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니까 봄이다. 다산초당의 만덕산
무예 그리 부끄러워 우윳빛으로 분탕을 했을까? 조춘(早春)은 산고의 아픔을 농무(濃霧)로 뒤집어쓰고 안간힘을 쏟나싶다. 어느 땐가부터 나를 따라붙은 햇님도 뿌연 안개 속에서 갈필 못 잡은 형국이다. 무릇 탄생은 찢어지는 아픔이기에 신비의 장막을 친다.
-범종각에서 본 옥련사-
안무 속에 너른 나주들판이 어렵푸시 얼굴을 내민다. 문득 포졸들에 에워싸여 유배 길을 재촉하는 두 형제의 남루한 모습이 어른댄다. 215년 전, 이맘때 약전`약용형제는 신유사화에 연류 돼 나주까지 끌려와서 율정주막에 잠시 머물다 다신 못 볼 이별을 해야 했다. 약전은 흑산도로, 약용은 강진으로 유배길이 나뉜다.
나는 다산(정약용)이 18년간을 머문 강진을 향해 안개 속을 질주한다. 열시쯤 옥련사 앞에 닿았다. 한적한 산간야산을 등 엎은 절간은 커다란 종각과 부도가 전부인양 싶었다. 이윽고 야산을 오른다. 만덕산깃대봉을 향함이다.
훤칠하게 잘 생긴 소나무가 하얀 동아줄 하나를 팔에 걸고 늘어뜨린 채여서 사연이 여간 궁금한데 산세가 된비알이라 몽상할 여유가 없다. 아니 생강나무가 노오란 분을 찍어 발라 요염하게 웃고, 진달래가 빨간 입술을 내미는 통에 놈들한테 정신을 뺏겼다.
-소나무 & 동아줄의 사연?-
그러고 보니 발부리에 산자고가 수줍을 떨고 있고, 춘란이 핏대 훤히 보인 목을 내밀고 해맑게 웃고 있다. 놈들을 탄생시키기 위해 봄은 아까까지 안개를 뒤집어썼던 모양이라. 생명은 결단코 잔인한 아픔을 동반한다, 동토를 녹이고 두꺼운 지표를 뚫느라 어린 싹은 얼마나한 아픔을 삼켜야 했겠나. 나목들이 겨드랑이 살을 찢고 연둣빛 싹을 내밀고 있는 아픔은 성스럽기까지 하다.
그 신비경에 된비알을 오르다 멈춰 서자 바다는 뿌연 안개 속에서 땅을 야금야금 갉아먹으며 파란간척지를 넘보고 있다. 아~! 아파야 봄은 온다. 아픔을 안고 저 아련한 바다를 달려온 바람의 상쾌함이라니! 초록간척지의 강진만의 농무는 신선한 봄의 아픔까지 묻어나서 뱃속 시리도록 퍼마시는 거였다. 산님을 위한 자연의 레시피특식이라.
능선에 오르자 이젠 올망졸망한 현무암들이 바위마실을 이루고 소나무들을 건사하며 줄 차게 깃대봉을 향한다. 필, 구시골창, 듬북쟁이, 통샘거리, 라고 부르는 정감어린 봉우리들은 한 결 같이 멋진 바위동네라, 그 마을고샅을 통과의례 치루는 산행맛이 여간 옹골차다.
호남정맥이 남녁으로 달리다 월출산을 낳고 두륜산에서 똥 누느라 멈칫, 오른발은 달마산에 왼발은 만덕산에 내딛고 있나싶다. 깃대봉을 넘어 바위마실이 마련한 점심자린 천상의 오찬장이라.
혀 날름대는 바다, 푸른 옷 막 갈아입은 간척지, 바위동네에서 흔들어대는 빨간 진달래손수건, 뉘웃거리는 태양, 정오를 지났는데도 부끄러워 안무 걸치고 있는 능선들, 귓불을 간질거리는 해풍은 자연이 마련한 융숭한 잔칫상이라. 배터지도록 포식했다. 동티나도록 퍼먹어도 시비할 사람도 없다. 오직 산님들을 위한 자연의 오찬파티인 것이다. 근데 백호산님들이 비빕밥을 만들어 들려준다. 그 그릇도 비웠다.
이윽고 백련사에 들어선다. 동백천지가 아니랄까봐 짙푸른 초록터널은 그림 같은 빨간 꽃덩이를 풀섶에 박아 놨다. 무예가 그리 급해서 동백은 싱싱한 꽃덩이를 통째로 떨구었을까? 봄이라지만 아직 겨울한기는 미적거리고 있는데~. 하긴 경내에 매화가 하얀 놈, 빨간 놈 할 것 없이 만개했고, 노오란꽃 생강나무가 분냄새 바람에 나붓 덴데다 오리나무도 수술 늘어뜨렸으니 동백이 맘 조일만하게 됐다.
