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謙齋)선생이 반한 내연산 12폭포엘 가다

 

 -외폭이 된 쌍생폭포-

"나 지금 포항에 있는 내연산에 와 있거든. 근데 산이 되게 좋다 .폭포가 12개나 있는데 다 예쁘고, 올라가는데 힘들지도 않아서 너도 좋아할 것 같고, 다음에 같이 한번 와 볼까 해서"

          <영화 '가을로'에서 김지수가 유지태에게 띄우는 메시지>

-관음폭포와 구름다리-

25,1,20번고속국도와 7번 국도를 4시간 반 동안 달려 내연사주차장에 닿은 건 10시 반이 넘어서였다. 실로 6(2009.9월 울릉도에 가다 잠깐 시간 있어 몇 개의 폭포 일별했었다) 만에 맞는 일주문을 에둘러 송림 사이를 가르는 임도를 타고 문수봉을 향한다.

비옥한 육산의 울창한 푸나무들은 싱그러운 숲 향을 내뿜으며 초하의 땡볕을 걸러낸다고는 하지만 흐르는 땀을 연신 훔쳐야만 했다.  한 시간여를 숲길을 해쳤다.

 

 

송운님들은 내연산(삼지봉711m)을 밟고 청하골의 폭폴 훑는다는 일정이지만 나는 문수봉에서 청하골짝으로 하산하여 삼지봉등정의 소요시간 한 시간여를 폭포구경에 뭉그적대기로 했다.

정오에 문수봉(622m)에 오르고 20여분 삼지봉을 향하다 갈림길에서 수리너미를 향했다. 가파른 하산길을 크게 지그재그 질을 몇 번 한다. 내내 그랬지만 빽빽한 숲에 우람하게 버텨 선 소나무의 위용이 나를 멈칫거리게 하고 커다란 상처의 흉터들이 시선을 붙들곤 했다.

 

 

일제의 태평양전쟁 때부터 송진을 채취한 흉터는 그 처참한 아픔을 극복하다 고사한 고목과 결코 벗어날 수 없을 트라우마를 엿보게 하는 거였다.

그렇게 100여년을 버텨온 그들과, 1m쯤 떨어졌던 어떤 놈은 뭐가 그리 좋아 연리지(連理枝)가 됐고, 애초 한 뿌리에서 쌍둥이로 태어난 놈이 다시 한 몸이 된 연리근`(連理根`) 앞에서 한참을 머뭇거리느라 하강 길이 단조롭질 안했다.

 

 -연리근에서 연리목으로-

반시간쯤 내려왔을 테다. 짙은 녹음 속에서 웅성대는 인기척이 끊기 질 않는다. 급살맞게 흐르는 물 폭탄에 숨어있어야 할 넓은 멍석바위 위에 피서객들이 한량놀일 하고 있다.

짙푸른 계곡은 민낯 들어낸 하얀 돌`바위들이 물결치듯 물 대신 흐르는 거였다. 가뭄 속의 물길은 넓은 골짝을 뱀처럼 기어가다 웅덩일 만들고 바위벼랑사일 타고 넘다 폭포의 명색을 잇고 있다. 은폭포였다.

 

-은폭포-

내가 오늘 내연산행을 고대했던 건 이곳 청하골짝의 폭포구경 이였다. 겸재정선(謙齋鄭敾)선생이 여기 폭포에 반해 내연삼용추도’ 2, ‘내연산폭포도’, ‘고사의송관란도등 폭포의 아름다움을 4점의 그림으로 남겼을 정도로 유명한 청하골이 아니던가!

나는 오늘 이곳 폭포 12군데를 모두 보고자 했었다. 근데 요동치는 물살과 우뇌소리 내는 폭포는 시늉뿐인 것 같고, 대신 폭포와 소()가 이뤄진 넓은 바위와 깊은 바위 골, 명경 속의 소의 바닥을 들여다보고 그 위를 걷는 거였다.

 

 

등산로 대신 하얀 돌`바위골짝을 걷고 물길과 바윌 건너뛰며 내()의 속살 들여다보기 맛에 빠져들었다.

피서객들의 수영장이 된 은폭포를 거슬러 엎드린 호랑이1.2폭포와 실폭포를 찾아 상류 내를 훑었지만 아쉬움으로 돌아섰다. 다시 은폭폴 건너 한참을 하류를 향하다 연산폭포 물줄기를 쏟아퍼붓는 학소대(鶴巢臺)에 올랐다.

 

 

신선이 타고 내려온 학이 머물었단 바위는 높이30m. 저 아래 내연폭포와 관음목포의 소가 보일 듯 말 듯 해 간담을 서늘케 한다. 좌측엔 신선이 내려왔던 기암절벽의 비하대(飛下臺)가 있다.

