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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 그 여적

팜므파탈 정난정(鄭蘭貞)을 생각하며

 

팜므파탈-정난정(鄭蘭貞)

 

 -'여인천하'에서 난정과 원형-

庶女絶世恨·소실의 딸로 태어난 것이 절세의 한이 되어

汝意斷肝腸·간장이 끊어지는 듯 서러워라

名婦是貞敬·명가의 며느리는 정경부인이라

放笑嘲婚客·혼담 가져온 사람을 크게 웃어 조롱하네.

난정이 혼기가 꽉 찬 처녀일 때 매파로부터 천출(賤出)이라 정실자리혼사는 꿈 깨라고 하자 읊은 한탄조 시다난정(蘭貞 ?1565)은 초계(草溪) 정윤겸(부총관)의 첩실(관비출신) 딸로 태어났다거나, 홍길동전의 허균의 스승인 손곡이달(李達)과 정윤겸의 첩이 눈 맞아 출생했다고 전할만큼 태생이 불분명하다. 암튼 누가 친부(親夫)인들 당대 명석한 명망가들이니 아빌 닮아 여간 영리했을 테다.

당시엔 양반가의 양산을 막으려 양반집 딸이라도 정실이 아닌 첩실로 시집가거나 재취로 들어가면 그 소생은 마땅히 천출로 분류 차별한다는 종모법(從母法)이 시행 돼 신분상승을 할 수가 없었다. (이 악법이 폐지된 건 1894년 갑오개혁 때다.)

난정은 머릴 싸매고 고민한다. 길은 딱 하나? 당대의 세도가 윤원형(尹元衡)의 바지춤을 파고들어 그의 맘을 붙잡는 거였다. 하여 그녀는 원형이 잘 다니는 술집을 알아내어 기생으로 들어가는 거였다. 드뎌 원형이 그 술집에 나타났다가 한 눈에 난정에게 홀려 반해버렸다.

이름이 난정이라. 내가 누군 줄 아느냐?”

, 소녀 대감 뵙기를 오매불망 하였사옵니다.”

그래, 기특한지고. 네 내 후사를 안겨주면 니 소원을 다 들어줄 수 있겠다만~”

진심이옵니까?”

 

-'여인천하'에서의 문정왕후-

그렇게 눈과 입이 맞은 두 남녀는 바지를 내리고 치마끈을 풀며 단박에 불꽃을 튀겼다. 난정이 원형의 가슴팍을 파며 교태를 부리면서 소실로의 다짐을 받아냈다. 그렇게 희대의 두 모사꾼들은 의기투합해 합궁에 들었다.

첩실이 된 난정은 천부적인 교언영색을 십분 발휘하여 윤원형의 누이인 문정왕후에 접근, 영악한 간교함으로 사랑과 신임을 얻어 대궐을  무시로 들락거렸다.

난정은 또 문정왕후가 불교에 심취한 걸 알고 은사였던 승려 보우를 봉은사에서 소개해 불교 융성과 도첩제도(度牒制度)도 실시케 했다. 성리학이 국시였던 유교국가에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반란이기도 한 거였다.

그리고 윤원형의 사주를 받아 인종(장경왕후의 아들)의 척족인 윤임이 그의 조카(중종의 8)에게 왕위를 계승케 하려 획책한다고 무고하기에 이른다. 병약한 인종이 8개월 만에 죽고 11세의 이복동생이 명종으로 즉위하자 수렴청정하던 대비문정왕후는 노발대발 인종의 외척인 대윤(윤임일파)과 명종의 외척 소윤(윤원형과 윤원로)간에 반목 피 터지는 싸움을 조장했다.

대윤파들이 사사되고 소윤일파가 정권을 잡아 득세케 한 '을사사화'5, 6년간 100여명의 대윤파와 사림들이 숙청당하는 참극 이였던 것이다이무렵 문정왕후의 폐위를 기도하다 발각돼 사사당한 불구대천의 정적 김안로(14811537)의 당질녀가 윤원형의 적처(嫡妻) 연안 김씨였다.

 

-정난정-

그래서 정실김씨는 남편과 문정왕후와 난정의 눈엣가시가 됐다. 윤원형이 영의정이 되고 난정은 그의 아들을 낳자(4남2여를 낳았다) 연안김씨가 먹는 감주에 비상을 타 독살하도록 김씨 몸종 구슬이를 사주한다. 그렇게 해서 난정은 1551년 적처가 되고 2년 후엔 종1품 정경부인이란 직첩(嬂帖)을 받아냈다.

문정왕후의 절대적인 신임에 영의정의 정경부인자릴 꿰찬 데다 왕의 외숙모이기도 한 난정에겐 천하에 무섭고 두려운 게 없었다. 대궐 안을 무상출입하며 권세와 부를 축적하고 내명부 질서를 뿌리째 어지럽혔다.

