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비 흩날린 후에~! 

 

 

 

지난3월말에 초딩친구들과 남도여행길에 들었을 땐 벚꽃이 피기 시작하더니만 일주여일사이에 연두이파리로 옷을 갈아입었다. 하얀 벚꽃이 흡사 팝콘 터지듯 산하를 경천동지케 하더니 느닷없는 꽃샘추위에 꽃비 흩날리다 이내 연둣빛 봄옷으로 살랑대고 있다. 나는 그 여행길에서 부산에 사는 손위질부한테서 전화 한통을 받았었다. 손위조카이며 친구이기도 한 Y가 세상을 하직했다는 부음 이였다.

 

 

나는 여태 질부와 전화통화 한 적도 없을뿐더러 30여 년간 상면하지도 않아 그녀의 울먹인 전화소리에서 망연자실을 느끼고 있었다.

작년9, 내가 부산에 머물 때 오랜만에 Y를 만나 오륙도를 낀 이기대길을 동행하며 회포를 나눈 하루 동안에 그의 심상치 않은 건강을 알아챘었다. 전립선암으로 5년여 투병중이란 사실을 실토하면서도 그는 특유의 낙관적인 성품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우린 희희낙락했었다.

 

 

글고 11월 다시 부산에 가서 Y를 전화로 불렀는데 건강이 안 좋다고 해서 지금 찾아가겠다는 내게, 따뜻해지면 만나자고 완강히 버텨 수화기를 놓은 게 마지막통화가 될 줄을 어디 상상이나 했었던가? 그때도, 그 전전에도 질부랑 우리부부 같이 식사라도 하자는 나의 제안을 끝내 이루지 못했던 아쉬움을 질부도 알고 있을 터였다. 내가 그런 질부를 최초로 만나게 된 것은 Y의 결혼식 이였다.

 

 

신부댁에서 전통혼례식으로 치룬 결혼에 나는 친구로 참석하여 어설픈 축사까지 읽었고, Y가 고향을 떠나 부산서 온갖 장사를 하다 공동어시장에 중도소매인으로 자릴 잡아 부를 쌓을 무렵 몇 번 찾아가 만났었다. 지금도 기억 생생한 건 질부네가 집을 마련하여 축하차 우리부부는 벽시계를 사들고 방문했던 한창 잘나가던 시절이었다.

 

 

그땐 귤이 상당히 비싼 과일이었는데 Y가 귤 한 상자를 선물하여 우리 애들은 귀하디귀한 귤을 포식했던 풋풋함을 추억하곤 했었다. 그런 질부네가 학업중인 두 아들을 사고로 여의고 달랑 고명딸 하나 출가시킨 채여서 세상살 맛 소태 같았을 터다. 그 질부가 이젠 혼자 남았으니 그 허무비감 얼핏 상상이 된다. 질부는 남편의 부음을 내게 안 알릴수도 없어 경황 중에 마지못해 전활 넣었을 테다.

 

 

그 심정을 헤아리면서도 원거리란 핑계로 나는 Y의 장례식에 불참했다. 불원간 부산에 가서 질부랑 식사자리 마련하여 사죄하자고 다짐했던 것이다. 초딩동기이면서 한 살 위인 Y는 등치도 큰 호인상이었다. 시골부잣집 둘째였는데 중학교만 다녔었다. 영리한 그가 상급학교진학을 안 한 것은 당시엔 부모의 권유가 절대적이었던 농촌의 향학열 탓이었을 테다. Y는 고향들녘을 꿰뚫고 있어 방학 때면 우리들에게 어디 누구네 밭에 무슨 군입거리가 있는지를 소곤거려 야행좀도둑의 스릴을 만끽하게 했었다.

 

 

허나 Y의 기행 하나를 잊을 수 없는 일은 초등5년 때 친구M이 허리에 둘러맨 책보자기를 물고 뒤따라가다 앞니가 부러진 사건이다. M이 갑자기 튀는 통에 이빨 빠진 Y는 울음보를 터뜨렸고, 이빨 빠진 채 성장해야 했다. 빠진 이빨 감추려 어설프게 입술 오므리려 애쓰던 그가 눈에 선하다. 모질지도 못하고, 푸짐하기 그지없던 순둥이 Y를 다시는 볼 수가 없다니? 아직 눈 감긴 이른 나이라 더 애통하다.

