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닷없는 김장

오전10시쯤 세탁물을 거치대에 널고 있던 나는 율의 전화를 받는다.
“아빠 오늘 좀 일찍 출발할 수 있어요?”
“왜?”
“엄마가 오늘 김장을 하는데 아빠가 좀 빨리 출발해서 도와주면 싶어서요.”
“아니 갑자기 오늘 김장을 왜 한데?” 어제 오전에 아내와 전화통화에서도 김장얘기는 없었기에 난 당황했다.

지금 나는 오늘 오후2시 부산 발 서울행KTX편으로 귀가예정이어서 서두르고 있는 참인데, 출발시간을 2시간쯤 앞당길 수 없냐는 율의 전화는 뜬금없는 거였다. 더구나 율은 지금 열차푤 알아봤는데 12시발차가 있으니 환표하자는 거였다. 아닌 밤에 홍두께 격의 김장얘기가 어처구니없었으나, 안 될 이유도 없어 율의 짧은 해명을 들으면서 ‘그렇게 하자’고 맞장구를 쳤다. 사실 울`집의 김장얘기는 작년부터 아니, 보름 전 포항가족여행 때도 절임배추로 소량을 하겠다고 아내가 선언한 참이었다.

돌발 상황은 어제오후 아내가 롯데마트에 갔다가 배추세일(25일까지)을 목격하고 배추 값이 거의 반 가격이어서 즉흥적으로 24포기를 구입한데서 야기됐단다. 문제는 반값세일 구매까지는 수긍할 수가 있지만 아내는 어제 밤에 배추를 다듬고 씻어 간물에 절였다 간수를 빼내는 지난한 작업으로 밤샘했다는 점이었다. 작년 봄부터 무릎과 허리통증으로 거동이 불편해 2년차 통원치료 중인데 무모한 사고를 친 셈이다. 그동안 병원과 한방병원을 교차치료 하며 상태가 아주 호전된 상태에서 김장이란 중노동을 자초한 아내의 행위는 식구들을 불안하게 함이다.


이왕 구입한 배추는 내가 오늘 귀가한 후 차분히 김장하면 될 일이 아니던가? 앨이 김장도우미 하러 오고, 내가 2시간 앞당겨 귀가하는 소동(?)은 순전히 아내의 바지런함과 극성스런 책임의식 탓이다. 할 일을 놔두고 늦장 필 위인이 아닌 아내는 지금 양념을 만드느라 고군분투 중이란다. 주치의가 통원치료 중인 아내에게 매사에 절대 무리하면 안 된다고 당부했는데 무모한 아내의 일탈(?)은 식구들로부터 힐난 받아도 싸다. 내가 3시 반쯤 집에 들어섰을 땐 김장은 거의 마무리수순이었다. 나는 아내에게 힐책 한마디 쏘곤 김장 뒤처리에 바빴다.


4시에 퇴근하는 율이 도착하면 김장파티 하러 ***중국집으로 가야한다는 거였다. 지금 막 담근 햇김치로 집에서의 고기쌈 저녁식사가 번거롭다며 이미 예약을 한 상태였다. 아련하다. 아내친구들이 아침부터 모여들어 비벼댄 김장 후 빨간 양념버무린 김치로 만찬파티를 벌리던 정황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우리서민들의 왁자지껄 했던 김장풍습이 벌써 30여 년 전쯤의 옛추억인가! 겨울밑반찬 김장은 연말 가정의 필수행사요 여자들의 음식잔치로 고유한 전통이었다. 더불어 막 담은 김치 한두 포기를 친지와 나눠먹는 기쁨은 품앗이고 즐건 나눔의 축제였다.

그런 소박하고 흐뭇했던 김장문화는 핵가족의 세태변화와 다양한 먹거리 풍요에 따른 소비감축으로 가정에서 김장은 급격이 사라지고 있다. 게다가 지금 값싼 중국산김치가 시장을 지배하게 되어 우리네의 아름다운 김장문화의 운명이 위기의 시대에 진입했단다. K팝문화의 세계화의 추세에 K푸드의 김치까지 미국과 일본에 인기리 수출되는 호시절에 중국산김치가 파고들어 작년부턴 우리김치는 미국과 일본에서, 중국김치는 우리시장을 석권하는 기현상이 됐단다. 11월24일 관세청 수출입무역통계에 따르면 올해 김치 누적 수출입금액은 10월까지 1억 3467만 달러 적자란다.

수출 1억 3739만 달러(약 1950억원)에 수입액은 1억 5946만달러(약 2260억원)란다. 국산김치의 절반 값인 중국산이 일반음식점과 대중소비처에서 사용해서다. 이젠 알뜰한 가정의 김장문화는 옛이야기로 전설이 될 판이다. 울`집도 아내와 김장은 동일체여서 김치의 앞날이 뻔하다. 중국집에서 김장파티 아닌 김장피날레를 하면서 늙는다는 것과 사라진다는 서글픈 세태에 와인 한잔을 더 비웠다. 오늘밤 자고나야 알겠지만 내일 아침의 아내는 어떤 모습일까? 자기 할일에 대한 집착과 바지런 떠는 천성은 아내의 장점인데 늙어감 속의 지혜가 필수란 걸 식구들은 아내에게 집중포화 해댔다. 건배를 하면서~! 2025. 1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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