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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내장금선계곡. 서울 첫 눈

내장산금선계곡의 만추 & 서울첫눈

 

내장사입구 단풍터널

 

영광선친산소에 성묘를 하고 불갑사의 만추에 흠뻑 젖어 해질녁에 정읍누나댁에 찾아들었다. 달포 전에 깁스를 한 채 심난했던 마음 추스르려 방문해, 하룻밤 얘기꽃을 피운 내 어머님 같은 누님이시다. 아내는 영광시장서 토종닭 한 마릴 구해 닭죽을 쑤어 특별한 저녁식단을 만들었다. 별 반찬도 필요 없는 간편영양죽은 누님이 좋아하시는 별식이다. 

 

 

원불교화해재우지 뒤편에 누님댁이 있다

 

달포 전, 누나가 구매해 놓은 고추를 고추가루로 빻아놓곤, 내가 왼팔깁스를 한 참이라 열차여행을 하고 있어 그 고추가루와 참기름을 갖고 상경할 수 없었다. 그래 오늘 누님댁을 방문한 건 그것들을 챙겨 갈 속사정도 있어서였다.  승용차를 갖고 온 나를 보고 누님은 덩실덩실 춤이라도 출 냥으로 기뻐하셨다.  

 

 

혹여 왼손장애가 될까봐 적잖이 속앓이 하셨던 모양이었다. 누님은 내 손목과 팔을 몇 번이나 훔치며 '괜찮냐?'라고 되묻곤 하셨다. 괜한 걱정 끼처드려 송구스러웠다. 내친 김에 나는 누님을 위로하려 넌센스 한 토막을 실토하며 웃겨드렸다. 귀국시 베이징공항에서 중국공안원과의 헤프닝얘기를 살짝 양념발라서다. 

 

 

퍼스트클래스탑승권이라 모든 출국수속을 우선적으로 처리했는데 검색대통과시 전자봉에서 경고음이 계속 울리고 있었다. 소지품을 다 꺼냈어도 경고음이 지속 되자 공안원과 나는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언어불통은 더욱 곤혹스러웠고, 내 몸 어디에 뭔가를 숨겼다는 눈치 같아 여간 낭패였다.

 

 

그 순간 번개처럼 스치는 한 생각! 내 팔목 골절수술시에 금속지지대를 사용, 봉합된 쇠붙이가 탐지봉을 울리고 있다는 사실이였다. 공안원은 내 팔목의 수술부위를 살피며 목례했다. 여간 미안했다. 내가 영민했다면 헤프닝은 없었을 테고, 줄서 기다리는 손님들의 시간낭비도 없었을 거 아닌가?  결코 기쁜 일 일순 없지만 우린 웃으며 얘기꽃을 피었다

 

 

1년 후면 손목 속의 쇠붙이도 재거한다. 6주간의 깁스로 굳어진 손목관절을 유연하게 쓸수 있도록 재활운동을 해야 함인데 어영부영하고 있다. 잠 안오는 밤에 침대속에서 손목굽혀펴길 하느라 용을 쓰다 아내에게 핀잔 받기 헬 수 없었다. 재활은 순전히 내 의지의 결과인데 한심스럽다고 누님한테 아낸 내 흉을 고자질 한다.    

 

 

 

내 어머니이기도 하고, 아내에겐 시가 같기도 한 누님댁에서 하룻밤을 새고 농산물 이것저것을 챙겨 내장사를 향했다. 거동이 불편하신 누님은 단풍구경을 사양하셨다. 파시로 치닫고 있는 내장사단풍축제였지만 아직도 탐방객들로 경내는 북세통이다시피 했다.

 

부도밭은 아직 단풍휘장을 두르고~!

 

융단처럼 깔린 단풍을 밟으며 나목에 걸린 파란하늘호수가로 빠져들었다. 호수에 빨간홍시가 둥둥 떠다닌다. 이맘때의 내장산 감나무풍정은 풍요의 콧노래까지 흥얼대게 한다. 단감을 좋아하는 아내가 '이따 가면서 감 사갖고 가자'고 불쑥 제안했다.

