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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 길 - 산행기

겨울소백산으로의 엑서더스

겨울소백산으로의 엑서더스

 

 

오후엔 비로봉에 눈발이 날릴까. 내륙에 비가 내리기만 하면 소백칼바람은 비를 눈으로, 눈 그대로를 놔두질 않고 상고대비스무리 한 거라도 만들겠지. 새벽3시에 잠을 깬 나는 어제 밤 (중부내륙지방의 비)일기예보를 다시 떠올렸다.

 

사실 내가 오늘 소백산행을 결심한 건 일기예보에, 더는 시흥 사는 불꽃님이 비로봉에 불을 지핀다고 해서였다. 그래 엊밤 미친 척 새이리떼총무에게 전활 넣고 용케 끼어들 수가 있었다.

6시 전에 집을 나서 소백산국립공원북부사무소에 닿긴 10시였다. 하얗게 설국을 이룬 천동계곡을 파고든다.

 

 

돌과 바위는 흰 솜털이불을 덮고 동면중이다. 골짝도 적설 아님 빙하인데 적막을 깨우는 소리 한 절씩은 빙하를 흐르는 물소리라. 그 가냘픈 소리마저 산님들 발길에 짓뭉개져 파열음을 내는 눈의 신음소리에 끊기곤 한다.

그나저나 이 엄동설한에, 칼바람만 윙윙댈 소백산엘 뭣 땜에 가방하나씩 메고 꾸역꾸역 모여드는 걸가?

 

 

초록 옷 죄다 벗어던지고 죽은 듯 푸른 하늘에 여린 라지들 간단간단스레  매단 삼나무떼거리들을 유심히 보는 이도 없다. 하얀 설토에 발 담그고 시꺼멓게 멍든 몸뚱일 햇볕 찾아 비벼대는 신갈나무의 몸부림을 짠하게 여기는 분도 없다.

미쳤다고 가쁜 숨 몰아쉬며 땀으로 멱 감은 채 비로봉을 향하는지? 어느 미친 작자가 비로봉에서 세종대왕 한 장씩 준다고 바리바리악써도 칼바람 맞으며 올라갈 맨 정신은 없을 테다.

 

 

눈에 쌓인 하얀 민둥산, 귀 잘려나가도 모를 칼바람만이 난무하는 비로봉엘 개미떼처럼 오르는 이유를 알다가도 모르겠다. 하긴 나도 살벌하고 황량한 광란의 소백산 등걸을 몇 번째 오르고 있으니 나만 안 미친 척 해봐야 욕만 바가지로 얻어먹기 딱 일게다.

연화봉능선과 만나는 안부에 닿았다. 신갈나무잔챙이에 매달린 상고대가 울고 있다. 파랑하늘과 부신 햇빛에 눈이 시려 눈물을 짜고 있는 걸까? 널 보자고 이 고생하며 올라왔는데 눈물 흘리고 있다니!

 

 

추워선지 주목도 검 초록침엽에 매단 얼음 꽃을 눈물짓게 하고 있다. 몇 백 년을 이렇게 눈꽃 피우고 눈물 짜고 하면서 거창한 주목군락을 이뤘을 테다.

이 독특한 소백산만의 담대한 주목풍광이 멋있어 주목단지를 조성하고, 지킴이 초소까지 만들어 놨는데 초소는 불청객들의 라면 끓여먹는 아지트로 탈바꿈했다.  주목이 눈물흘릴 소이 하나라.

 

 

나도 초소 모퉁이 한쪽을 바람벽삼아 선채로 육포와 초코와 커피로 기갈을 채웠다. 울 밖에선 라면 끓여먹을 대기자들이 선임자방 뺄 때까지 줄서기를 해야 했다. 뜨건국물 먹어야 직성이 풀릴 성깔에 임자없는 자릴 기다리다니 대단한 인내심 소유자들이다. 진정 이래도 되는 걸까?

저 아래 샘물이 있어 여기서 비박하는 산님들이 조리하는 장소로 소문나 이지경이 됐다고, 어느 산님이 내게 뜨건 라면국물 한 컵을 주면서 묻지도 않은 답을 하는 거였다. 라면 끓이는 짓이 떳떳치 못한 걸아는 까닭일 테지만 말이다.

 

 

산행 몇 시간 동안에 뜨건 국물 안 먹는다고 배탈 날일도 없고, 힘 빠져 더 이상 산행 못할 지경이 되지도 않을 테다. 꾹 참고 하산하여 먹으면 인내심도 기르고, 다이어트도 하고, 남 보기도 좋고, 그 무엇보다 자연생태계에 좋단 걸 알면서 추태를 떨어야하니 딱하다.

비로봉 오르는 하얀 능선에 검은 밧줄 하나를 늘여놓고 엑서더스는 이어진다. 햇볕 쨍한 겨울날의 하늘은 남빛수정이다. 그 무서운 칼바람은 어딜 갔을까? 아니 어디쯤 오고 있을까?

 

 

산님들 죄다 콧구멍만 내놓고 중무장했지만, 내 그간의 몇 차례 겨울소백산의 칼바람이 이렇게 순둥인 적은 없었다. 비로봉표지석은 산님들이 방풍벽을 쳤다. 인증샷 하려는 산님들이 아까 초소에서 라면 끓이는 자리 기다리기 식이라.

내 오늘처럼 비로봉을 아그작대며 뺑 돌아 사위를 조망해 보기도 첨이다. 칼바람은 새벽녘에 티끌 하나 없는 우주를 만드느라 청소를 했나보다. 코발트하늘이 곧 쏟아내릴 것 같다. 