 

 

Y부음에 앞서 인천 사는 아래처남이 병사했다. 패암을 넘 늦게 알아채 손쓸 겨를이 없었단 게 비극이었다. 명색이 손아래처남이지만 그와는 언제 다정하게 마주앉아 식사한 적도 없었다. 자연 친분이 없으니 내겐 남이나 다름없는 얼굴 잊을만한 처남이었다. 게으르고 공부완 담을 쌓은 처남은 일찍 가출하여 어부가 된 통에 바다가 삶의 터전이어서 만날 기회가 없었다.

 

 

가난을 숙명처럼 짊어진 처남은 어떤 여인을 만나 슬하에 두 아들을 두었으나 그 처남댁마저 십여 년 전에 병사하여 박복한 홀애비생활을 해야 했다. 처남이 중병이란 소식은 설날 듣고 아내는 혼자 인천길병원으로 문병을 갔었다. 나도 그때 동행했어야 했다고 뒤늦은 후회하며 처남의 영정 앞에 조문사죄 하였지만 용서받을 수 있을까? 생각할수록 불행하고 불쌍한 처남의 일생이었다.

 

 

식구끼리 오순도순모여앉아 따뜻한 밥상 몇 번이나 즐기고 떠났을까? 병들고 지친 몸 뉘 하나 간호하며 밥 한 끼 차려주지 안했을 고단한 최후를 상상하며 그의 영정을 물끄러미 쳐다봐야만 했다.

두 아들 중에 하나가 딸애였다면 따뜻한 밥상 몇 번은 마주했을 테다. 사내자식은 대게 불효자식이기 쉽다. 잔정이 없는데다 세심한 배려심도 결여되기 쉬워 효행길이 어설프다. 상주랍시고 문상객 받고 있는 두 아들한테서 황망한 슬픈 기색을 엿볼 수가 없었다.

 

 

아니 마흔살이 됐다는 큰애는 뭐가 그리 좋은지 싱글벙글 이었다. 가난한 아버지 병수발도 큰 짐이 될 판이니 호상(?)이라는 건가? 아니면 애통해하고 있으면 아버지의 승천길에 방해가 되어 부러 밝은 표정을 짓느라 애쓰는 건지울고불고 통곡하는 유가족들의 발목잡기로 저승길 밟는 고인의 행색이 불편할 성 싶기도 하다. 해도 처남의 일생이, 두 아들의 못난 아비가 불쌍하고 불쌍한 걸 영전 앞에서 밤새우며 곱씹곤 했다.

 

 

처남을 본 적은 처남댁이 병사한 때와 장모님이 별세한 상가에서였다. 그때는 모두가 황망한 상중이라 어떻게 날밤을 새웠는지도 가물가물해 처남과의 시간기억이 없다. 암튼 처남과의 다정한 한때도 못 가진 채로 고인이 됐기에 가난한 일생의 그가 불행한 듯싶은 거였다. 가난이 결코 불행은 아니기에 나의 예단은 다분히 객관적일 테지만~

아니 처남은 단언하건데 누구한테 신세지거나, 몹쓸 짓 하거나, 기망한 적은 없을 것이다.

 

 

전형적인 소시민으로써의 처남의 일생은 무탈한 인간의 삶의 원형일지도 모른다. 하여 그는 스스로 가난하지만 자족한 일생이었다고 자위했을지도 모른다. 처남이나 Y의 일생이 그래서 무난한 사람의 한 평생이었거니 생각하며 그들의 진솔한 삶에 공감한다. 대법원판결이 남아있긴 하지만 박근혜는 24년간 감옥생활을 해야 하고, 또 다른 여죄로 재판중이라 형기가 단축되진 않을 터다. 박근혜보다 죄질이 더 무겁다는 이명박이기에 그도 20여년이상 감옥생활을 해야 할 것이다

 

 

 

 

이명박근혜의 일생이 성공한 삶이라고 추앙할 사람은 그들 덕에 호화호식한 해바라기정상배 몇 명뿐일 것이다. 지구상의 대다수 사람들은 이명박근혜를 경멸하고 혀를 차며 능욕할 것이다. 아니 자격미달 꼴통을 대통령으로 뽑은 우리들 대한민국의 수치다. 하여 처남이나 Y의 일생이 이명박근혜보다 더 훌륭한 이유다. 벚꽃 흩날리는 꽃비속을 거닐며 가난하고 올곧은 나의 친지며 친구인 Y와 처남의 명복을 빌었다.

2018.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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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eppuppy(깡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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