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운도 숲길트레킹
소설(小雪)이 인기척이라도 안하면 잊혀 질까싶었던지 웃녁은 초겨울 날씨란다. 창가에서 해운대백사장을 덮쳐 복사되는 햇빛을 즐기다 문득 몰운도의 울창한 숲길 생각이 났다. 몰운도의 만추풍경을 상상하다가 점심을 때우곤 집을 나섰다. 드넓은 다대포 모래사장과 갈대숲은 누렇게 화장한 채 한통속이 됐다. 푸른 바다와 갈색백사장이 마주치는 하얀 물거품 띠 앞에 사람들이 개미들처럼 움직인다. 다대포해변공원 생태수로를 따라 문화관광해설사의 집에서 본격적으로 몰운대 트레킹에 들었다. 울창한 해송들 사이로 오르막임도는 위세가 당당하다. 나는 뻥 뚫린 임도보다는 숲속 길로 빠져들었다.
바람 한 점도 없다. 새소리도 안 들리는 고요한 숲엔 힘 빠진 11월의 햇살만 기웃거린다. 햇살이 밝힌 숲길에 햇빛이 짜낸 피톤치드로 나를 천국에의 길로 안내한다. 푹신한 평지야산의 숲길은 다대진동헌(多大鎭東軒)에 닿는다. 동헌은 동래지역 수군(水軍)군영으로 다대포진의 첨절제사(첨사)가 정무를 보던 유일하게 남아 있는 건축물이다. 왜구의 침입을 막는 군사요지로서 임진왜란 이후 부산진과 함께 다른 진보다 더욱 중요시되었다. 이곳 수령이 초하루와 보름에 대궐을 향해 망배(望拜)하고 사신들의 숙소와 쉼터로 이용한 곳이기도 하다. 여기서 나는 정운공순의비 첫 탐방트레킹에 들었다.
정운(鄭運)은 영암(靈巖)출신으로 무과에 급제하여 임진왜란 때(선조 25년) 전라좌도 녹도(鹿島) 만호(萬戶)에 기용됐다. 1592년 9월 1일(음력) 이순신장군의 우부장(右部將)으로 부산포해전에 참전하여 왜적병선 500여척과 싸워서 100여척을 격파할 때 선봉장으로 분전하다가 적탄을 맞고 순절하였다. 출정을 앞둔 전날 충무공은 연일 독전에 지친 정운장군에게 부산포해전은 간곡히 만류했지만 ‘장수가 전장에서 빠져선 안 된다고 출정을 하여 비명 했으니 이순신장군은 애통하기 그지없었다. 1798년(정조22)에 정운공의 8대손 정혁(鄭爀)이 다대포첨사로 부임하여 몰운대에 정운공의 순의비(殉義碑)를 세웠다.
공덕을 추모하는 비문에는 정운공이 수군선봉으로 몰운대 아래서 왜적을 만났을 때 몰운(沒雲)의 운(雲)자가 자기 이름자인 운(運)과 음이 같다하여 이곳에서 죽을 것을 각오하고 분전하다 순절하였다고 했다. 정운공순의비가 있는 곳은 다대포 남쪽 끝으로 1983년 다대포 무장간첩 침투사건으로 민간인 출입금지구역이었다. 당시 간첩선 격침과 생포된 간첩 2명 탓에 군사작전지역이 되어 군사시설과 벙커, 사격장 등의 다대포중대가 들어선 금지구역이었다. 지금은 동절기인 11월~3월엔 06:00~18:00까지, 하절기인 4월~10월엔 05:00~20:00까지 입장이 가능하다.
정운공순의비 길을 나는 오늘 첫 탐방인데 숲속을 뚫은 신작로는 하도 후미진 곳이어선지 인적이 없고 멧돼지가 뒤져놓은 흔적만 역역하다. 야생국화가 해맑고, 팔손이가 꽃대를 활짝 폈다. 천남성이 여기저기서 빨갛게 익은 열매를 과시하느라 커다란 잎마저 뭉갰는데 카멜레온색깔의 열매가 맹독성인가? 사약의 원료로 쓰였다는 천남성의 서식지가 남녘 몰운도라니! 탐방 길은 순의비가 있는 군부대에서 끝난다. 숲속에 해안벼랑길이 있는데 출입금지 팻말이 있어 망설이다가 미친 척 따라갔다. 아마 군 초병들의 해안순찰 길이지 싶었다. 오르락내리락 빡센 산비탈 숲길은 여간 가파르다.