비로봉에 올라 내가 백두대간 중심에 서고, 천지의 띠가 하늘과 땅의 끝 이처럼 선명하게 나를 원주로 빙 둘러쳐진 걸 목격한 적도 없다.

 

 

칼바람 없음 없는 대로, 상고대 안피웠음 안 핀 그대로의 비로봉은 또 다른 장관이라.

그간 비로봉칼바람에 쫓겨나듯 아니, 사지에서 탈출하듯 죽을 판 살판 빠져나오기 급급해 어디 조망할 엄두나 났었든가. 오늘에야 비로써 비로봉의 민낯을 들여다볼 수가 있어 좋다.

신선봉과 국망봉을 이은 하얀 능선은 제1연화봉을 묶고 연화봉천문대를 세워놓고 연무로 원적봉을 섬으로 만들곤 저만치에 천지의 띠를 에둘러쳤다.

 

 

천상천하유아독존을, 우주의 중심이 나란 사실을 실감하는 자리였다. 나란 존재가 얼마나 귀하고 책임 또한 막중한가. 엑서더스는 뭣 땜에 줄차게 이어지는가!

돈이면 다인 듯한 세상에서 돈으로 살 수 없는 무형의 보배를 얻을 수가 있어 칼바람의 비로봉엘 오르는 건가 싶었다. 우주의 한 중심, 설원을 걸으며 무한대의 호연지길 품는 정취는 이 자리에 서지 않곤 상상도 못한다.

 

 

어이계곡을 향하는 능선자락에 상고대가 어설펐다. 어제까지만도 기막혔단다. 안쓰런 건 이제 뿌리 내렸다싶을 주목이 칼바람에, `쓰나미에 초죽음 됐다. 어의계곡의 엑서더스는 천동골보다 더 심하다.

깨 벗은 신갈나무군락지엔 산님들이 눈 위에서 기갈 채우기에 야단법석이다. 시장기 때우는데 시비 걸자 없겠다. 다만 라면 끓여먹는 짓은 안 하면 좋겠다.

 

 

더구나 여긴 국립공원이다. 따로 지정 된 취사구역 외에 국립공원에서 음식 조리해 먹는 사람은 세계에서 우리뿐일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내집 정원에 불청객이 침입해 요리해 먹으면 멍석 깔아줄 텐가? 동행한 산님도 몇 번 씁쓸한 입맛 다셨었다.

하산 한 시간쯤 됐을까? 통화불능지역이라 소식이 없던 불꽃이 지금 비로봉에서 불 지핀다고 알려왔다. 2km쯤 하산했으니 연기 피워봐야 난 거기에 없다, 라고 하산을 최촉했다.

 

 

오늘 나를 소백산에 있게 한 불소시게 불꽃은 시흥에서 엑서더스에 합류했단다. 내가 불꽃과 교우한지는 고작 보름쯤이지만, 난 그녀의 열정과 탈랜트 같은 비상함에 매료 돼 새이리떼에 합류함이라

댓글과 메시지로 엿 본 그녀의 활화산 같은 정열은 매사에 긍정적으로 임해선지 행복해보였다. 우린 하산하여 주차장에서 첫인살 하고 뒤풀이장소에서 얘기꽃을 태웠다. 우연한 만남은 없다. 뜻이 길을 만듦이라.

 

 

어젠 태안반도 꽃지해변을 네 시간 거닐고, 오늘 다시 연화봉쪽에서 엑서더스 하여 그것도 나와 거의 동시간대에 마무리했으니 설산을 날다시피 한 강철의 알피니스트라.

고향이 이리라서 이리떼들과 쉽게 동화하고,  결코 빼빼 아닌 나를 들었다놨다 들었다놨다하고, 한국(동양)화에도 일가를 이루며, 낙서도 수준급에다 테니스선수에 산악회장도 했다고 불꽃의 동지가 내게 귀띔해 줬다.

 

 

어찌됐던 산을 사랑한 탓에 천리 밖의 그녀와 내가 느닷없이 비로봉에서 해후하자고 운을 띄워 달려왔으니 대단한 열정이라. 하나 아쉬운 건 비로봉에서 불꽃피우고 함께 태우질 못했다는 점이였다. 전화불통 탓이다. 

헌데 이나라 장관들은 박대통령과 전화 연결해놓고도 불통이라니 장관해먹느라 용하단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대면해야만 소통이냐?고 딴죽거는 데야 십상시란 말이 회자 된 까닭을 어림케 한다.

 

오랜만에 찾은 새이리떼들 속에서 따뜻하게 맞아준 얼굴들 삼삼하지만, 특히 고맙고 낙서나마 끌쩍대고 싶은 (그분이야 좋아하던 안하던 간에)분은 캡틴님이라.

친절이 뵌 님이기에 난 만나면 항상 격의 없이 대하곤 하지만 늘 친절을 받고만 있어 미안하다. 누구 못잖게 산을 사랑하는 땜일까! 한결 건강하고 완숙한 님은 낚시광인 동생과 올케까지 산사랑의 은전을 입게 하느라 맘쓴다고 자랑(?)했다.

칼바람비로봉을 향하는 엑서더스의 이유는 뭘까? 하고 캡틴님 동생님들은 오늘 생각해 봤을 테다. 가족이 모두 산 사랑하는 산님이 된다는 건 축복받을 경사다.

 

 

산은 돈으로 살수가 없는 무형의 보배를 산을 사랑한 만큼 반드시 얻게 돼서다. 돈 없을수록 산이라도 사랑할 일이다. 산은 해코지만 않음 우릴 풍요롭게 한다.

나를 비로봉에 서게 한 새이리떼와 동기부여를 해준 불꽃님께 감사드린다. 그들 모두의 건승과 행운을 빈다.

2015. 01. 18