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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 길 - 산행기

용추봉가마골의 아픔

용추봉가마골의 아픔

 

가뭄 타는 용소폭포

정읍에서 29번국도를 타고 남하하다가 담양군 용면에서 792번 지방도로를 타면 용추봉 기슭의 가마골로 들어선다. 용연폭포주차장 삼거리에서 용연폭포쪽을 향하면 짙은 녹음 속에 실바람 탄 물의 노래가 들려온다. 메저소프라노보다 더 여려 좋다.

골짝에 파묻힐수록 칠 년여를 내공쌓은 매미와 이름 모를 새들도 간드러진 절창으로 하모니 한다. 그것도 잠시 파열음에 묻혀버렸. 용연1폭포의 물 폭탄소리다. 비취소의 물바람이 바윌 타고 푸나무이파릴 흔들어댄다. 작은 오케스트라의 실내악에 멈칫거리다가 박수대신 카메라섬광을 터트렸다.

 

용연1폭포

자연은 항상 매 순간에도 혼신을 다 한다. 그 순수한 무궁에 닮아보려 우린 산을 찾는지도 모른다. 폭포의 광기에 눈길 빼앗기고 소(沼)의 반란에 귀 쫑긋대다 숲길에 들어섰을 땐 모두가 떠난 여백이 침묵으로 푸나무 사일 흐르고 있었다.

이젠 숲이 고요한 바다를 이룬다. 울퉁불퉁 튀어나온 나무뿌리와 돌멩이들이 적당한 오르막길을 딱 걷기 좋게 만들었다. 혼자 걷기 안성맞춤 호젓함이다. 난 대게 이런 호젓한 숲길을 혼자 걸으며 풀벌레와 새소리에 귀를 열고 이파리를 흔드는 바람을 보며 부서진 햇살이 계곡에 흩날리는 정취에 홀린다.

 

 

그렇다보면 마음은 지긋한 골짝의 숙연함에 끝없이 빠져드는 그지없음을 즐기기도 한다. 그러다가 홀연 홀로인 나를 의식하곤 누군가 옆에 있었음 좋겠단 생각이 드는 거였다. 어쩜 길동무가 한 둘 있어도 좋으련만 하는~!

꼴찌인 내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두 여산님과 숲의 바다를 헤엄친다. (한참 나중에 안 씨지만) ‘-이란 분과 그녀의 친구였다. 친구 한 분이 다리수술예후에 신경쓰느라 뒤쳐진 모양새였다. 꼴찌인 내가 있으니 느긋하게 산을 즐기라고 난 몇 번이나 인심 후하게(?) `서비스했다.

일월비비추

내가 오늘 기대를 갖고 유심해야 할 폭포와 영산강발원지인 용소와 가마골의 사령관동굴 이왼 그래 높지 않은 산길을 쉬엄쉬엄 걸으며 숲의 바다를 유영해보겠다는 여유로움 이였으니 말이다.

난생 처음 가마굴속에 들어가 밖의 빛의 현란함에 새삼 신기해하고, 겨드랑일 간질거리는 산죽마을을 통과하며 그들의 수군대는 칭얼거림이 정겹단 생각이 드는 거였다.

 

가마굴 속에서 본 입구

진홍의 일월비비추가 요염하게 웃고 줌나리가 막 꽃 터뜨리려는 숲길에 취하다가 밋밋한 헬기장인 용추봉을 밟았다. 간간히 이-일행과 얘길 하다 신선봉에서 점심을 들 때야 탑마루님들과 합류했다.

꼭 집어낼만한 높은 산도 없는 올망졸망한 산들이 어깨춤을 추며 사윌 돌고 있다. 그 검초록산릉이 켜켜이 파도를 일구며 하늘 금을 그었다. 그 안골에 촌락 한 자락도 보이질 않는다.

 

 

빨치산들이 숲바다를 헤엄치고 산릉파도를 타며 지들만의 유토피아를 꿈꾸기 좋을 만한 산세란 생각이 들었다. 용소폭폴 향하는 하산길이 여간 된비알이라. 시원정에 올랐다.

밑의 용소는 가물어도 옥빛이다. 폭포수도 기개를 접지 않고 넓은 소는 사뭇 명경이라. 영산강 발원지란데 시원은 폭포 위로 가마골을 한참 거슬러야 할 것이다.

 

 

그 용소를 출렁다리-하늘다리에서 봐야할 까닭을 아무리 헤아리려도 얼른 수긍이 가질 안했다. 폭포는 숨어버리고 용소는 골짝의 둠벙일 뿐 이였다.