 

 

금선계곡쪽엔 단풍이 한 살일까? 계곡이 깊고 안온해 기대해도 될 성싶었다. 내장사우측을 파고든 골짝엔 아니나다를까 단풍이 흐드러지고 탐방객들은 휴대폰에 담느라 부산 떤다. 해도 어제 불갑산단풍 정취는 어림없다. 더욱히 골짝을 파고들수록 알몸의 나목들이 앙상하게 버티고 있다.

  

 

 

이파리 하나 없는 굴거리나무가 어지럽게 골짜기를 차지한 채다. 여기가 놈들의 식생북방한계선이란다. 저렇게 떼지어 모였다 지구온난화에 얹혀 북진하려나? 아내는 단풍 없는 골짝이 볼짝 없다고 되돌아서잔다. 근디 사실 나는 용굴과 금선폭포, 신선문을 훑고 싶어 이 골짝을 찾았다.

 

굴거리나무 군락지

 

골짝도, 나무도 말라깽이 된 을씨년한 골짝을 걷는 아내는 시무룩해 졌다. 어쩜 시끈둥해지긴 내장사에 들때부터 였다. 파시된 내장단풍은 소문난잔치 끝이나 매 한가지여서다. 용굴 오르는 돌계단도 삭막하다. 하늘도 회색빛으로 얼굴 바꿨다. 게다가 골응달이라 스산하기도 했다.

 

 

 

완만한 계곡을 1.5km쯤 트레킹하면 오른쪽으로 다릴 건너 가파른 철재계단이 산중턱으로 사라진다. 우측의 까치봉 오르는 된비알산길과 갈라선 철계단 위에 용굴이 있다. 볼품 없는 굴이 유명세를 탄 건 조선왕조실록과 태조의 영정을 살려낸 역사적인 보고여서다.

 

 

그 주인공은 이름 없는 두 분 유생이라 더 더욱 감동의 산실인 곳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기전참봉 오희길은 태조의 영정과 전주사고(全州史庫)에 보관되어 있던 조선왕조실록 땜에 노심초사한다.  그는 정읍에 살던 안의, 손홍록과 상의해 태조어전과 실록을 보자기에 싸서 내장산용굴암으로 이안(移安)시킨다.

 

용굴(길이 8m 높이 2~2.5m)

 

오희길과 벼슬아치도 아닌 안의와 손홍록은 실록과 이태조의 어전을 옮겨느라 밤새워 내장산용굴까지 이안작업을 했던 거다. 더는 안의와 손홍록은 혼자 아님 둘이 숙직하며 1년여를(1592.6..22~1593.7.9) 하루도 빼지않고 굴속에서 지켰던 거다. 사비를 써가며 고난의 일기를 썼기에 귀중한 역사기록이 오늘날 존재함이라.  

 

 

그들은 용굴로 옮겨놓은 실록을 3개월 동안 지키다 안심이 안 되  다시 더욱 험준하고 깊은 비래암(飛來庵)으로 옮겼다고 전해진다. 피난가기도 바쁜 전란속에 누구도 신경 안 썼던 조선왕조실록을 구해 낸 그들의 애국충정을 우린 넘 가벼히 생각하는 건 아닐까?

 

 

두 분의 충정이 없었담 오늘날 우리가 조선왕조의 역사를 어떻게 알 수가 있을까? 임진왜란으로 불타버린 통한만 씹고 있을 터이다.

경복궁내 춘추관, 성주, 전주, 충주 4곳에 보관 된 사고가 임진왜란으로 불타버렸으나, 전주사고에 보관됐던 조선왕조실록 8백여 권만 용굴로 옮겨져 지켜질 수 있었기에 말이

 

신선문

 

그들은 조선왕조500년 사직을 지킨 애국지사다. 참역사는 아웃사이더들이 뒤안길에서 묵묵히 자신의 역활보다 더 힘들게 살아 낸 진정한 얘기다.