서성 김생의 글씨라는 ‘萬德山 白蓮社’ 현판 앞서 절‘寺’가 아닌 단체‘社’가 된 내역을 더듬어 봤다. 고려 희종 때인1208년, (최씨)무신정권이후(1211) 원묘국사 요세(圓妙國師 了世,1163~1245)스님이 문벌귀족체제와 결탁한 불교계에 대항하여 천태종(天台宗)을 주창하면서 사찰 개혁운동인 백련결사운동을 전개할 때 중창하면서 백련사(白蓮社)라 함이었다.
종교가 정치에 휘둘러서도, 정치란 그늘막에 안주해서도 안 되는 사연을 안고 있음을 이 순간에도 지구상 도처에서 목도하게 한다. 선생을 무척이나 아꼈던 정조가 승하한 이듬해 1801년(순조원년) 신유사화가 일어나 주변 인물들이 참화를 입고 형,정약종도 참수를 당했다. 그 빌미로 선생도 강진에 유배당하여 18년을 머물며 백련사와 연을 맺게 됨이라.
선생이 부근에 초막을 짓고 은거하며 백련사를 내왕한 발자취를 더듬고 싶어 찾은 오늘의 산행이기도 했다. 사찰을 훑고 다산초당을 잇는 숲길을 향한다. 선생이 매일 다산초당에서 백련사까지 800m의 산길을 오가면서 혜장스님과 선문답을 나누고, 더는 초의선사와도 다도를 즐겼었다.
-백련사 경내-
백련사 주지 혜장스님은 10살 위인 다산을 스승 겸 글벗으로 모셨고, 한 편으론 선(禪)과 다도를 가르쳐주기도 했었다. 혜장은 제자들이 ‘스님’ 대신 ‘선생’이라고 불렀을 만큼 자유분방한 성격의 불가의 큰 학승 이였지만 과음주로 마흔 살에 이생을 떴다.
그런 스님이 죽자 선생은 만시(輓詩)와 제문(祭文), 탑명(塔銘)을 지어 그와의 우정을 그렸다.
“이름은 중(僧), 행동은 선비라 / 세상이 모두 놀랐거니 슬프다. 화엄의 옛 맹주여 / 논어책 자주 읽었고
구가(九家)의 주역 상세히 연구 했네 / 찢긴 가사 처량히 바람에 날려가고 / 남은 재 비에 씻겨 흩어져버리네 / 장막 아래 몇몇 사미승 / 선생이라 부르며 통곡하네.”
-혜장의 다비식 후 다산이 지은 만시-
그런 정황을 그리며 동백숲길을 찾아들다가 뜬금없이 모 전남도의원을 만났다. 그는 커다란 골판지박스를 들고 비탈숲길을 힘겹게 오르다 마주쳐 잠시 얘기꽃을 피웠는데, 마침 암자에 머물고 있는 손학규 전 지사님을 찾아뵙는 길이라며 동행을 권했다. 박스엔 막걸리가 가득했다. 손학규님이 즐겨 마셔서란다.
님을 대면한 적은 없지만 평소 흠모하는 분이라 인사드릴 요량으로 그와 동행하며 한참을 올랐다. 사립문밖에서 그가 전통을 띄웠는데 아직 멀었단다. 난 사립문에서 시간 핑계대고 아쉽지만 돌아섰다. 그가 손을 흔들었다. 님을 사랑해 달란다. 님은 정계를 떠났지 안했던가. 허나 영국신사풍격의 님을 사랑하다마다.
되짚어 내려오다 수도처를 에둘러 동백숲 속의 부도밭을 훑고 무성한 시누대밭 사이로 난 오르막을 올라 깃대봉등산로에 진입했다. 이름 모를 새들만의 천국인양 재잘대는 노래가 낭창하다. 다산초당뒷산을 올라 보고팠다. 낙엽관목능선에 이르자 강진만이 저만치다. 갈림길에서 하산한다. 다시 빽빽한 시누대밭 조붓한 길을 한참동안 내려왔다. 오직 새들의 노래뿐이라.
-선방-
해월정삼거리에 내려섰다. 다산초당을 향한다. 다산선생은 매일 이 길을 오갔을 테다. 이 조붓한 길을 산책하며 수많은 경서를 탈고했을까? 삼나무와 측백나무, 동백과 참식나무, 전나무와 소나무, 대나무가 우거진 오솔길을 걷자 천일각이 강진만을 앞세우고 벼랑에 서있다.
-암자 싸립문 (손 전 지사 은거지)-
소나무 사이로 얼핏얼핏 보이는 푸른바다 만 뒤로 흑산도를 수없이 그려봤을 선생의 모습을 생각해봤다. 나주 율정주막에서의 이별이후 흑산도에 유배된 형의 근황을 어찌할 건가? 애간장 끓었다. 두 분의 우애는 각별했으나 1816년 6월에 형 약전은 그곳에서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산포루광(山抱樓光) ; 정재원(丁載遠 1730~?)