사고라도 나면 개죽음(?)이란 생각에 여간 조심하는데 울창한 수목사이로 얼굴 내미는 섬 바다풍경이 절경이다. 산비탈 벼랑숲길은 음수대 삼거리에서 정규코스에 합류했다. 검문(?) 없이 무사히 통과해 한숨 놨다. 몰운대 전망대에 오른다. 시멘트망루는 폐허 자체로 을씨년스럽다. 덩치 큰 쥐섬이 양 옆구리에 동선과 동호섬을 거느리고 당당하게 다가선다. 쥐섬 동편에 몰운대등표섬이 좌표를 알려주고 그 뒤편 화준구미 앞바다에 고래섬이 지금 막 수면위로 솟았다. 쥐섬에서 한참 떨어져 남`북형제섬이 손짓을 하는 푸른 망해를 몰운대전망대는 공짜로 보시한다.
천길 단애의 전망대에서 고개를 빼고 발밑 바위에서 세월을 낚는 강태공들을 보려면 아찔하다. 저기 아래까지 내려가는 바위곡예 길은 아예 보이질 않는다. 강태공들은 고기 낚는 재미보단 바다와 하늘과 섬과 구름을 품는 희열과, 파도소리와 바람소리와 갈매기의 울음소리에 뱃고동우는 자연의 오케스트라화음에 열락하지 싶었다.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원시의 시간을 향유하고 있음이라. 나는 바위에 쪼그리고 앉아 바다 끝 소인국의 낚시꾼들 포퍼먼스를 해석하느라 시간을 잊었다. 몰운도는 낚시꾼들의 유토피아다. 군대 철책선이 철거 된 해금(解禁)지역의 해안숲길을 소요하며 즐기는 풍광은 환장하게 멋지다.
보이는 동적(動的)인 건 바닷새와 배와 파도뿐이고, 들리는 건 파도소리와 새소리와 바람소리뿐인 무인도에 떨궈진 천사천하유아독존을 생각 키우는 순간이다. 화준구미초소에서 안는 세상도 여일하다. 적요에 빠져들면 절애고도에서의 홀로란 무서움도 사라진다. 밤이 없다면, 배만 고프지 않다면 바위에 침낭 깔고 몇날며칠을 이렇게 있고 싶다. 바람소리가 들린다. 아니 스친다. 누런 갈참이파리가 공중에서 곡예를 하다 수풀위로 사라진다. 가을을 잊을 뻔 했다. 배낭을 메고 일어섰다. 숲속의 고독한 소요를 즐기며 몰운대시비(詩碑)를 향한다.
“호탕한 바람과 파도천리 요만리 / 하늘가 몰운대는 흰구름에 묻혔네
새벽바다 돋는 해는 붉은 수레바퀴 / 언제나 학을 타고 신선이 온다”
<몰운대찬가>는 선조 때 동래부사 이춘원(李春元)이 새벽의 몰운대해돋이의 장관을 읊은 시다.
통신사 조엄(趙儼)은 그의 해사일기에서 “몰운대는 신라이전에는 조그마한 섬으로 고요하고 종요한 가운데 아름답고 아리따운 여자가 꽃 속에서 치장을 한 것 같다”라고 감탄했다. 낙락장송 해송들이 도열한 채 나를 전송한다. 다대포해변공원 생태공원 수로에 파란가을하늘이 흐른다. 풍경이 흐르고 나도 흘러간다. 갈대밭이 속살대더니 바람을 일으키고 하얀 갈대머리칼을 손수건 흩날리듯 흔든다. 일제히 한 방향으로~! 2024. 1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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