거금(세금)을 쏟아 부어 출렁다릴 만들어야만 했을까? 하는 의구심을 떨칠 수가 없었다. 다릴 입안 추진한 담양군수도 나중에 민망해 했을 것이다. 그가 자연을 알아가고, 세금이 주민 호주머닐 턴 돈이란 걸 알고 말이다.

 

출렁다리

더구나 사령관굴을 가기위해 출렁다리건너고 앞의 가파른 산에 긴 철`계단까지를 만든 건 무모한 자연훼손 이였다. 사령관굴은 용소폭포 뒤 골짝을 통하는 길이 훨씬 빨치산루트다워 실감났다.

관광이라는 이름을 빌어 세금 퍼 쓰는 지자체의 폭거는 이젠 그만 했음 싶은 거였다. 좀 후에 통감했지만 흔적도 없는 사령관동굴이나 잘 유지 보전할 일이렸다.

 

용소폭포

암튼 난 이-과 출렁다릴 건너서 곤두박질 칠 것 같은 철`계단을 땀 뻘뻘 쏟으며 800m길을 올랐다. ()태의 소설 <남부군>의 모태가 된 사령관굴과 산세를 보기 위해서였다.

세수하듯 땀 훔쳐내며, 잔뜩 기대 부풀어 맞닥뜨린 사령관동굴은 어이없게도 허탈 이였다. 수직바위 벼랑 앞에 안내판이 있긴 한데 거기가 동굴 이였단 확인도 아니었다.

 

사령관동굴 옆의 빗방울폭포

그 바위벼랑에서 10m 우측단애는 흩뿌리는 빗방울 폭포다. 그 폭포수는 단애병풍이 요새마냥 휘두른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과 나는 빗방울폭포를 빈병에 받아 허탈감을 달래느라, 목을 축이느라, 유격대원의 그 달디 단 물맛을 느껴보느라 시꺼먼 수직단애에 바짝 붙어 물 폭탄세례를 맞는 거였다.

이태도 이 폭포수에 해갈하며 오늘같은 날엔 등목 아님 깨 홀랑 벗고 어린애마냥 즐거워했을 테다.  빨치산들의 생명수라 생각하니 여느폭포완 다른 거였다.

 

단애와 활엽수 사이로 얼굴 내민 하늘

끝이 안 보이는 단애와 원시림 같은 키 큰 활엽수들이 하늘 한 조각을 잘라와 굴절된 햇빛을 프리즘 시키고 있었다. 높고 음습한 골짝 끝 병풍단애에 동굴과 폭포가 있었기에 빨치산들은 아지트를 만들고, 지리산노령지구 사령관 김병억은 동굴에 은거하며 5년여를 버텼을 테다.

가마골은 천혜의 요새였던 것이다.

 

가마골짝은 6.25 격전지 중에서도 가장 치열하고 처참했던 곳이다. 1950년 가을, 미군이 군산오식도에 상륙하자 유격대는 순창으로, 여문산(774m)의 가마골(금산골)로 쫓겨 들어가 조선노동당 전북도당유격사령부로 편성 돼 빨치산활동을 한다.

이때 지리산사령관이 이현상이고 휘하 5개지구대 중의 장성노령지구대장이 김병억 이었다. 이태[李泰, 李愚兌, 1922.11.25.~1997.3.6]는 이무럽 빨치산대장 장성구와 전북도당위원장 방준표와 만월교, 말티재, 아미산, 벼루고개전투를 경험하며 가마골에서의 2년여의 빨치산경험을 <남부군>이란 소설로 썼던 것이다.

 

 

여기 가마골엔 3개 병단이 주둔하면서 밤엔 민가로 내려가 살인, 약탈, 방화를 일삼았다. 전투가 장기화됨에 따라 탄약 제조창과 군사학교, 인민학교, 정치보위학교 및 정미소까지 설치해 놓고 끈질긴 저항을 계속하였다.

19553월 육군 8사단, 11사단, 전남 도경 합동작전에 의해 1천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완전히 섬멸되었던 비극의 현대사가 켜켜이 묻어나는 현장인 곳이다. 내가 오늘 여길 찾은 소이라. 근데 사령관동굴 행방이 묘연하다.

 

 

인터넷상에서 폭포와 옆의 동굴사진을 분명히 봤는데 동굴이 없다. 부서진 바위가 수북이 쌓인 너덜지대를, 음침한 숲 사이를 훑어도, 우리처럼 찾는이들의 발길흔적이라도 있음직 한데 없는 거였다. 얼마나 서성대다 하산한다.