발밑엔 내연폭폴 잇는 구름다리와 관음폭포 소를 거니는 사람들이 장난감만 하다. 아찔하고 현기증이 나서 내려다볼 수가 없다. 학소대엔 산을 미치도록 좋아한 두 산님의 묘비명이 있다. 요절한 고혼이나마 학처럼 여기에 머물란 유족의 비원일 것이다. 학소대에서 내려왔다. 관음폭포 앞에 섰다.

 

 -학소대에서 내려다 본 관음폭포 앞 다리-

병풍처럼 치솟은 암벽에 두 갈래 물줄기가 쏟아지는 관음폭포는 주위에 굴 여러 개가 뚫려 있다. 수도승이 기도를 했다는 관음굴 아래라 폭포도 관음인가.

비하대 아래 관음굴에서 유래한 관음폭포는 쌍폭이다. 그 주변엔 관음대, 월영대, 선일대(仙逸臺), 신선대, 등 빼어난 기암절벽이 있다. 관음폭포 옆엔 감로당과 관음굴이 있고 위에는 구름다리가 놓여있어 연산폭포는 그 구름다리를 건너야 마주하게 된다. 애초에 구름다릴 놓는 걸로 시비가 많았었다. 자연경관 훼손하는 구조물이어서였다.

 

 -관음폭포와 구름다리-

나는 그 구름다릴 건넜다. 낙차가 가장 큰 연산폭포가 있어야 할 자리엔 실개천물길이 희멀건 바위가 눈물 흐르듯 햇빛에 부서지고 있었다. 목마른 폭포의 비실함이 안쓰러울 지경이였다.


전설을 가진 저 바위 학소대(鶴巢臺) 주위를 겸재선생은 얼마나 배회했을꼬?  그땐 구름다리가 없어 선생은 감히 내 서있는 자리까진 오지 못했을 테다.  겸재 정선이 58세 때인1733~34, 청하현감으로 재직할 때 그린 내연삼용추도(內延三龍湫圖)’는 연산, 관음, 잠룡폭포를 연이어 그린 거란다.

 

 -연산폭포-

선생은 앞서 금강산을 유람하고 진경산수화를 그렸는데 문예에 조예가 깊은 영조는 선생을 몹시 사랑했다. 하여 조선조 문예부흥의 절정을 이룬 영조는 선생을 부러 경관이 빼어난 이곳 청하현감으로 재임케 했던 것이다.

근데 내연삼용추도의 가운데폭포는 관음폭포라기 보단 쌍생폭포를 빼놨다. 하긴 선생의 그림이 실사화가 아닌 진경산수화니까~!

 

 -비하대-

어쩠거나 갈수로 폭포다운 폭폴 볼 수 없어 한이다. 구름다리 입구 암벽에는 많은 각자(刻字)가 보이는데 선생의 흔적('甲寅秋 鄭敾’이란 글자가 각인 됐단다)도 있다지만 보이질 안했다. 바위에는 이름 300개가 새겨져 있단다.

천 길 절애(絶崖)는 좌우로 거대한 병풍으로 휘둘렀고, 검붉은 단애의 초록푸나무는 폭포수에 너울춤을 추는, 우뇌소리 안의 적막에 겸재선생이 미쳐버릴 만한 풍광이란 생각이 들었다.

 

 

선생의 진경산수화가 더욱 명성을 얻게 된 건 불알친구며 시인 이였던 사천 이병연(槎川 李秉淵)이 그림에 시를 지어 시화(詩畵)를 나누게 됨이기도 했다.

시가 없으면 그림이 무색해지고, 그림이 아니면 시가 빛을 잃었으리라고 후세사람들에 회자됐을 정도로 서로 각별하고 보완적인 관계를 이루었다. 두 사람이 시화상간화(詩畵相看畵)를 하며 진경산수에서 나아가 이념산수로 문예지평을 넓혔던 것이다.

 

 

하여 겸재의 진경산수화를 많이 소장하고 있었던 사천은 지인이 중국으로 사신 내지 사행으로 갈 적에 그림을 갖고 가서 중국고서(古書)와 바꿔오게 했다. 사천의 서가에 중국의 명저(名)들이 가득했고, 사천은 그걸 겸재의 그림을 팔아 사 온 책들이라고 자랑했다.

자연 중국에선 겸재의 그림이 유명해질 수밖에 없었단다. 중국에서 고가로 거래되는 겸재의 그림을 사천이 많이 소장하였다는 사실의 증좌였다.

 

 -잠룡폭포-

무풍폭폴 찾아들었다. 계곡 깊숙한 곳 움푹 파인 바위사이에 있어 바람 탈 일 없단 무풍폭포와 수량이 제법 길게 바위 타고 쏟아지는 잠룡폭포는 소도 커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다.

