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캔들로 요절한 어우동
(왕에서 땜쟁이 잡배까지)
부여태생 어우동은 조실부(早失父)하여 재가한 어미따라 한양서 자랐는데 자색이 남정네들의 눈길을 훔칠만 했었다. 하여 일찍이 밤거리에서 얼굴모르는 사내의 거시기 침입도 감수해야 했다.
방년 18세가 되자 태종의 손자인 희대의 바람둥이 영천군(永川君)의 유복자 - 외아들 이동(李仝))에게 시집간다(1475년).
당시의 왕가(王家)는 왕손융성이란 명목으로 바람피우기가 극성을 떨치는 땐데다 부친의 DNA까지 물려받은 남편은 신혼도 아랑곳없이 여색을 탐하고 다녔겠다.
어느 날 따분했던 어우동이 노리개를 다듬는 은장(銀匠)이를 불렀는데 이목이 준수한지라 다시 불러들여 보듬고 뒹굴어 버렸다.
하긴 앞서도 밤중에 북문을 나서 걷다가 건장한 사내한테 거시기 당했는데 분노나 수치심보다도 더 짜릿한 느낌이 온 몸뚱일 떠나질 않는지라 남녀간의 사랑이란 게 허울보다는 서로가 몰입할 때란 걸 체감케 됐었다.
그 후 그녀는 포도청졸병 구전(具詮)과 바람피우다 들켜 시댁에서 쫓겨나게 됐는데 그녀의 나이 23세요 결혼 5년차였다.
쫓겨난 어우동은 몸종(은설)의 권유로 기방(妓房)을 냈다. 마침 집안에 배나무가 많아 이원(梨圓)이라 칭하고 자신을 수화(羞花=꽃들이 시샘할 정도로 예쁜 여인)라 부르게 하니 장안에서 ‘수화이원’이라고 입소문이 나서 한량들의 발걸음이 문전성시를 이뤘다.
왕(성종?)에서 종친들, 궁내 벼슬아치부터 시정 한량들까지 그녀을 탐하는 발길이 요란 했는데 하루는 전의감의 의원이 ‘수화이원’이란 글자를 자기의 팔뚝에 써달라고 하여 일필휘지하자 사내가 바늘로 글자를 콕콕찍어 문신을 만들어 뽐내고 다녔다.
하여 사내들이 어우동을 찾아 사랑을 애걸하고 거시기놀이 하며 자기의 몸-가슴, 등, 장딴지, 허벅지, 엉덩이 할 것 없이 이곳저곳에 ‘수화이원’이란 문신을 새기자 곧 장안의 화제가 됐다.
비록 쫓겨나긴 했지만 종실의 외명부 품계 정4품인 혜인(惠人)에 봉직 됐던 그녀가 양반가의 체통에 구정물을 뿌렸다고 조정에선 그녀를 잡아들여 문초를 했겠다.
‘똥 묻은 개가 재 묻은 개를 나무라한다’고 주눅 들어 고개 숙일 줄 알았던 조정에선 그녀의 입에서 왕가 종친은 물론 시정의 한량까지의 이름이 거침없이 실토되는지라 성종임금은 곧장 어우동을 사형시키라 명한다.
숭유(崇儒)사상을 국시라 섬기던 왕실에서 궁중 종실사내들의 무분별한 바람피우기와 문란한 성생활(근친상간도 더러 했었다)이 까발려지게 될까 전전긍긍한데다 성종은 혹여 자기의 이름이라도 발설하면 용안에 똥칠을 하는 격이니 입을 틀어막아야 했을 테다. 영원하게-.
그녀의 나이 28세 때인 1480년(성종11년)이였다.
자유분망한 섹스의 향연을 펼치기 5년차였다.
2011. 06
#. 어우동(於于同)의 어우는 ‘어우르다’나 ‘얼다’의 우리말에서 온 말이고 ‘동’은 이동(李仝)의 ‘仝’이 ‘同’과 같은 자이니 ‘이동과 어우러진, 결혼한 한 몸뚱인’뜻으로 해석됨인데 왜 굳이 한자어를 씀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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