아쉬워 구시렁대는 나를 이-이 거들어준다. “올라가서 다시 한 번 찾아봐요나는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 고마움에 앞서 대견하단 생각이 앞선 까닭이다. 불과 서너 시간 전에 만나 통성명도 안한 사인데 깊은 골짝에서 주저 없이 나를 신뢰하고 있어서였다.

 

 

언제가 회문산에서도 남부군생각이 났었다는 이-이기에 사령관동굴탐방 길에 기꺼이 나섰음이다. 다리불편한 친구는 용소에서 쉬게 한 채.

우린 내려온 너덜지대를 다시 올라가 아까의 안내판 앞에 섰다. 어디에도 동굴흔적은 없다. 그녀를 쳐다본다. 미안해서였다. 근데 초롱초롱한 눈빛이다. 바위에 부서지는 폭포수가 빨치산의 트라우마를 주술(呪術) 하듯 적막을 깨물 뿐 이였다.

 

 

이태는 1922년 충북 제천에서 태어나 국학대학 국문과를 졸업한 후 1948년 서울신문사 기자가 됐다. 그의 대학시절은 우리나라가 좌우익 투쟁으로 혼란스러웠다. 우익청년단의 횡포와 경찰의 가혹한 탄압에 분격한 그가 좌파에 빠진 것은 순수해서였다.

 

▲사령관동굴사진은 'simpro길이야기'에서 펌.

(폭포우측에 있는데 푸나무가 우거져 못 찾음)

합동통신사 기자로 근무할 때 6·25가 발발, 서울을 점령한 북한은 합동통신을 평양의 합동통신사로 통합시켜 전주로 파견발령 시켰다.

이윽고 19509월 연합군 상륙으로 북괴가 철수하면서 그는 조선통신사 직원들과 지리산으로 들어가 조선노동당 전북도당 유격사령부 대원이 되었다. 28살의 그가 전투병이 아닌 남부군 활동기록을 맡는 종군기자가 된 것이다.

 

출렁다릴 건너 가파른 계단을 올라야 동굴엘 간다

병풍단애 맡에 천남성 두 그루가  솟았다. 넓디넓은 초록이파리는 무서울 만치 짙푸르다. 혈관의 수액이 독성인 것이 빨치산의 한 맺힌 응혈인 마냥 하필 거기서 발아됐다. 오늘 천남성 첫 발견도 아까 이-이였다.

가마골에 천남성이 자생한다는 것도 우연찮다. 숲 속 썩 은 거목뿌리가 동굴 같아 너덜지댈 오르다 허탈감만 안고 하산했다. 활엽수와 넝쿨식물이 골짝을 덮은 돌너덜길엔 구릿대가 하얀 고깔 꽃을 터뜨리기 전이고, 연보라초롱꽃이 서러워 고갤 숙였다.

 

용소폭포 상단

용소폭포우듬지에 섰다. 가마골의 깊이를 더 걷고 싶었지만 시간이 없다. 약속시간 오후3시가 얼마 남질 안했다. 사령관동굴 찾느라 이-과 한 시간 반동안 골짝을 누빈 셈이다.

그녀가 오늘 내내 동행해줘 뿌듯했다. 탑마루의 뒤풀이는 파장 이였다. 꼴찌인 나를 기다리는 탑마루님들이 테이블 하나를 치우지 않은 채였다.

 

영산강발원지 용소

맥주 한 잔을 들이켰다. -에게도 한 잔을 따랐다. 다리 아픈 친구도, 기다려준 산님들도 꼴찌(?) 덕에 한 잔 더~!

그나 우린 꼴찌가 아니다. 제 시간에 온 극히 모범생이다. 선두와 꼴찌, 좌와 우, 종북과 극우, 내편과 네 편을 구분 짓는 건 욕심쟁이들의 과대망상이거나 독종들의 이데올르기 노예일 거란 생각도 해봤다. 나를 오늘 이 자리에 있게 해 준 탑마루님들이 무지 고마웠다.

 

하늘다리=철렁다리

이태는 1963년에 민중당전국구의원이 됐었다. 순수빨치산은 남과 북에서 냉대 받은 잔혹한 시대의 이데올르기의 희생물이 됐다. 누가 누굴 단죄할 수 있었을까?

2015. 07. 18

 

용소 상류의 저수지

 

가마굴

줌다리

 

필자

 

 

시원정과 철렁다리

 

 

 

 

용소

 

 

 

 

 

위,아래 사진은 늘푸른님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