신선봉오르는 신선문에서 우린 발길을 돌렸다. 옛날 여신이 승천하면서 바윌 뚫고 신선봉으로 올랐다는 전설의 바위문이란다.

 

 

작년6월 초여름의 신록속에 동구리들머리에서 시작한 장군봉,신선봉,까치봉산행 때 하산길인데도 애써 외면 했었다. 이유는 가뭄으로 골짝이 매말라 금선폭포를 비롯한 용굴, 신선문 등의 절경은 강수량이 많을 때 감상하려 아껴두고 싶었던거였다. 근디 오늘도 작년 그날이나 진배 없어 아쉽다.

 

 

4박5일 바쁘게 쏘아다닌 남녁 고향산천의 만추는 나 보단 아내가 훨씬 감격해했다. 힘겨운 산행은 엄두도 않는 탓에 유명산행을 저어한 탓이기도 했다.

우리가 귀경한 담날엔 서설이 내렸다. 서울의 첫눈 치곤 제법 나풀대는 게 또 다른 세상에 여행 온 기분이 들었다. 그 곱던 단풍들도 하얀 면사폴 쏘고 하얀설국으로의 여행길에 들랑가?              2017. 11.

내장사용마루 뒤로 서래봉과 불출봉이

 

아파트에서 조망한 2017.11 서울 첫서설

 

 이조실록의 부활

 

1439년세종21년에 사헌부는 실록을 증찬할 것을 상소하고, 세종은 가납하여 4부를 더 만들어 춘추관,충주,전주,성주사고에 안치했다. 1592.4월에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6월엔 성주사고실록을 왜놈들이 강탈해갔단 소식을 전주경기전 참봉,오희길도 접한다.  
그는 고민하다 태인의 선비 안의, 손홍록과 상의하여 태조의 어전과 실록을 내장산으로 옮기기로 의견을 모았다.

1592.6.22일 그들은 유인,김홍무,한춘등을 섭외 실록을 궤짝에서 꺼내 보자기에 싸서 移安작업에 들었다. 이안물 중엔 祭噐와 高麗史도 포함됐다. 
내장산 깊을골짝 용굴암에 이안시킨 실록은 더 깊숙한 은적암과 비래암으로 이안시키면서 안의와 손홍록은 하루도 걸르지않고 숙직에 들었다. 장장 380일의 숙직을 그들은 일기장에 기록한다.

누구로부터도 도움 없이 사재를 털어가며 사고를 지킨 일기는 "在龍

窟庵因留始直(용굴암에서 지키기 시작했다" (1592.6.22~1593.7.9)라고 시작된다.

임진란이 발발하자 조정의 사관들 4명(조존세,김선여,임취정,박정현)은 모든 사초를 불태우고 선조임금 옆에서 도망쳤는데 촌부 안의와 손홍록은 사초를 지키느라 생사를 넘나들었던 거였다.

4명의 사관들이 불태운 사초 탓에 선조실록(1567년 선조즉위부터 1592.3월까지)은 이조실록중에 가장 엉성하고 불분명하다.  

안의와 손홍록의 애국충정은 잊혀젔다가 170여년이 흐른 후에 후손인 안처명과 손태익이 선대의 비망기(임계기사와 수직상체일기)를 김원행에 알리고, 김원행이 그의 <미호집>에 이를 소상히 기록하여 조정에 상신하여 전주사고의 실록과 경기전어전이 부활한 천신만고의 역정이 빛을 보게 됨이다.

그렇게 화를 면한 유일본인 전주사고실록은 1606년 4부를 증간하여 서울춘추관, 강화마이산, 영월태백산, 평안묘향산, 강원오대산에 보관시켜 오늘에 이름이다.

안의와 손홍록, 두 분의 애국심이 없었다면 이조실록은 물론 고려사까지 잊혀질 뻔했다. 모골이 송연할 비극이라.

임난이 발발하자 시록을 불태우고 도망친 4명의 사관은 조정의 고위직이었다. 고위공직이 썩어빠져 국기가 문란하고 백성들이 곤궁한 경우는 지금도 진행되고 있으니 오호 통제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