반면에 인재의 우월은 타고난 기질과 순수함에서 기인하지 출생의 귀천과는 무관하다. 서얼들에게도 과거시험을 보게 하라.”고 패습을 혁파하는 서얼패지의 서얼허통법(庶孼許通法)을 실시하게도 했다.

 

 

허나 난정은 백성들이 굶주리는데도 한강 두모포에서 쌀밥을 지어 물고기에게 퍼주는 놀이를 한 해에 서너 차례나 하여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윤원형이 죽기 얼마 전 한강에서 나룻배만한 하얀물고기(白魚)) 두 마리가 죽어 올라온지라 놀란 어부가 이를 잡아 배에 싣고 가서 조정에 신고하였다.

이를 본 성균관유생들이 조롱대기를 저러게 큰 물건이 상공(相公;윤원형)의 밥을 기대하며 바다에서 올라왔다가 어부에게 잡혔으니 가엽다라고 쑥덕댔다.

그런가하면 궁 안은 스캔들로 입 방아질 바빴다. 정경부인 난정이 등에 종기(腫氣)가 나서 의원 송윤덕(宋潤德)이 침을 놓고 째며 치료했다. 때론 세침(細針)으로 치료하며 종기 난 곳을 빨아주며 난정의 마음을 사려 애를 썼고 난정은 윤덕을 아들처럼 사랑했다.

이를 훔쳐 본 궁녀들의 입방아스캔들은 윤원형만 모른 거였다. 조정이 이렇게 어지러우니 명종12년엔 양주에서 임꺽정이란 의적(?)이 나타나 5년간이나 활거를 했었다.

 

 

명종 20(1565) 문정왕후가 65세로 죽자 이튿날 사헌부·사간원·홍문관에서 윤원형과 정난정을 당장 사사하라는 상소가 빗발쳤다. 명종은 외삼촌 부부를 고향에서 반성하며 살라는 방귀전리(放歸田里) 처분을 내렸다.

영의정에서 삭탈관직 된 윤원형과 천인 신분으로 격하된 난정은 경기도 파주시 교하읍으로 갔으나 문중을 치욕에 빠뜨린 인간 망종이라며 냉대하자 둘은 황해도 강음(江陰)에 숨어들어 구차한 목숨을 연명했다.

그러나 이때 연안 김씨의 계모 강씨의 고발로 적처 살인 사건이 들통 나자 난정은 죽음이 임박했음을 직감했다. 마주 앉은 난정을 바라보며 여차하면 우리 같이 자결하자.' 고 윤원형도 탄식했다.

어느 날 금부도사가 평안도 진장(鎭將)을 잡아 금교역(金郊驛)에서 말을 바꿔 타고 있었는데 원형의 집종이 이를 보고 달려와 지금 금부도사가 저기 오고 있다.”고 아뢴다.

 

-윤원형과 난정의 묘-

난정은 자신을 잡으러 오는 줄 알고 품에 지니고 있던 비상을 얼른 물에 타 마셔 죽는다. 끌려가 장살(杖殺)당하긴 싫었던 것이다. 화무십일홍을 통감하던 윤원형도 열흘 뒤 술에 독약을 타 자결했다. 보우는 제주도로 귀양 가서 장형으로 맞아 죽었다.

난정의 둘째오빠 정담(鄭淡)은 난정이 언젠간 화근이 될 걸 예상하고 왕래를 끊었다. 고향집에 그녀가 찾아올까봐 집 입구 돌담길을 사람 혼자 겨우 다닐 만큼만 좁게 만들었다. 꾸불꾸불한 길을 가마만 탄다는 난정이 못 들어오게 하려고-. 그런 예지와 청결심이 나중에 화를 면하게 했던 것이다.

일개 천출녀가 정경부인이 되어 을사사화의 빌미를 만들고 조정을 쥐락펴락한 권세를 휘둘러 한 가정의, 나아가 나라의 팜므파탈 노릇을 한 셈이다.

어쩌면 신분상승을 꿈꿨을 뿐인 난정을 팜므파탈로 만든 건 윤원형이란 척신의 권력욕일 것이다.

 

-난정의 묘-

자제할 줄 모르는 권력욕으로 권모술수에 혈안인 위정자들은 지금도 세간에서 백어(白魚)사육꾼이란 욕을 먹고 있다. 아니다, 권부의 썩은 종기를 핥으며 자신도 곪아가는 파국의 스캔들을 그들만 모르고 있는 성싶기도 하다.

원형과 난정의 묘는 윤씨들 묘역에서 떨어진 경기도 파주시 당하동 산4-20에 있다. 정난정 보다는 오빠 정담을 닮아야 함이라.

2015. 07

 

  -홍명회의 소설'임꺽정'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