이윽고 삼보, 보현. 쌍생폭포에 이르렀는데 쌍생폭포 한 쪽은 오줌줄기마냥 가늘었다. 두 폭포가 우람차야 사이의 범 머리가 돋보일 텐데 지금은 애처로우나 그냥 바위다. 그렇더라도 나는 제법 큰 소()가바위에 걸터앉아 배낭을 풀었다.

 

-삼보폭포-

소엔 비추는 걸 죄다 담아낸다. 검은 단애가 거꾸로 처박힌 채 초록나무들을 키우고 그 밑엔 파란 하늘이 구름 한 떼를 몰아간다. 그 구름 속을 피라미들이 미로 찾기 하는가싶다.

저만치서 폭폰 실바람을 일으켜 수면이 그 간질거림에 부르르 떨고 햇볕이 미끄러지며 은빛비늘 춤을 추는 거였다. 나도 그림에 쬠만 재능이 있담 겸재선생처럼 쌍생폭포소의 이 비경을 진경까진 아닐지라도 실사산수화는 그릴 수도 있을 텐데? 하고 한숨을 내 쉬었다.

 

 

겸재와 사천 두 선생의 시화상간화(詩畵相看畵)는 오늘날 우리들이 즐기는 시영상(詩詠像)의 효시일 테다. 인터넷상에 부유하는 영상시가 좀은 천박스러운 게 있긴 하지만 말이다.

자릴 털고 일어선 나는 애써 등산로를 피해 내를 따라 알몸의 돌과 바위와 물길을 건너뛰고 있었다. 가뭄 탓에 저 깊은 골짝이 맨살을 내밀고 나더러 맘껏 스킨십을 허락함이지 물길이 불면 어림 반 푼어치도 없음이라.

 

-쌍생폭포-

순전히 두 시간여를 그렇게 매 말라버린 내에서 목말라 헉헉대는 폭포의 길고 길 하루를 지켜보는 거였다. 오후 4시쯤 보경사 종각 옆으로 경내에 들어섰다.

천왕문과 적광전 사이의 오층석탑에 지금도 뚜렷한 자물쇠가 물려있고 적광전문설주를 받친 기이한 신방목을 유심히 들여다봤다, 신방목은 기둥 밑에 받치는 초석을 대신한 각목이란 데 세월에 닳아 사자의 모습은 찾기 어려워보였지만 독특한 양식인 것이다.

 

 

대웅전 뒤의 비사리구시도 눈에 띄었다. 사찰이나 국가의 큰 행사 때의 밥통으로 4000명분을 담았단다. 몇 백년이 흐른 지금도 갈라진 틈새없이 깔끔하다. 보경사가 대찰이었단 걸 말해준다.

천왕문, 적광전, 대웅전이 일직선상으로 배치되어 있고, 대웅전 뒤편의 팔상전,산신각,원신각,영산전,명부전이 '' 형태로 배치 돼 여느 가람과도 달았다. 영산전엔 이 사찰의 역대인물인 원진국사를 비롯하여 고승들 영안이 죄다 모셔있었다.

 

-비사리구니-

대웅전 옆의 명품소나무는 어떤 세월을 삭히느라 그리 울퉁불퉁 뒤틀렸음인가? 그 소나무의 시간을 어림하다가 송운님 두 분을 조우했다. 아침에 헤어진 송운님들 속에 오늘 유일한 만남이어선지 반가웠다.

그래 그 명품송 앞에 가둬두고 싶었다. 이윽고 해탈문을, 일주문을 나섰다. 4시 반에 떠난다고 다짐 줬던 송운회장이 반겨줬다. 그도 들머리동행에서 잠시 뿐 뒤풀이에서 조우함이다.

 

 

갈수 탓에 아쉬움 절절한 내연산 십이폭포를 땅거밀 피해 빠져나오자 옥천휴게소 밤하늘에선 빗발이 쏟아지는 거였다.

눈을 감았다. 참으로 먼 곳, 내연산청하골짝에서 폭포의 깊은 속내 민낯들을 보여 준 송운님들께 감사드린다.

2015.07.05

 

-보현폭포-

  -정오 이후 유일하게 조우한 송운님들- 

 

-학소대의 필자-

 

 

 

 

-송진 채취로 입은 상흔의 소나무가 좀 많았다-

-송진채취 트라우마로 고사한 소나무-

-연리지 소나무-

 

-무풍폭포-

 

 

 

 

 

 

 

 

 

 

 

-비하대에서 본 소와 폭포-

 

 

 

 

 

 

 

 

-귀목-

 

-대운전뒤서 본 일직선의 사찰-

-오층탑의 열쇠-

-신방목-

 

 

 

 

-내연산삼용추도-

Posted by peppuppy(깡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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