"소나무 사이로 스님이 합장하며 맞으니
금릉(강진)의 옛 절 쓸쓸하여 고요하다.
돛은 나무 그림자 사이로 비쳐
섬을 돌아가고
산은 누각의 빛을 안아 늦은 조수에 떴네.
빈 뜰 늙은 바위엔 비취빛 항상 적시고
지경이 높아 가파른 돌계단 바람에도
흔들리겠네.
천년을 전해 온 김생의 글자 여섯
아직도 은구인양 푸른 하늘을 당긴다.”
다산이 편찬한〈만덕사지>에 실려 있는 시의 지은이는 다산 정약용의 아버지다. 동암(東菴)으로 내려선다.
-천일각에서 조망하는 강진만-
다산의 동암엔 당시 2,000여 권의 책을 갖추고있어 목민심서를 비롯한 불후의 저술을 남겼다.
다산초당(茶山草堂)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친필을 집자한 것이란다. 뒤뜰에는 약천(藥泉)이란 샘이 있는데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마시면 담을 삭히고, 묵은 병에 효험이 있다하여 약천이라 했다. 선생이 차를 끓이던 물인데 지금은 폐정이단다.
-다산초당 약수-
왼편 산비탈을 좀만 올라가면 바위에 정석(丁石)이라는 글자가 음각됐는데 다산이 유배를 끝내면서 손수 쓰고 새겼단다. 자신의 성씨(姓氏) 丁자 한자만을 내세운 참으로 단아한 성품의 실사구시 그대로를 엿보게 함이다.
-다산산생의 친필-
초당에서 상록수 우거진 가파른 계단을 내려온다. 새들의 천국이다. 그들 울음이 아픈 봄을 찬양함일까. 선생의 고독을 일깨움일까? 선생은 자녀들에게 많은 편지를 썼는데 겸손하고 검소한 생활 속에 베푸는 삶을 살아야한다고 역설한다.
-원형부도-
"밥을 짓지 못하는 사람에게 곡식을 주어 구제해 준 적이 있었느냐? 눈 속에 얼어서 쓰러진 사람에게 땔나무 한 묶음이라도 나누어 주어 따뜻하게 해준 적이 있었느냐? 병이 들어 약을 복용해야 할 사람에게 약간의 돈이라도 내어서 약을 처방해 주어 일어나게 한 적이 있었느냐? 늙고 가난한 사람을 때때로 찾아뵙고 절하여 무릎을 꿇고 마주 앉아 공손하게 공경을 드린 적이 있었느냐? 근심거리가 있는 사람에게 걱정스러운 안색과 놀란 눈으로 기꺼이 그들과 함께 근심걱정의 고통을 나누어 잘 대처할 방도를 의논해 본 적이 있었느냐?” 고 각성시킨다.
우리가, 대통령을 비롯한 지위높은 분들이 새겨들어야 함이다. 세월호참사 1주년이 돼 가는데 그때 유가족들이 문밖까지 찾아와 단식하며 사후방책을 얘기하자고 기다렸으나, 문전박대했던 우리들을 기억하며 선생을 생각해 봤다. 새들의 울음은 200년 전의 선생이 그런 우리들을 가슴아파하는 신음을 노래하는지도 모른다.
小山蔽大山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리는 것은)
遠近地不同 (멀고 가까움의 지리적 위치가 다르기 때문이다 - 다산선생이 7세 때 쓴 시-
지금 안 보인다고 영원히 안 보이는 게 아니고, 말하지 않는다하여 결코 몰라서 아니함이 아니라. 베풀어야 대접받을 수가 있다. 18년간 선생의 발길에 닳았던 그 길을 걸으며 참 많은 생각을 해보는 거였다.
다산초당을 거닐며 맘 한켠 애잔함을 떨칠 수없었던 것은 홍임의 서글펐을 일생 이였다. 홍임은 선생이 이곳에서 얻은 소실 정씨의 딸인데 평생을 서녀린 딱지를 달고 아비 없는 설음의 삶을 살다 흔적없이 사라져서였다.
'애비없는 자식?'이란 설음은 오로지 선생의 책임일 터이다. 아마 선생은 노후에 그런 홍임을 맘에 묻고사느라 늘 가시방석에서 떠날 수 없었을 거란 생각을 해봤다.
아픈 봄날, 백호님들이 나를 따뜻하게 품어 이곳을 걷게 해줘 고마웠다.
2015. 03. 22
-강진만과 간척지-
-깃대봉-
-삼성각 & 배롱나무-
-천불상-
-해월정-
-천일각-
- 영모당-
-해설사와 탐방객들-
- 탁주박스를 든 모 의원-
-동암-
-손 전지사 은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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