을 탐하고 고위층이 권세에 아부하며 늙은이가 물러설 줄 모르면 인격이 추잡해진다. 절친M이 정퇴한지 5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사기업에 출근하고 있다. 해도 난 그가 회사에서 하는 일이나 직책을 여태껏 물어보지 않았다. 그의 고위직경륜이 그 회사에 도움이 되 자문역을 할 거란 추측에 앞서 M의 훌륭한 인격을 높이 산 땜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서다.

광화문사거리, 맞은 편에 동아일보사옥

 

M은 한시도 자기가 서 있는 자리에서 수신을 게을리 한 적이 없지 싶은 친구다. 난 그의 고매한 인품에 반해서 지기(知己)임을 자랑삼는다. 우린 일어서 식단을 향했다. 뷔페식은 누구의 눈치도 안보고 먹고 싶은 걸 먹을 만큼만 취할 수 있어 좋다. 호텔 뷔페는 깔끔하고 정갈한 기분이 들어 더 좋다. 광화문일대의 야경과 식탐까지 즐기는 만찬을 좋은 친구와 같이하니 더더욱 뿌듯했다.

 

우린 한두 달 터울로 만나고 있지만 대게 그가 식대를 치루곤 한다. 오늘은 내 차례라고 식탁에 앉으며 못을 박았다. 늘 그가 화장실 가는 척하며 계산을 미리 하는 탓이다.

늙으면 가진 걸 하나씩 내려놓아야 한다. 아니 붙잡고 싶어도 하나씩 빠져나간다. 친구도 심지어 자식들도 하나씩 곁에서 떠나간다.

 

악착같이 모은 재물도 내 것이 아니란 걸 깨닫게 된다. 아니 누구의 것도 될 수가 없다. 애초부터 재화는 사회의 공물(公物)인데 잠시 내가 보관했을 뿐이란 걸 인식하게 된다. 그 재산을 누구에게 맡겨야 유익한 유산으로 사회에 이바지하는 공물이 될 것인가는 내 자신의 선택이다. 아름다운 나로 남기 위해선 위탁자를 잘 선택해야 한다고 M과 나는 씨부렁대긴 했다.

참으로 좋은 밤이었다.

2019. 01. 27

좌측에 아시아나빌딩, 멀리 안산, 가운데 숲이 역사박물관

 

좌측의 안산과 우측의 인왕산은 무악재가 생이별을 시키기 전까진 본시 한 몸이였다.

북악과 경복궁과 광화대로가 일직선상이다. 아랜 야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